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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밀하신 아빠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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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의 처음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개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초월성과 친밀성입니다. 초월성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친밀성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것은 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땅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땅에 있다는 것은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력으로 땅에서 1 mm도 뜰 수 없습니다.

하늘은 땅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초월은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초월하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주보다 작다면 우주가 고장 나도 우주를 고칠 수 없습니다. 우주보다 크셔야 우주를 고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월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도 물론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초월해 계십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탑을 높이 올려서 하늘에 닿아보려고 했습니다. 어리석게도 탑을 쌓으면 땅을 초월할 수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슬로건은 이렇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4>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초월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초월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나 하늘에만 계신 채 우리가 사는 땅에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을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범신론입니다. 이런 종교는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반대로 신의 초월을 강조하지만 오직 초월만 강조하는 것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가 이신론에 속합니다. 알라신은 위대할 뿐입니다. 결코 타락한 이 세상에는 오지 않습니다. 이 이신론의 구원론도 그래서 자력 구원입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해야 하고, 금욕을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해야 합니다. 동냥을 많이 주어 공력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친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친히 땅에 내려오십니다. 친밀은 초월하신 분이 초월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친절입니다. 이 친밀하심을 증명한 것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기막힌 표현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보다 더 친밀한 ‘아바’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렀다는 것을 밝힌 사람은 요아킴 예레미아스란 신학자입니다. 그는 아람어에 능통한 사람인데,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의 어느 부분들을 아람어로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첫 문장을 아람어로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가 됩니다. 아바는 우리나라 말로 아빠라는 친밀한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이 ‘아바’를 쓰셨습니다. 복음서에 170번 이상 하나님을 ‘아바’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주 독창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가르침을 듣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당시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바’로까지 부르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14번입니다. 그러나 호칭으로 쓴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지으신 창조주라는 것을 말할 때 썼습니다. 또 공적인 개념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부성으로 자비하시다란 표현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 신을 아버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직접 호칭으로는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존경하는 스승이나 현인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직접 그런 표현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불경스럽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십계명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합니다. 특히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여호와란 이름도 직접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름을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아도나이’라는 말로 바꿔서 불렀습니다. ‘아도나이’는 히브리어인데 ‘주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로 불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4:36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 14:36>

개역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아바 아버지’ 이렇게 두 번 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바하고 불렀는데 그 다음 아버지 하고 적은 것은 아바의 뜻이 아버지라고 음역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아버지란 단어는 괄호에 넣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그냥 ‘아바’ 하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아빠’ 사용은 예수님만의 독특한 어법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으로 제자들에게도 ‘아빠’ 사용을 권했던 것입니다.

초창기 제자들이 이 하나님을 ‘아빠’로 사용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8:15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로마의 교인들이 기도할 때 ‘아바’ 하면서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기쁨과 환희의 표현입니다. 자녀됨의 기쁨을 확인한 그리스도인들이 감격에 겨워 「아빠」하고 소리친다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6입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글입니다. 로마의 교인들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셈족 언어인 아람어로 ‘아바’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주 독특한 가르침으로 제자들이 따라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헬라어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아람어를 음역한 것은 헬라권의 사람들도 ‘아바’라고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인들이 쓰고 있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이 ‘아바’는 아람어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를 때 썼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본래 아바는 젖먹이 언어입니다. 어린아이가 젖을 떼고 이유식을 하면서 ‘아바’와 ‘임마’라는 말을 배웁니다. 아빠, 엄마는 어린아이가 하는 최초의 소리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바는 어린아이들의 언어에서 벗어나 없이 청소년들도 아버지를 아바로 불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을 이처럼 스스럼없는 말로 부른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언제나 친밀한 아빠로 여겼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사랑스러운 아들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거기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면 관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절묘한 관계인지 모릅니다.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사랑을 확신하고 그의 사랑에 의존심을 표현하게 됩니다. 즉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언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먼저 표현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순종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은 상속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허락하신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바를 신성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마태복음 23:9 에 있습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9)

이것은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명인사나 연장자를 아바라고 부르던 그 당시의 관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란 존귀한 이름을 하나님만을 위해 남겨 두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아바’라는 호칭이 얼마나 존경받아야 하는지를 강조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아바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관계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 아바 호칭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비밀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그 자신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밀하고 격이 없는 사랑의 아버지로 알았습니다.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 분으로 알았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분이 아니라 친근하게 곁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믿음의 모든 백성들에게도 아버지 되어 주신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에게까지 이 ‘아바’를 쓰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1:12>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친밀한 감정이 믿음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섭게만 느낍니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 위엄이 있으시고, 광대하시고, 접근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로 느낍니다. 잘못하면 즉각 벌을 주시고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죄인을 저주하시는 무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으로 계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친근한 부자 관계임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는 부르지만 ‘아바’로는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 친밀하게 대하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부른다는 것이 쑥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까지만 해도 ‘아바’하고 환희에 찬 음성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전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여깁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 친밀한 호칭 ‘아바’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사랑에 가득 찬 모습으로 하도록 인도합니다. ‘아바’ 호칭은 하나님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5>

그리고 아람어 어순으로 주기도문 첫 문장을 본다면 ‘우리 아바 하늘에 계신’이 됩니다. 하나님의 친밀성이 먼저고, 초월성이 그 다음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환한 얼굴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아빠’ 하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러진 특권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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