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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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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로님 댁에 손님들이 와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인 엄마가 6살 된 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식사기도를 네가 한번 해볼래?" 그러자 어린 딸이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엄마, 난 기도할 줄 모르잖아" "그냥 엄마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지" 그러자 딸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자꾸 우리 집에 귀찮은 손님들이 많이 올까요? 앞으로는 안 오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정은 확실한 교육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신앙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 아이들도 신앙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건강한 신앙적인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러나 이곳에 올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지는 마십시오. 이곳 주님의 전에 올 때에는 세상의 죄를 가득 안고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거룩함을 얻어서 가시기 바랍니다. 슬픔을 가득 안고 왔다가 성령께서 주시는 넘치는 기쁨을 안고 가시기 바랍니다. 절망 중에 왔다가 희망을 안고 가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꿈을 안고 왔다가 큰 응답을 받고 돌아가는 소중한 자리가 오늘 이 자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만나십시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넘어지면 빨리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명을 붙잡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넘어지면 아주 힘들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어린아이는 넘어지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어른은 다릅니다. 어른도 걸어가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쪽팔려서 벌떡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장성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믿음의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좋아하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마음 약해서 듣지 못했네. 돌아서는 그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을 들을 때에 심령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꿈을 꾸고 환상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자로 우뚝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십시오. 제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흉내를 내지 말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내 안의 중심을 잘 알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해야만 했던 요셉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극심한 기근으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을 만난 후에 그는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은 언제나 역사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더 많이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들을 가만히 보면 늘 착각의 연속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 기도하면 응답이 오고 소원이 성취될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눈에 드러나는 외형적인 행위로 신앙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행동을 보고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있게 한 나의 믿음을 보고 감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을 하셨지, "네 행동이 거룩하고 위대하다."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을 보게 되면, 언제나 그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행동을 있게 하지만 믿음 없는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가 나오려면 순서상 내가 감동하는 부분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행동을 보고 내가 감동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이 감동이 없이 믿음이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푸신 행동을 보고서 감동하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행동을 보고 스스로 감동합니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바치고 이렇게 구제한다." 그렇게 자신이 행동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자화자찬에 빠집니다. 거기에다가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내 스스로의 신앙 행위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내 행동으로 신을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방 종교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행동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으로서 볼 때에 어느 부분도 감동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내 속에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내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내 행위에 감동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부분은 오로지 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심되는 내용도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은 사복음서가 다같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마26:6-13, 막14:3-9, 요12:1-8). 그런데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는 문둥이 시몬의 집 베다니에서 생겨진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아서 동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아주 다른 별개의 여인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마리아는 마태복음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드렸고(마26:7) 마가복음에는 매우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드렸고(막14:3) 요한복음에는 값진 향유 나드 한 근을(요12:3) 예수님께 부으니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은 그리 넉넉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 좋은 향유를 드리지 못해서 본문에는 그저 향유라고 나옵니다. 그녀는 지극히 값비싼 순전한 나드나 향기 좋은 향유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분이 천한 그녀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수가 없어서 발에 부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향기 나는 것을 예수님께 드릴 수 없어서 더욱더 마음이 아파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학자들은 신분이 천하고 죄 많은 이 여인은 다름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다 라고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당시에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가령,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고 해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처치할 것인가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가 왜 예수님을 초대했는지를 나름대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44∼46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 놓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입맞추지도 아니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본문 39절에서와 같이 그가 예수를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바리새인 시몬은 호기심에 이끌려서 예수님을 초대한 것 같습니다. 17절에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하니까, 예수님과 같은 큰 선지자가 자기 식탁에 함께 함으로 해서 자기 명예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을 것입니다.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모셔 놓고 식사 대접을 하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책잡기 위해서 모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는 그렇게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모름지기 음식은 마음이 편해야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초청에 응하셨습니다. 당시 잘사는 유대인의 집은 입 구"口"자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당 안에는 화초와 우물이 있었는데, 더운 날씨에는 마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랍비들이 대접을 받는다 싶으면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옥같은 말씀을 듣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식탁에 기대어 앉으셔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습니다.

이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본문에서 이 여자는 그 동네에 잘 알려진 죄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가 사는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혔다는 겁니까?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율법 사회에서는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면 성전 예배는 물론이거니와 회당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죄인에게는 1.8m 이상 가까이 가면 안됩니다. 그런 자가 죽어도 아무도 울어 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덤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죄인은 철저히 소외시키고 멸시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혔던 이 여인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 찌꺼기를 얻기 위하여 연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 갈 수 있었던 관습의 덕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이 여인은 심히 가난하면서 죄가 많은 윤락 여성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이었던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유별난 행동을 합니다.
본문 38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이니"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공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 석상에서 가장 좋은 상석을 그분께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벗은 발로 문 쪽을 향한 채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를 하시기에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 곁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 우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러자 앉아 엎드려 자기의 머리털로 눈물로 젖은 예수님의 발등과 발바닥, 온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녀는 눈을 물병으로 삼고 자기 머리털을 수건으로 삼았습니다. 유대 여자들은 결혼 할 때 머리를 올리면 결코 다시 내리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기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헌신한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간음으로 가득 찼던 눈이 이제는 회개의 샘이 되었습니다. 음탕한 말을 쏟아 내던 그 입술이 이제는 거룩한 입맞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값비싼 것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순전한 나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일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그 향유는 고급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에서와 같이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였더라는 말이 본문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집 주인이 혼자 비아냥거리면서 중얼거립니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저 여자는 죄인인데!"
이 때 예수님은 시몬에게 오백데나리온의 빚진 자에 대한 예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네게 입맞추지도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저는 향유를 내 머리에 부었느니라"

