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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자 (사 6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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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기도 Pastoral Prayer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탕자와 같이 방황할 때, 문밖 먼데까지 나와 맞아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따뜻한 사랑과 인내로써 부족한 죄인들을 맞아주시고, 어둔 그늘 벗어 던지고 소망의 내일을 열어갈 수 있도록 축복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주일을 지내면서 세상의 풍파 속에 시달린 주님의 자녀들을, 은혜와 감동의 말씀으로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주셔서, 정치 경제적 안정과 영적 충만함을 허락하옵소서.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들을 사랑해 주셔서, 고난이 끝나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길 날을 하루속히 허락하옵소서. 하루속히 평화로운 통일을 허락하옵소서. 오늘 예배를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고 크신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Gracious Father God. We thank you for welcoming us when we wandered out of your house. We thank you for forgiving us and giving us with new hope for future. Comfort us who had been troubled with the worldly problems. Protect Korea and provide socio-political safety as well as spiritual fulfillment. Take care of the North Korean people. Give us the peaceful reunification. We worship you. May your name be glorified and bless us richly. In Jesus' name, Amen.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be the Peacemakers
마태복음 Matthew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b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the sons of God.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가난했던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합니다. Only he who experienced pain understands those who are with pain. It is only he who was poor that understands the poor.

그러나, 이런 경험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을 못한다고, 사람은 지금 배부르면 지난날의 고통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Such an experience, however, is not perfect. They tend to forget what they experienced. They easily forget yesterday's pain.

따라서 ‘과거의 경험’보다는 ‘현재 진행형인 아픔’이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하게 합니다. ‘동병상련’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Instead of past experience, therefore, the on-going pain helps us to understand other people's trouble better. It is said the patient suffering from the same disease understands better.

지금 상처 입은 사람이 참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상처를 알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 남을 생각하느냐?” “내 코가 석 자다!” 그렇게 말하지만, 자기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이 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고통 때문에 무시하지 않습니다. A wounded person can be a true healer; he knows what the wound means. Usually it is said, "How could you take care of others as you cannot deal with your own problems?" "I am too busy to help others." But he who is troubled with himself understands deeply. If he is a man of love, he does not ignore the person because of his own trouble.

예수님께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묘사된 ‘메시야’는 병을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Jesus was the "wounded Healer." The Messiah depicted in Isaiah 53 is the suffering Lord who took the disease of people upon his shoulder.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평화는 명사요, 화평은 “평화를 만든다”는 뜻의 동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Blessed be the peacemaker; his name will be the 'son of God.' This is the theme today we have.

평화의 길을 만드는 사람은, 평화가 정말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 나옵니다. 분쟁이 그치지 않는 나라, 그런 사회에서 살면서 진정한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평화를 위한 일군이 교육되는 것입니다. 전쟁의 포화에 쫓기는 사람처럼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Peacemakers come out of the peoples who really need peace. Peacemakers have been educated in the societies and states of wars, conflicts, and struggles. Is there any one who looks for peace more than the people living under the shadow of war?

평화를 위해 힘쓴 사람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은 “노벨 평화상”입니다. 이 상을 강대국의 지도자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공으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트남 분쟁해결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에 이 상을 받은 헨리 키신저가 한 예입니다. 그런데, 아니러니칼하게도, 공동수상자로 선정된 북베트남의 르둑토는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Nobel Peace Prize has been given to great peacemakers. Sometimes, political leaders of superpowers were awarded the Peace Prize. For example, in 1973, Henry Kissinger was awarded the prize because of his effort for the peace in Viet Nam. Ironically, however, the co-awardee, Redukto, refused the prize.

그러나, 아무래도 분쟁과 싸움이 그치지 않는 나라, 그 나라의 약한 지도자가 받는 것이 값진 일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키신저가 수상을 거부하고 르둑토가 그 상을 받았어야 빛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분쟁 당사자, 그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유일한 길입니다. The prize is good especially for the leader of the weak states suffering from the struggle. What if Henry Kissenger refused and Redukto accepted the prize? Peace for the suffering states is not a political choice but the only path for survival.

