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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꼭 필요한 사람들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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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중국 성도를 거쳐 불교와 우상의 나라 티베트에 다녀왔습니다. 본 교단 소속 목회자 20여명의 일행과 함께 거의 국가 전체가 불교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나라, 지금은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소수민족 장족 자치구로 명명되어 있고. 한 때는 달라이라마라는 정치와 종교 및 정신적 지도자로 유명한 나라에 전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조심스럽게 선교적 비젼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났습니다. 평소에 정신적 도움을 주었던 신실한 지도자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고 있던 중 교통사고로 5년 동안 투병하면서“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생각하던 중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고 티베트에 몸을 던져 선교를 위해 생애를 헌신하고 있는 젊은 부부는 하나님 앞에 꼭 필요한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옛날에 시골에 사는 어느 청년이 시계를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모으자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커다란 회중시계를 하나 사고는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랑을 합니다. 친구들에게도 자랑을 하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자랑을 했습니다. 누가 좀 구경하자고 하면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누가 혹 만져 보려고 하면 '안 된다'며 주머니 속에 감췄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시계가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야 할 시계 바늘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은 시계 뚜껑을 열더니 시간과 분을 가리키는 바늘 두개를 빼 가지고 시내로 갔습니다. 자기가 시계를 샀던 그 시계포에 가서 하는 말이 "내 시계 바늘 좀 고쳐주세요. 도대체 이 바늘이 말썽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시계를 고칠 수 있을까요? 바늘 안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바늘 하나의 문제인가요? 시계를 통째 들고 가서 "자, 이 시계 좀 고쳐주세요"라고 해야지, 고작 바늘 두 개 빼 가지고 가서 "이것 고쳐주세요"한다고 해서 시계가 고쳐지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문제의 근원부터 살필 줄 알아야 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도 자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또는 남편이나 아내의 행동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 가족의 구성원을 놓고 '그 가족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누구와 연관되어 있는 문제인지를 알아야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로서의 조건을 갖출 뿐 아니라,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 때, 건강한 교회가 되고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교회 일은 머리 좋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돈 많은 사람이 교회를 섬기는 것도 아니며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열심 있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열심이 자기를 위한 열심이고 편집증적인 열심일 때, 다시 말하면 자기 아집과 인간적인 야망이나 욕심에 근거한 열심일 때 오히려 열심 없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무조건 열심 있다고 해서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성령과 말씀으로,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지혜가 충만하다'는 말씀도 인간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리를 분별할 줄 알며, 교회의 일을 처리할 때도 인간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정리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도(正道)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 회의 문제를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세속화되어지고 시험에 빠지고 성장이 점점 둔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과 그 뜻에 순종하려는 사람이요, 모든 일을 그리스도적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적인 가치로 판단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한 마디로 말할 때, 성경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똑똑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혜가 충만하고, 성령의 인격을 닮은 사람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믿음과 적극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오늘 본문 말씀 3절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뿐 아니라, "칭찬 듣는 사람"을 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 말씀은 그저 사람이 좋아서 '평판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함으로 그 믿음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나머지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사고를 가진 열 명의 정탐꾼을 비롯한 모든 원망하는 백성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앞세우며 교회 안에서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매사에 '안 된다'는 말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당회원이 되고 제직회원이 되면 교회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자고 해도 "안돼", "전에도 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어"라는 말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요즈음 교회의 여론이 좋지 못해", "큰 일 났어" 하는 등 공연히 불신과 비관주의의 정신적인 풍토를 만들어 교회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은 교회의 비극입니다. 교회의 장래가 없습니다. 교회에는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으로써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때 출판계의 비소설 부분에서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유명한 책인데,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코비 박사는 우리나라에 두 번이나 초청을 받아 와서 강연을 하고 갔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 제목 그대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경이 맞아 떨어져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성공의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품과 습관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공통적이고 독특한 성품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여건이 좋아야 성공한다, 환경이 좋아야 성공한다, 누구처럼 처갓집을 잘 만나야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무슨 선배를 잘 만나야 하고, 줄을 잘 타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코비 박사가 연구해서 얻은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공의 요건으로 일곱 가지의 성품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성품, 이러이러한 습관의 사람이 성공했더라'고 합니다. '성공할 것이다', '성공한다' 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된 사람,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더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의 결론은 부정할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말하는 일곱 가지 습관을 통틀어서 요지를 말한다면 주도성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주도적 체질, 주도적 습관과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도적이다' 라는 것은 '내가 책임 진다' 는 것입니다. 사람은 책임지는 만큼의 영역을 넓혀가며, 자기 왕국(王國)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책임 내가 지면 내 왕국에 사는 것이요, 남의 책임도 내가 지면 그 사람도 내가 다스리는 것이요, 내 책임에 남의 책임, 많은 사람들의 책임까지 다 지고 산다면 그만큼 넓은 영역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잘못된 책임,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린다면 나의 영역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집의 남편이 하도 성미가 못돼먹고 불같아서 툭하면 성깔을 부리는 통에 그 아내가 참다못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 어쩌자고 갈수록 성격이 못 되가는 거지요?" 그랬더니 그 남편이 하는 말,"내가 본래는 성격이 안 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성격 나빠진 것이 그 아내 때문이라고 아내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내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게 됐구나!" 할 수 있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주도적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내가 앞장서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모범을 보이는 이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며, 교회의 일도 이런 사람들이 해야 그 교회가 희망이 있고 장래가 있고 비젼(Vision)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지도자를 잘 돕고 협력하는 사람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최초로 직원을 세울 때, 무엇 때문에 일곱 집사를 뽑았는지? 다시 말하면 교회에 직원을 세우게 된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최초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당시 사도들의 업무가 과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적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교회가 부흥하고 제자의 수가 많아지니까 문제도 함께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설교를 하랴, 공궤를 하랴, 손님 접대를 하랴, 구제를 하랴 …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사도들이 더 중한 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 것이 집사를 선택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은 그들의 본무인 기도하는 일과 설교하는 일만 하고 나머지 재정관리라든지, 봉사하는 일이라든지, 구제하는 일, 그리고 새 가족들을 접대하는 일 등은 모두 평신도들에게 맡기기 위해서 집사를 선택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다르고 교파가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직원을 세우는 그 목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돕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교역자들을 돕는 일을 위해서 직원을 세우고 은사를 따라 직임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설교가요 훌륭한 목회자이기도 한 헛셀 포드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없어도 좋은 사람과 꼭 필요한 사람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교회에 필요 없는 사람, 자기 교회에 없었으면 좋을 사람은 1)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2)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며 3) 비건설적인 비판에 빠져있는 사람들, 4)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5) 남의 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 그리고 6) 감정을 잘 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함을 잘 지르는 사람, 신경질을 부리며 남과 잘 다투는 사람, 또는 잘 삐치는 사람이 감정을 잘 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교회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헛셀 포드 목사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을 여섯 종류로 이야기했습니다. 1) 충성된 사람인데 무슨 일이든지 책임감이 있고 성실한 사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2) 솔선수범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교회에 많이 있으면 좋겠고 3) 통찰력을 가진 사람, 4) 낙관적인 사람, 5) 부지런한 사람, 6) 인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지금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충성하는 사람들, 책임감이 있고 성실한 사람들, 교회 일에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사람들, 깊은 영적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들, 부지런한 사람들, 인색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직분자요 사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 모두가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 새로운 세기를 맞아 미래를 힘차게 열어갈 꿈과 비젼이 있는 새 일꾼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기를 힘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소명과 사명을 깨달아 주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 될 뿐 아니라,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

