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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푸는 자의 기쁨 (삼하 9: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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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그 정신에 충실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흔히 친구 사이의 우정이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상징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사실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친인척이 되는 관계였지만, 실상은 원수와 다름바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환경적으로 보아 결코 사랑하거나 도와줄 수 없는 구조작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20장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기를 '자기 생명 같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수준이 자기 생명을 아끼는 만큼 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기 목숨만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부부간에 아주 수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내들에게 주신 사명이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것이니다. 또한 남편들에게 주신 사명이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신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순종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순종하는 삶도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랑은 더욱 어렵고 높은 사명인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잘 살피지도 않고, 단편적으로 성경을 읽고나서 기분 나빠해서는 않됩니다.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을 하라고 그러느냐? 이런 말씀은 시대에 뒤덜어진 구닥다리 아니냐? 라고 해서는 않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복종하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생명처럼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여러분 얼마나 가능하신가요?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루에도 수없이 고백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다고 따라 죽는 아내 보셨습니까? 그렇게 아내를 사랑한다고 선포하지만 아내가 죽었다고 따라죽는 남편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생명을 나누는 사랑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라고 한다해서 기분나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훨씬 가벼운 짐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사모님이 먼저 돌아가시면서 당신 손을 잡고는 ‘여보, 나 죽으면 장가갈거예요? 절대로 그러면 않된다고 다짐까지 받아놀고서야 안심하더랍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모님은 ‘당신 괜히 고생하지 말고 장가 가라'고 권면까지 하셨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을 생각합니다. 서로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관계,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집안 같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나는 널 내 생명과 같이 사랑한다' 그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다윗이 남 왕국 유다의 왕으로서 통치하는 동안 온 나라에 좋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북왕국 10 지파의 장로들이 찾아와 우리의 왕이 되어주기를 간청하였고, 다윗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정치와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고, 성을 쌓아 왕국의 면모도 갖추었습니다. 주변 국가의 위협요소도 말끔히 정리하는 능력도 발휘하였습니다.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그리고 아말렉까지 정복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 다윗의 시대가 굳건하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가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실천적으로 체험을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치인으로써, 군대의 장으로서, 신앙의 리더로서 다윗이 얼마나 분주했겠습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날 문득 떠오른 것이 요나단과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에 가보면, 다윗은 요나단과 2가지를 약속했습니다. 다윗이 갈대숲에 숨어있을 때 그의 위급함을 안 요나단이 몰래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한 약속입니다.

요나단의 제안은 첫째,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 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왕의 아들 곧 왕자의 신분이었던 요나단이 도망자의 신분으로서 아무런 힘도 능도 없어 보이는 다윗에게 부탁하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나의 가족들, 나의 집안에게도 너의 인자함을 영영히 베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곧 너의 시대가 오면 무너진 우리 집안을 좀 챙겨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요나단은 이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얼마 후에 사울 왕과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이 남왕국을 거쳐 통합된 왕이 되었지만 이 약속을 잊을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즉각 사람을 불렀습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리라...'

1절과 3절과 7절에서 다윗왕은 거듭 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사람을 찾았더니 사울왕의 종 시바라는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다윗왕에게 불러 왔습니다. 너가 사울의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사울의 집안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노라.

시바가 대답합니다. 있습니다. 요나단 왕자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 중에 한 사람이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4장 4절은 그가 다리를 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길브아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나단의 아들을 키우는 유모가 5살이 된 므비보셋을 안고서 도망을 치다가 깊은 곳에서 그 아이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다쳐서 므비보셋은 그 이후에 다리를 절었다고 그랬습니다.

이제 그는 도망을 쳤습니다. 이제 다윗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정권이 바뀐 것입니다. 모두가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소문 없이 다 숨었습니다. 민주주의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나라를 보면 그 앞의 정권에 대해서 복수 하느라고 그 소중한 2- 3년을 허비하는 것을 봅니다. 민주주의 시대도 그런데, 왕조가 바뀐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살벌한 일이지요.