그런데, 가장 귀한 평화의 상은 노벨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상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받을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The best prize for peace, however, is not the Nobel Prize. It is what Jesus gives. Jesus taught us the prize for the peacemakers. It is to be "named to be the son of God." Jesus will call it as his name.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세상에 평화가 없음을 누구보다 실감하셨습니다.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Jesus worked for peace. As the Son of God, Jesus recognized that there was no peace in the world. He felt sorry about it very much.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며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1-44). Jesus wept. "And when he draw near and saw the city he wept over it, saying, 'Would that even today you knew the things that make for peace! But now they are hid from your eyes. For the days shall come upon you, when your enemies will cast up a bank about you and surround you, and hem you in on every side, and dash you to the ground, you and your children within you, and they will not leave one stone upon another in you; because you did not know the time of your visitation." (Luke 19:41-4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에 관한 일’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닥칠 환난과 관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 약 40년이 지났을 때,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로마는 군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다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뜨렸습니다. The things that make for peace as Jesus mentioned, was related to what happened soon after his death. About 40 years after the Cross, AD 70, Jerusalem was totally destroyed. Rome did it.

평화는 1. 심령과 마음의 평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다 좋아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모든 것이 쓸 데 없습니다. 2. 전쟁이나 기근이나 그런 환난이 없는 데서 옵니다. 무엇이 더 심각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심각합니다. 둘이 한꺼번에 닥칠 때도 있습니다. Peace has to dimensions. 1. Peace of spirit and mind. Even though everything is good, without spiritual peace, nothing is useful. 2. Peace without war or struggle. Sometimes the two comes simultaneously.

이 두 가지 모두가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평화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We pray for the two kinds of peace. Todays's scripture deals with the two.

평화는 소극적으로 ‘환난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담을 높이 둘러쌌습니다. 밖에서 오는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Passively speaking, peace means the situation without war. For the purpose of the peace, they have walled high. They intended to protect themselves from outer enemies.

그러나, 안에서 나는 환난은 성을 쌓아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 황제가 안의 적을 막지 못했습니다. But inner enemies cannot protect with the high wall. The Chinese emporer who build the Great Wall could not protect the inner enemies.

그러므로 평화는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Peace does not come from us but God.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임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Jesus as a child came to us as the King of Peace.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the peace in the earth among the peoples" (Luke 2:14).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이 평화를 원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지난 주 설교의 주제, 곧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와 일맥상통합니다. He who really needs peace could work for peace. He who does not have peace looks for peace. In this sense, today's sermon has something to do with last Sunday's sermon: "Blessed be the poor in spirit."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받을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평화의 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blessing given to peacemakers is the title: "the son of God." Because the son of God is the agent of peace.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스승들이 평화의 가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가르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 평화를 실천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 명만 뽑아 소개합니다. We are to be the agents. In world history, there have been a number of great teachers of peace. They taught us what is peace. They themselves were the men of peace. They worked for peace. Some will be mentioned.

마하트마 간디 M. Gandhi (1869-1948)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마틴 루터 킹, 한국의 함석헌 등 둘을 들 수 있습니다. Not a Christian, but he believed in Jesus. Based on Jesus' teaching, he worked for peace. Many have been affected by his non-violence peace movement. Martin Luther King, Jr. and Suk-Hun Ham are well-known figures.

먼저, 마틴 루터 킹을 소개합니다. 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대인인 말콤 엑스와 비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First, I would like to introduce M.L. King, Jr. To understand better, we may take Malcom X for comparison.

미국사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흑인의 저항은 대개 통합주의(integrationism)과 흑인 민족주의(black nationalism)의 두 노선으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 통합주의, 말콤 엑스는 흑인 민족주의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In the history of the USA, the resistance of the African-Americans upon the racial discrimination can be classified as the two: intergrationism and black nationalism. Martin Luther King, Jr. has been categorized as the one, and Malcom X is the other.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 1. 15 - 4. 4. 1968)