참 신앙은 생명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교회는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조건은, 반드시 운동하고 역사하여야 합니다. 우리 가슴에 담은 신앙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오래된 관습이나 전통이나 장식품으로 치장할 것이 아니라 펄펄 끓는 생명과, 다이나믹한 능력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라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 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 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이것이 로마 정부도 어찌할 수 없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독교 야성이며 역동적인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무정란 신앙과 유정란 신앙

계란 중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는데 무정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어미닭이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지만 유정란은 어미닭이 21일간 품으면, 반드시 병아리가 생명 되어 나옵니다. 성도들도,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인데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덮치고, 손해가 나고, 풍랑이 일어나면, 그냥 도망가거나, 무너지거나, 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풍랑이 셀수록, 더욱 더 주님 품에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출산이란 나로 인하여 복음의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병아리가 나오는 것은, 오래 품는 것과 무관하며 다만, 생명과 연관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의 경력과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한 영혼을 출산 못하는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교회 다닌 지 21일 밖에 안 되었어도 수많은 영혼들을 잉태하고 출산(전도)하는,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생명의 신비란 대단합니다. 더러운 곳에서도 자라고, 위험한 곳에서도 버텨내고,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상의 꽃을 피웁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성도는, 예수생명을 충만히 소유한 그리스도의 전사들입니다.

현대전에서는, 특수부대에 의해 승패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에서도, 병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사가 필요합니다. 전사의 수는, 전쟁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전사는 예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어야 하며 죽을 각오 손해 볼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의 기득권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활에 얽매이거나, 과거를 돌아보아서도 안 되며, 혈연에 묶여도 안 됩니다. 언제나 나 자신은 밀알 되어 썩고, 그곳에 주님만이 사셔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영향력이 없는 이유는 죽으려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살려고 믿기 때문이며 버리려고 믿지 않고, 소유하려고 믿기 때문이고 섬기려고 믿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 믿기 때문이며 베풀려고 믿지 않고, 받으려고 믿기 때문이며 포기하려고 믿지 않고, 더 많이 성취하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본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한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고, 할 말도 못하고, 인내한 흔적이 필요하고 예수님 때문에 버림받고 핍박받은 흔적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소유한 거룩한 '스티그마'였으며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스티그마를 소유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전사들이라면 예수님에 관한 지식과 관습을 소유한 사람들은, 병사들일 뿐입니다.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테크닉으로 무장되고, 세련된 지식으로 포장된, 관습적인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고, 생명을 살려내는 전사 같은 사역자가 절실합니다. 죽은 통나무는, 흐르는 물에도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흐르는 물을 거슬려 올라갑니다. 이것이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박제되어 근사하게 장식된 죽은 호랑이가 아니라 차라리 생명으로 충만한, 병아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관습의 대상이 아니며, 장식의 도구도 아니며, 복을 받는데 도움을 주는 복권 같은 분이 아니시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미 그 사람은 '복 받을 사람'이 아니라,'복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시며,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도 관습적이거나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라, 생명을 소유하여 펄펄 뛰고,끓는 유정란 같은 꼭 필요한 성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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