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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문화장벽 극복 (행 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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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 베드로의 신앙 성장 과정은 우리의 영적 성장의 위치를 알게 한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장성한 자로 성장해 갈 때 고비 고비마다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전적으로 부모의 손에 의탁된 유아기의 과정으로부터 사춘기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그 변화의 과정을 무난히 넘긴 아이는 정상적인 인격체로 세상 가운데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아이들은 여러 가지의 부적응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 변화의 단계마다 긴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우리의 신앙 성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육적인 생명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모습들이 영적인 생명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신앙 성장 과정은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 여러 번의 변화의 과정을 거쳐 위대한 사도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성장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영적 진리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첫째는 “만남”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게 되었고,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둘째는 “능력체험”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많은 기적의 경험을 통해 능력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셋째는 “신앙고백”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넷째는 “절정경험”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사건을 체험함으로서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할 정도의 영적 황홀함의 극치를 맛보았습니다. 다섯째는 “세상실패”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넷째 단계까지는 무난히 넘었지만 세상 현실을 만나는 곳에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 안에서만 경험했던 신앙인의 모습이 세상 속에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여섯째는 “세상회복”의 과정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만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을 통해 세상속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일곱째는 “성령충만”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성령 충만을 통해 영적 능력으로 세상의 여러 상황들을 통합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마지막 여덟째는 “문화장벽”의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최종적으로 유대주의 문화장벽을 극복한 후에야 사도로서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그의 신앙의 마지막 과정인 문화장벽을 뛰어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유대인 베드로를 마지막까지 가두어 둔 문화장벽은 유대주의였습니다. 베드로는 속된 음식을 구별하는 율법주의의 유대주의 문화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유대인의 하나님이시기에 유대인을 위해서만 역사한다는 유대주의 문화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는 성령강림 후에도 문화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유대주의 문화장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세상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성도의 개인적인 신앙성장이나 교회성장의 침체는 주로 문화장벽에 갇혀있기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속한 문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문화적 껍질을 벗지 않을 때, 세상 속에 들어가지도, 세상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침체 속에 빠집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자신이 속한 문화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세상을 판단하며, 세상 속에 들어가려 하기에 실패하곤 합니다. 이처럼 문화장벽 속에 갇힌 자들에게서 영적질병이 나타납니다.

2. 문화장벽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영적질병 치료의 역사이다.

사실상 베드로의 신앙인의 모습은 철저했고 완벽했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한 그 이상이었습니다. 행 10:9에 보면,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당시에 가장 경건한 그룹에서 지켜오던 하루 3번의 기도시간을 준수하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우리의 오전 6시를 0시로 시작하여 3시(오전 9시), 6시(낮 12시), 9시(오후3시)의 하루 3회 기도시간을 준수하였습니다.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문화장벽이라는 영적 질병의 근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영적 질병 치료를 위해서 환상 가운데 역사해 주셨습니다. 행 10:10에 보면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라고 하며 당시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때는 정오에 시장할 때에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시장할 때 환상 가운데 베드로 앞에 음식들이 보였습니다.

행 10:11-12에 보면,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라고 알려줍니다. 점심시간에 시장한 베드로 앞에 하나님께서 음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들은 레위기 11장에서 구별된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들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베드로는 이미 그 음식들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행 10:13에 보면,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이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그 음식을 먹도록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베드로의 영적 질병을 드러내게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시장한 베드로 앞에 나타난 음식과 그 음식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베드로의 문화장벽을 깨트리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보자기 속에 담긴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들은 문화장벽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의 영적 질병들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첫째로, 행 10:14에서 베드로의 반응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첫째 반응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반응입니다. 여기서 “그럴 수 없나이다(메다모스)”라는 단어는 “결코 아니다”라는 강한 명령 거부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거절한 세 번째의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마 16:22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시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는 요 13:8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행 10:14의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거부는 세 번째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대적행위입니다. 가장 심각한 영적 질병입니다.