1929년 1월 15일, 남주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1988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왔습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목사였습니다. Morehouse College, Crozer 신학교, 그리고 보스톤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목사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Born in 1929 at Atlanta, GA, he was "PK": grandfather and father were ministers. He went Morehouse College, Crozer Seminary, and Boston Uinv. He was an ordained minister holding a degree of Ph.D. in theology.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1950-60년대만 해도 그건 백인들만 누리는 특권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흑인들을 해방한 지 10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흑인들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남부에는 “짐 크로우 법”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흑백분리정책이었습니다. 흑인과 백인들은 사는 지역, 학교, 공중변소도 달랐고, 버스 안에서도 앞자리는 앉을 수 없었습니다. 식당에서도 ‘유색인용’이라고 붙은 뒷문으로 출입해야 했습니다. The USA is a nation of freedom and equality. But in 1950-60s, the two were the privileges only for the whites. Even 100 years after the Liberation of A. Lincoln, the African-Americans had been suffering from racial discrimination. Especailly in the South, there was "the Law of Jim Crow." It was a separation policy. The blacks and the whites used public rest rooms, schools, restaurants separately. The blacks could not have front seats of a bus. For restaurant, they had to use the other door tagged "Only for the Colors." 

우리는 사실 흑인들의 덕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흑인들의 민권투쟁으로 동양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이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We need to give thanks to the blacks. Because of the struggle for civil rights by the African-Americans, the racial discrimination upon the minorities including Asians was seriously reduced.

그는 상대적으로 백인들의 인종차별을 심각하게 경험하지 않고 자랐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이더라도 안정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투쟁 방법도 ‘흑백통합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알라바마 주 몽고메리시 버스 코이코트 운동의 대표로 시작한 민권운동에서 두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11개월 동안 흑인들이 보이코트 한 배경은 흑백분리법의 일환으로 버스 안에 백인과 흑인 좌석이 구별되어 있던 것을 철폐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Comparatively, he was raised without experiencing serious racial discrimination. His movement was not so aggressive. He relied on peaceful method, aiming for the unification between the whites and the blacks. He was shown to the public in the bus boycott movement of Montgomery in Alabama. The background of the 11 months' boycott was to remove the division policy between the seats for the whites and those for the African-Americans. 

마틴 루터 킹은 1964년, 35세의 나이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40세가 되기도 전인 1968년에 암살당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명언 몇 개입니다. In 1964, when he was 35 years old, Martin Luther King, Jr. was awarded the Nobel Peace Prize. But in 1968, before becoming 40 years old, he was assassinated. The followings are some famous words he spoke.

비폭력이란 강력하고 정당한 무기로서 상처 없이 잘라내며,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어 준다. 비폭력은 치료의 검이다. Non-violence is powerful and just weapon, cutting off without wound, and makes its holder dignified. Non-violence is the healing sword.
우리는 두려움의 홍수에 버티기 위해서 끊임없이 용기의 둑을 쌓아야 한다. We need to build higher bank of courage to fight against the flood of fear.
증오는 인생을 혼란시키지만 사랑은 인생을 조화시킨다. 증오는 인생을 어둡게 하지만 사랑은 인생을 밝게 한다. Hatred makes a man confused, but love harmonizes. The former darkens life but the latter lightens it.

말콤 엑스 Malcom X (1925. 5. 19 - 1965. 2. 21)
말콤 엑스는 1925년 5월 19일 북부의 가난한 할렘가,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마틴 루터 킹보다 네 살이 위입니다. 그의 아버지 Earl Little은 목사였지만 마르쿠스 가비를 존경하는 흑인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그의 정규교육은 중학교 2학년으로 끝났습니다. 백인이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가난과 싸우는 동안 어머니가 정신이상이 되어 결국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In May 19, 1925, Malcom X was born to a poor black family in the North. He was 4 years older than M.L. King, Jr. Earl Little, his father, was a minister, but a black nationalist. In time of child, he wanted to be a minister, but his public education ended with 7th grade. Some whites burnt his house and killed his father. Fighting against the poverty, his mother got mental disease, and all family members were scattered.

절도와 마약 밀매로 10년 형을 선도 받고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감옥에서도 ‘사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밤비라는 사람을 만난 이후, 감옥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회교도가 되었습니다. He was imprisoned 10 years because of stealing and drug dealing. His nick name at the prison was 'satan.' But having met Bambi, he started study at the prison. He became Moslem.

말콤 엑스는 흑백통합이 아니라 미국 내에 ‘흑인 자치 구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폭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65년 2월 21일, 말콤 엑스는 암살당했습니다. Malcom X insisted not unification between the withes and the blacks but the establishment of the black-governing district. He did not trust the non-violence. In 1965, he was assassinated.

