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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을 벗으세요! (출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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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①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스' 개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본래 법학을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루터가 법학을 버리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중요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 고향집에 들렀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천둥 번개를 만났습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자연의 충격을 경험했던 것이지요.
루터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빠진 채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구해주시면 당신을 위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루터로 하여금 율사의 길을 포기하고 신학자의 길을 걷게 했던 것입니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聖스러움의 의미』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종교경험이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비합리적이며 감정적인 것이 종교경험의 본질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토는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성스러운 느낌, 즉 종교적 감정을 '누미노스'(NUMINOUS)라고
불렀는데,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공포감(TREMENDUM)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됨을 발견하고 두려워 떠는 감정이지요.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무한히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전율(戰慄)을 느끼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비로움(MYSTERIUM)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모습 앞에 압도당하여 입을 딱 벌리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비로운 경이감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말하지요.
셋째로, 매혹의 감정(HASCNAUS)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느끼는 황홀감이지요.
어마어마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이끌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매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오토는 이와 같이 성스러운 감정, 즉 누미노스의 감정을 세 가지에서 체험한다고 했습니다.
신적인 대상, 신적인 존재와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신적인 것과 관련된 사물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사물들
속에서 누미노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토의 분석은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하나님 체험을 설명하기에 더 없이 좋은 도구가 됩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엄청난 체험을 했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체험할 수 없는 신비하고도 장엄한 체험을 했습니다.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스를 체험했던 것이지요.

② 누미노스의 신비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양 떼를 몰고 호렙산에 들어갔는데 앞에 있는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 것입니다.
불에 타면 나무가 타서 없어져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나무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일상 생활 속에서 볼 수 없는 그 신비한 광경에 압도당했을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 때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떨기나무 쪽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인생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깨끼가 있습니다.
신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여도 호기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알아 보려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인생의 신비와 풀 수 없는 수수깨끼 앞에 아무 호기심도 고뇌도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붙는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신비는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신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이해해보려고 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로 걸어가는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감히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공포와 전율과 신비로움에 압도당하는 누미노스의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모세를 향하여 사명을 일러주십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내는 사역에 모세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알 수 없는 신비를 만나거든 호기심을 가지십시오.
그 신비 쪽으로 가까이 가 보세요.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신비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신호입니다! 

③ 누미노스의 체험은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도록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조성을 절감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과연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저같이 부족하고 자격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누미노스의 체험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 바로왕의 궁전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뜨는 해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죽일 정도로 의기(義氣)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누미노스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최고의 엘리트 교육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의협심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접 체험하는 누미노스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체험할 때 제일 먼저 우리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하고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피조성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처절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성(HELPLESSNESS)을 절감합니다!

사 6: 1-8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압도당한 이사야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자신의 죄인됨을 부르짖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언어가 형편없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이지요!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을 보세요. 
"하나님,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 하나님은 너무나 간단히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출애굽은 모세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출 4: 10에서도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무능함에 대하여 토로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자신이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기에 말주변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최고의 궁중교육을 받은 모세가 말재주가 없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누미노스의 경험이 모세로 하여금 이와 같이 보잘것없다는 의식을 갖게 한 것이겠지요!

모세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해도 모세는 빼기만 합니다.
출 4: 13을 보세요.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자기처럼 자격 없는 사람은 아니니, 자격 있고 유능한 사람을 보내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겸손해졌는가를 한 눈에 보여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누미노스의 감정은 우리 자신을 바로 보게 합니다.
우리가 추악한 죄인이며 형편없이 무능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결점들도 하나님의 거울 앞에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격 있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격 있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부족하다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누미노스의 거룩한 체험은 언제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의식'이 높으면 높을수록 '피조물 의식' 혹은 '죄인 의식'도 비례해서
높아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④ 누미노스의 감정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직면하게 될 때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저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출 3-4장의 모세의 소명기사에서 되풀이하여 나오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본문 6절에 보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두려워 떠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제일 먼저 당신의 신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밝히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3절을 보세요.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인데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러분, 세상 만물은 스스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인과(因果) 관계의 법칙에 따라 반드시 누군가가 있기에 존재합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존재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원인이 되시고 결과도 되시는 분이십니다.
누군가에 의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만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론적으로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삶속에 직접 개입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을 도우시고 이끌어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을 선택하시고 시시때때로 건져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이 하나님께서 모세가 가는 길마다 함께 하셔서 모세의 출애굽
사역까지 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하나님도 되어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격 없고 무능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

⑤ 누미노스의 신비 앞에 신을 벗어야만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누미노스의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신을 벗게 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두려워 떠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제일 먼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에게 성(聖)과 속(俗)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지요.
거룩한 영역이 있고 속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수 5: 15에도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너의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신을 벗는다는 것은 존경과 예의를 뜻하는 동양적인 풍속이 아닙니까?
미국의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 학생이 동양에서 온 학생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신발을 벗고 생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카펫트로 된 방이라고 할지라도 미국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신발을 신고 생활합니다.
그러나 동양 학생들, 특히 한국 학생들은 반드시 신발을 벗고 실내생활을 합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세상과 신성한 가정의 영역을 구분시켜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신 이유는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임을
깨닫게 하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종들은 신을 벗은 채 생활했다고 합니다.
주인은 위엄 있게 신을 신고 생활했지만 종들은 신을 벗고 살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신을 벗어야 하는 이유는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종처럼 낮아지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모세는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속된 것이 무엇인지 구별 없이 살아왔습니다.
누미노스의 체험 없이 세속적인 삶만 살아왔습니다.
누가 자기 인생의 참주인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임재를 경험한 뒤 비로소 성스러움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참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그 거룩한 장소에서 신을 벗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무엇입니까?
세속화(世俗化)의 위기가 아닙니까?
우리 시대에는 성속의 개념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미신을 섬겨도 거룩한 의식(意識)이 있었습니다.
한 밤중에 달님에게 빌어도 반드시 목욕재계한 다음 가장 깨끗한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정성을 다해서 빌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산신령이나 성황당 앞에서 절을 해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했던 것이지요!
거룩한 누미노스의 감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옛날 미신을 섬기고 자연 앞에
절하던 사람들만큼의 두려움이나 떨림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전을 신성시하지 않습니다.
세속화의 거센 물결 앞에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 자체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종교적 체험이 약화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종교체험만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때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과잉 흥분을 영성 체험으로 혼동하는 영적 감상주의에 흐를 위험성이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종교의 윤리 도덕적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바리새주의,
혹은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성적인 신앙만 강조할 경우 메마른 교리주의에 매몰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기독교는 이성과 체험을 둘 다 중요시합니다.
머리와 가슴이 함께 가야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체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뜨거운 성령 체험으로부터 시작된 종교입니다.
마음의 종교, 불붙는 가슴의 종교가 감리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누미노스의 체험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두려워 떨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압도당하여 황홀한 일치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의 풀 수 없는 신비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곳이
거룩한 장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그 앞에서 불신앙의 신발을 벗읍시다.
세속에 저린 신발을 벗읍시다.
교만의 신발을 벗읍시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성결과 겸손의 맨발로 선 피조물이 됩시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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