둘째로, “잡아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두 번째 반응은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는 반응입니다.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다”라는 베드로의 반응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준행하여 왔다는 강한 주장입니다. 그동안의 자신의 신앙은 흠 잡힐 것 없는 신앙이었다는 자신감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이 최고의 신앙이라는 영적 교만에 빠진 질병입니다.

셋째로 “잡아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세 번째 반응은 “계속적인 거부”의 반응입니다. 행 10:15-16에 보면,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라는 표현은 베드로가 그토록 계속 거절했었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문화장벽 속에 계속 머물려는 강한 의지의 영적 질병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문화장벽 속에 갇힌 자들에게 나타나는 첫째 영적 질병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대적행위”의 질병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신앙이 최고의 신앙이라는 “영적 교만”의 질병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문화를 통해 세상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신의 문화 속에만 안주하려는 “현실안주”의 질병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영적 질병을 해결할 때만 침체에서 벗어나 성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의 문화장벽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곧 이러한 영적질병 치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문화장벽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작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병적인 반응에 대해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강한 권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막 7:19에서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율법적으로 더럽혀진 모든 피조물을 깨끗케 하셨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의 반복된 권고를 통해 세 가지 영적질병을 일으키는 문화장벽을 깨뜨리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세 번의 주님 거절을 통해 고통을 겪었던 베드로가 세 번의 주님의 사랑 확인을 통해 사도의 직분을 회복하였지만, 진정한 사도의 역할은 문화장벽을 허물도록 요구하시는 세 번의 강한 권고를 받아들일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는 세 번의 권고가 베드로의 영적 성장의 마지막 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명령입니다.

3. 우리기 신앙의 문화장벽을 깨뜨릴 때 문화변혁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

이어지는 본문인 행 10:17에 보면,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을 의심했었습니다. 하지만 행 10:19에 보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여 가며 그 증거들을 확인하였습니다. 행 10:17-33에서 고넬료와의 직접적인 만남은 하나님의 명령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행 10:34-48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깨어진 문화장벽들을 하나하나씩 고백합니다. 자신의 영적질병의 근원인 문화장벽들을 고백합니다.

행 10:34-35에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행 10:36-48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마음 문을 열고, 문화장벽을 깨뜨리는 모험을 감행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증거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행 10:47에서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라고 고백합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함을 통하여 유대인의 하나님이라는 베드로의 문화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를 향하여 복음이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행 15:6-9에서 보면, 문화장벽으로 인해 바울의 책망을 받기까지 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의 변호자 역할까지 수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간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환상 사건은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여 사도행전에만 세 번씩이나 언급되었습니다. 10장, 11장, 15:6-9에서 세 번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문화장벽 안에서 세상을 보는 한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병들게 됩니다. 베드로 전.후서에 드러나는 베드로의 신앙은 이 문화장벽을 넘어선 결과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문화장벽 안에 갇혀서 즐거워하며, 안주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신앙을 판단하고 안주하며 교만 가운데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혹시 우리끼리, 남자끼리, 여자끼리, 구역원끼리 등의 문화장벽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화장벽 안에 갇히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습니다. 문화장벽을 깨뜨리고 뛰어넘는 작업을 죽음처럼 생각합니다. 학교문화, 직장문화, 친구문화 속에 머물러 적응하며, 현실 안주를 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문화 속에서 기독교 문화를 적용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하는 영적 교만 속에 빠집니다. 모든 영역을 속죄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문화장벽에 막혀버립니다. 이것은 문화장벽을 파괴하는 아픔과 놀라움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안주하려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영적 질병은 매우 쉽게, 그리고 아주 빠르게 확산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다른 문화권에, 그들과 다른 문화를 들고 들어가게 역사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교회, 우리 기관의 문화권을 넘어가도록 많은 역사를 보여주시며, 깨닫게 하시는 것을 알고 반응해야 합니다. 다른 문화권을 향한 하나님의 지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기독교인이라면 말씀을 통해 늘 다른 문화권을 향해 나가도록 명령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문화권을 향해 무엇을 들고 어떻게 나갈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다른 문화권을 향해 주시는 환상들입니다 행 10:19에서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영적 침체, 영적 질병에 괴로워하는 영혼은 이 생각을 통하여 눈을 다른 문화권으로 돌려야 합니다. 우선 교회 내의 다른 기관들을 향하여 눈을 돌리며, 그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아닌 직장, 학교, 친구들의 문화권을 향한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문화권을 향한 생각, 묵상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납니다.