비교 Comparison:
어린 시절부터 백인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자란 말콤 엑스는 흑인 민족주의를 주장했습니다. Born and raised with the hatred against the whites, Malcom X insisted the black nationalism.

백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었던 마틴 루터 킹은 백인과 흑인이 ‘통합’되는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는 폭력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바탕한 정의, 사랑, 화해, 평화를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모든 연설은 ‘설교’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Having dreamed the peaceful future based on the trust on the whites, Martin Luther King, Jr. had a vision of the unification. He refused the violence. The attempted to realize the justice, love, reconciliation, and peace based on the Bible. All the public speeches were the "sermons."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을 적당히 혼합한 것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입니다. A sort of mixed figure between Malcom X and Martin Luther King, Jr. is Nelson Mandela.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191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출생한 만델라는 흑인 민권 운동가로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62년부터 1990년까지 27년간 감옥생활 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희망이 되어 왔습니다.

1960년 경찰의 발포로 스하르페빌레에서 비무장 군중들이 살상되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도 금지되자 그 동안의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대 정부 사보타주(Sabotage, slow-down, 태업)를 역설했습니다.

1962년에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63년 사보타주/반역/공모죄 등으로 재차 소추되어 그가 활동하던 ANC의 본부에서 발견된 대량의 무기와 장비 등을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1990년에 석방되었고, 1993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994년에는 65%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제 간디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평화주의자 함석헌 선생을 소개합니다.

함석헌 선생.
1901년 출생. 우리 나라 현대사에 함석헌 선생 같은 인물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원효로 4가 언덕바지에 찬 바람 맞으며 서 있던 낡은 집 한 채가 그의 집이요, 문하생들의 공부방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를 이 시대 한국에 실현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협상인데, 협상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는 법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인 카쯔라-테프트 조약에서 필리핀과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이 대결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서 38선이 생겨났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지난 주중에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만났대서 화제입니다. 회담의 주된 내용은 북핵문제였습니다. 남북분단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사회-정치적 불안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말콤 엑스 류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인간적인 지혜의 한계입니다.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은 모두 배타적 민족주의의 소산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마틴 루터 킹 류의 ‘통합주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되는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이런 비전을 가지고 평화운동을 이끌어야 합니다.

둘 다 암살당했지만, 이 둘의 영향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마틴 루터 킹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평화운동의 좋은 모델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힌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평화를 오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혈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There were a number of people who misunderstood Jesus' teaching. They were armed group.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개입된 수많은 죄악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전쟁들. 억압들. 노예제도.

심령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 있는 불화는 불평등에서 옵니다. 이것을 아무리 잘 잡아 보려고 애를 써도 여기는 궁극적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지구상에는 가난한 사람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의 구조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완화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궁극적인 평화 만들기는 영적인 데 초점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정치적 독립을 통한 평화를 가져오는 줄 오해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평화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Our peacemaking is to be emphasized on spiritual dimension. The disciples misunderstood the peace as political independence. What Jesus taught them was the spiritual peace that eventually bring forth worldly peace.

영적인 평화.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평화입니다. 이러므로, 영적인 평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The spiritual peace. We will enjoy it in the Kingdom of God. The spiritual peace makers will be, therefore, the sons of God.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하늘의 평화의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평화라면, 정치적 행위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협상’인데, 협상을 통해서는 결코 영구적인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Working for peace in this world we are walking under the shadow of the heavenly peace. Without the heavenly shadow, all works are but political actions. Negotiation cannot bring forth true peace. 

우리 주님께서 평화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갑시다. 오늘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Our Lord was the peacemaker. Let us imitate Jesus Christ. This is the main theme of my sermon.


기도
은혜의 주님. 우리 주 예수님을 본받아 진정한 영적 평화를 위해 일하다 이 세상 떠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Gracious Lord. Help us work for peace as Jesus Christ did. In Jesus' name, Amen.

봉헌기도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옵소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주시옵소서. 소망을 주셔서, 땀 흘리는 일에 보람을 얻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O God, take what we return this time. Give us fruits in all our efforts in your Son's name. Make us happy in working for peace. In Jesus' name, Amen.

축도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our Father,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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