당시에 유대인들은 손님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언제나 세 가지의 일을 합니다. 첫째는 팔레스틴은 사막 지대로서 먼지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습니다. 또 신이란 것은 밑창만 붙은 것으로 바른 가죽끈으로 가로 묶은 샌들입니다. 따라서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시원한 물을 부어 줍니다.
둘째는 집주인은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면 자기의 손을 손님의 어깨에 얹고 환영한다는 의미로 입맞춤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타는 듯한 뜨거운 태양 밑을 걸어온 손님에게 손발을 씻게 한 후, 향불을 피우거나 머리에 향유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은 큰 위로요 손님을 신선하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기름 몇 방울 정도는 떨어뜨려 줍니다.

이런 3가지 일들은 당연히 행해야 하는 예법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모신다고 모셔 놓고 마음으로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시몬은 그저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그의 예수님을 섬기는 자세에는 진심이 없었습니다. 한 번 대접하는 것도 때우는 식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몬과 이 여인의 섬김은 재미있는 비교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다운 신앙과 참다운 고백에는 인색함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 인색하게 구는 것은 지독한 위선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청해 놓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발을 씻는 물이나 환영하는 입맞춤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손님을 상쾌하게 하는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분 자신을 섬겼습니다. 인격적인 봉사를 하였습니다. 오늘 분문 가운데 대명사가 거듭거듭 나옵니다. 본문 38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발 곁에 서서 그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렇습니다. 그녀는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깨뜨린 그 옥합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지금 그녀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옥합이 이 여인에게만 있었고 시몬에게는 없었을까요? 분명히 시몬에게는 아주 고급스러운 향유가 담긴 옥합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옥합을 주님을 위해서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시몬은 많은 옥합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를 위해 옥합을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옥합을 주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깨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옥합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왭니까? 그 옥합을 깨뜨려야만 주님께 전적인 헌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뜨려야 할 옥합은 어떤 옥합입니까?

첫째로, 지금 우리는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닫혀진 마음을 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이 여인은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마음이 깨어질 때 눈물이라는 값진 향유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녀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기 전에 마음을 깨뜨려 눈물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눈물이 없는 신앙은 주님이 받으실 만한 향유를 드리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처럼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민족을 향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처럼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마음이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이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사심없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닫힌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내 마음의 폭만큼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는 한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원수도 내 마음 속에 들어와서 둥지를 틀고 앉아 쉼을 얻을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좀 더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면 마음의 옥합을 깨뜨리십시오. 주님께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면 마음의 옥합을 깨뜨리십시오.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하나가 되고 부흥하기를 정말로 원하신다면 마음의 옥합을 깨뜨리십시오. 지금 말입니다. 마음을 열면 생각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언제나 내 마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두 번째로, 지금 우리는 물질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계십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리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전심으로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가장 소중한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향유가 담긴 이 옥합의 가치가 얼마일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 옥합의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년 동안 먹지 않고 모은 수고의 대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옥합은 일반 사람들이 적은 돈으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에게 있어서의 옥합은 어쩌면 그녀의 전 재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이 옥합을 주님을 위해서 깨뜨렸습니다.

사랑에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전체를 주어도 모자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여인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주님께 물질을 드렸습니다. 그녀는 전 재산을 예수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런 행위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확증으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많이 사랑하는 자는 많은 것을 드리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소유를 바칠 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소요리 제1문에 보면, 사람으로서 제일 첫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누구보다 잘 살아야 합니다. 물질의 넉넉함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물질의 옥합을 주저함이 없이 깰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생명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머리카락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수건 삼아 주님의 발을 씻긴 것은 자신의 전부를 주님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내 생명을 주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자신의 생명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웃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 생명을 깨뜨려 박애정신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민족과 이웃을 위해 내 한 생명을 깨뜨리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보다 숭고하고 아름답고 보람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썩어져 뿌리내리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 여인처럼 마음의 옥합과, 물질의 옥합, 그리고 생명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을 읽다가 누가복음 8장 2절과 3절에서 시선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옥합을 깨뜨렸던 이 여인 막달라 마리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여기에서 찾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다같이 누가복음 8장 2절과 3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마음의 옥합을 깨뜨렸더니 그녀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질의 옥합을 깨뜨렸더니 그녀는 물질로 주님과 그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생명의 옥합을 깨뜨렸더니 그녀는 평생 주님을 따라 복음의 증인이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옥합을 깨뜨렸던 이 여인은 평안함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0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이 옥합이 깨어질 때 우리는 주를 위해 전적인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이 여인처럼 귀한 예물을 주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께 내 생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련없이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내게서 깨어지지 않은 옥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주님께 전적인 헌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참 맛을 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옥합은 오랜 세월을 흘러오면서 아주 단단하게 굳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옥합은 아주 강팍해져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깨뜨려야 합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강팍해진 옥합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이 옥합을 깨뜨려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헌신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내 믿음, 내 마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나는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옥합을 깨뜨려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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