4. 신앙의 문화장벽은 복음 전파의 지상명령에 순종할 때 극복된다.

다른 문화권을 향한 우리들의 생각 속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의 영적 질병들을 치료하시며, 문화장벽을 극복해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 복음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 생명의 역사를 통하여 문화장벽을 넘어가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문화장벽은 이러한 생명을 질식하도록 문화 속에 가두어 둡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명임을 알고, 그 생명의 능동적인 역사에 순종할 때 문화장벽을 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는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능동적입니다. 적극적입니다. 문화장벽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행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문화장벽을 넘어서도록 행위의 약속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막 16:15에서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롬 1:15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며 이방인의 문화권 속에 복음을 들고 가려는 열망을 보였고, 그 열망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는 고전 9:23에서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라고 하면서 “복음”의 생명력 있는 역사를 따라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엡 3:6은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라고 하면서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됨을 알려줍니다. 이방인, 이방문화, 이방지역 등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인 삶과 거리가 있는 모든 역역들은 복음을 통해 하나 되게 해야 할 존재들임을 알려줍니다. 즉 모든 문화장벽은 “복음을 통한 하나됨”의 하나님의 의도에 순종할 때만 넘어설 수 있는 장벽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하여, 다른 문화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권 안으로 들어오게 하겠다는 인식이 없다면 문화장벽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복음전파를 통한 다른 문화권의 정복에의 열심이 없을 때는 다른 문화권이 적대적인 세력일 뿐이며, 경계를 긋고, 장벽을 쌓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력일 뿐입니다. 이럴 때 다른 문화권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거부됩니다. 오히려 그 명령에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전파를 통한 정복에의 열심이 있을 때는 그 문화장벽을 넘어갑니다.

복음 전파의 생명력을 지닌 그리스도인들마다 다른 문화권은 장벽을 칠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게 해야 할 사역지로 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사역지는 우리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 문화권이 아닌 다른 문화권입니다. 자신의 공동체 머물며 다른 문화권을 향한 명령을 거부하는 영적 질병에 빠진 자들이나 자신의 공동체에 수동적으로 머물며 영적 교만의 질병에 빠진 자들이나 현실안주 하는 자들은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진리 대신 거짓으로 가꾸어진 문화영역 속에 들어가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는 존재들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순리를 버리고 역리의 문화를 따르는 자들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의 죄악을 드러나게 하며, 순리의 문화 가운데 들어오게 하여야 합니다. 합당치 못한 일로 문화를 일구어 가는 영역들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합당한 일로 일구어지는 문화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즉 모든 영적 질병의 원인이 되는 문화장벽은 복음전파의 소명의식과 열심이 있을 때 극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다른 문화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며, 장벽을 치고 숨어버리고 싶은 문화권이 되어갑니다. 술문화, 담배문화, 성적 쾌락의 문화, 물질주의 문화, 우상문화 등 다양한 모습의 세상 문화들은 복음의 확신이 없는 자들에게 두려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생명을 지니고 있고, 그 생명의 역사를 알고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아닌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 불쌍한 문화영역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갑니다. 그들을 대적처럼 정죄하며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며, 성령의 인도하심과 공동체의 능력을 힘입어 그들 속에 들어갑니다.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며 복음으로 정복해 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문화장벽 극복의 역사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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