아무리 다윗이 훌륭하고 인격적이지만 요나단의 후손들은 소리소문 없이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 중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그가 좋은 신하의 집에서 숨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시바라고 하는 종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길이라고 하는 신하의 집에 숨어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시바라고 하는 종이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그것을 알렸을 때에 잘못 하면 그가 죽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다윗왕이 내가 요나단으로 인해서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는 약속을 세 번이나 하는 말을 들으면서 숨어있는 므비보셋 왕자를 어디에 있는지 알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므비보셋이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과거에는 왕자요, 왕자의 또 왕자였는데,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였는데, 다윗의 시대가 와서 다윗은 왕이 되었고, 므비보셋은 무릎을 꿇고,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그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에게 무서워 하지 말라고 내가 내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겠노라고 약속하면서 두가지를 그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네 할아버지 사울왕의 소유였던 모든 밭을 네게 다시 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울왕 시대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너의 할아버지 사울의 재산을 너에게 반환해 주겠다고 하는, 경제권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하나는 너는 항상 내 상에서 음식을 먹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왕궁에서 지내면서 왕궁에서 왕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왕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게 해주겠다고 하는 왕족에 대한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다윗의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본문말씀을 보면서 다윗의 인격과 넉넉함을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 본문말씀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주로 정치적인 안목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해석도 잠깐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정치적인 해석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요나단의 후손들을 찾는 이유는 그리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이렇게 극진히 왕궁에까지 살게 하고 대우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기 왕권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사울왕의 후손을 궁전에 데려다가 자기의 감시 하에 둠으로써 만약에 있을 수 있는 베냐민 지파의 반란을 미리 막자고 하는 의도가 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적인 눈으로 보면 이런 해석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베냐민지파 왕인 사울과 그리고 요나단과 므비보셋, 그 집안의 왕족들 지금은 그 다윗에게 우리가 우리 왕조가 완전히 깨졌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우리 왕조를 다시 한 번 일으키리라고 하는 베냐민 지파를 중심한 그들의 세력들이 다시 므비보셋을 중심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므비보셋을 왕궁에 둠으로써 그는 마치 인질과 같은 효과를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보면 그런 해석이 그들의 순수한 사랑에 얼마나 우리가 잘 못 이해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요나단을 그렇게 생각하고 여겼습니다. 집안으로는 원수의 집안이요, 권력으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우정의 관계요,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계는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었고, 그들의 관계는 어떤 이해 관계에 의해서 모여진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수한 그들의 관계에 그런 이해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과 우정에 우리가 먹칠하는 그런 잘못된 도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대에 새로운 화두가 있습니다. 블루오션이라는 말입니다. 이 블루오션이라는 말은 그대로 해석하면 푸른바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에 의미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의미하고, 나눔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반대적인 개념은 레드오션입니다. 그냥 번역하면 피바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해관계의 세계이고, 경쟁관계의 세계입니다. 과거에 우리의 관심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가치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로 누구가 죽어야 누구가 산다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도 2000년 들어서 한국 사회도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목사가 죽어야 장로가 산다. 또 어떤 교회는 장로가 죽어야 목사가 산다. 어떤 집안은 아버지가 죽어야 어머니가 산다. 어떤 집안은 어머니가 죽어야 아버지가 산다. 자식이 죽어야 부모가 산다.

온통 누가 죽어야 누가 사는 것, 이것이 레드오션의 가치입니다. 누가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의 규정입니다.

하지만 누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는 이 개념은 알고보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일입니다. 모두가 죽는 일입니다. 옆집 가게가 잘 되야 우리 가게도 잘 되는 거지요. 옆집 가게가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리모델링이 잘 되어서 사람들이 지나갈 때 ‘아휴, 이 가게 때문에 우리 동네가 환해졌네.’ 이래야 이 옆집 가게도 좋은 거예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거예요.

그래서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분이 새로운 가치개념 블루오션을 말했습니다. 윈윈개념이예요.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두가 사는 개념입니다.

오늘 저는 다윗을 보면서 이 시대의 화두이기는 하지만 이미 다윗은 블루오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자신이 살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성경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바라고 하는 사울왕의 종을 불러서 그를 통해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잘 섬기고 그의 가정의 경제권과 그의 가정을 평안을 주고 있는데, 그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라는 못된 아들이 있어서 몇몇 신하와 더불어서 반역을 꾀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다윗이 피난을 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 있었어요.

그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윗왕이 피난을 가는데 놀랍게도 이 사울의 종 시바라고 하는 사람이 수레에다가 음식을 싣고 피난가는 도망치는 다윗에게 나와서 ‘왕이여, 이 음식을 먹고 힘을 얻게 하옵소서.’ ‘너 누구냐?’ ‘저 옛날에 우리가 섬기던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당신이 땅을 주고, 당신이 그를 왕궁에게 먹게 하던 그 때에 섬기던 종 시바 올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여기에서 선을 행할 때는 우리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을 때 거기에서 그 손길에 의해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원수 맺지 마세요. 지금 내가 힘이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 주지 마세요. 사람은 잘 될 때도 있고, 잘 못 될 때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부유하게 살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가난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화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 베푸는 자의 기쁨과 나누는 자의 감격을 가지고 다윗은 지금 주님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그 약속을 지금 실행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성도들의 삶 속에 베푸는 자의 기쁨과 나누는 자의 감격을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 각박한 가치관의 행함 속에서 그러나 오늘 주는 자가 복이 있음을, 나누는 자가 복이 있음을 함께 하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 이 놀라운 다윗의 삶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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