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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왕하 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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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나아만이라는 아람 나라의 장군을 만나게 됩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위대했던지 아람 나라 주위의 모든 나라조차도 그의 이름을 두려워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그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으며,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군의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몇 백억이라는 엄청난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의 핵심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절 말씀 마지막 부분에 보면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부와 권력은 그를 구원할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는 온몸이 썩어 들어가고 마디가 절단되어 죽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는 그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도저히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잡혀온 어느 어린 여자 노예가 말하기를 “주인님의 병은 사마리아에 계신 엘리사 선생님을 찾아가면 분명히 치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사람도 살린 능력 있는 큰 능력의 선지자입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작은 어린 노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그는 다급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어린 아이의 이야기였지만 그 소리를 믿고 많은 선물을 준비하고 호위 군사들을 거느리고 엘리사가 있는 사마리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도착한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 드디어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이곳까지 올 때는 큰 소망을 가지고 엘리사를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위대한 아람 장군 나아만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종을 보내어 말하기를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까?

  그는 진정으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11절을 말씀에 보면 그가 아주 분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나아만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 보다 강한 나라였습니다. 군사적으로나 경제력으로 그들이 가진 문화로 보아도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들보다 강한 나라의 장군이 엘리사를 찾아 왔다면 당연히 엘리사는 왕의 부름을 받아 나아만이 머물고 있었던 수도로 그를 만나기 위해 올라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엘리사는 자신을 찾아 온 왕의 사신에게 나아만을 자신의 집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집에 찾아 온 나아만을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물로 씻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인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은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나아만처럼 분노하고 상처받고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지금 시험든 성도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이 승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할 것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는 55:8-9절을 통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결단 속에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시험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하면 “내 생각에는 목사님이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장로님이면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권사님이면 이렇게 해야 하는데..  말씀이 내 생각과 맡지 않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집가기 전의 처녀들은 엄마들을 보면서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자기는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 인격적으로 아이를 키우겠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엄마가 되어 보세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내 생각에는 이라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경에는 이라고 말하지 말고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고, 기적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을 계속 고집하고 자기 뜻대로 했다면 문둥병이 낳을 수 있었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다시스로 가다가 풍낭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크신 능력과 큰 팔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하나님께서 네 속에 있는 분노를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그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다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나아만처럼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둥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아니면 해결 할 수 없는 문둥병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들 속에 아직도 인생의 질병이 치료되지 못하고, 인생이 고난이 계속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훈련입니다. 이런 훈련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생에서 만나 불치의 병과 같은 문둥병을 결코 치료할 수 없고, 그 문둥병으로 인해 계속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내 생각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최소한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한 번 믿어보겠다고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최소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따라해 봅시다.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자”

  둘째로 인생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듣기를 잘하고 그 들은 것을 실천하는 실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위대한 인물에게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여자 노예 아이에게서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겸손의 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치료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불치의 병으로 우리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때로 경제적인 고통과 아픔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남편의 문제와 자녀의 문제로 혹은 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고통스러운 인생의 가시와 쓴 뿌리로 인해 부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에 대해 말했을 때 그 문제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부름에 여러분들이 진실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자 노예의 소리를 들을 것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하인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자존심도 상했고, 마음에 큰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절에서 우리는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는 하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주위에 참으로 좋은 사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위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가만 나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여러분은 내 생각을 버리고 주위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치료 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옳은 말을 할 때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다고 판단하면 즉시로 행동하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어리고 노예로 이방 이스라엘 나라에서 붙들려 온 힘없는 계집아이의 말이었지만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실천함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엘리사 앞까지 온 것입니다. 그는 마음의 분노가 있었지만 주위에 있는 종들이 그를 붙들고 말씀을 실천해 보라는 권면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실천하여 그의 병이 치료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인생. 그 인생이 승리하는 인생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분노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권면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인생. 그 인생이 승리하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이 승리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을 버리고 믿음의 사람들의 말의 권면의 말을 듣고 결단하여 실천하십시오. 반드시 인생의 문제가 치료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질병이 치료 될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도는 것을 포기했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 때에 거지 바디매오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만일 그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고친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메고 와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갈 수 없다고 포기하고, 지붕을 뚫는 적극적인 도전이 없었다면 그 중풍병이 고쳐졌을까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온 수로보니게아 여인이 예수님께서 나는 개에게는 떡을 주지 않는다는 그 한 마디에 포기했다면 과연 그 귀신들려 고통당하고 있는 딸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포기했다면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이룬 세 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벌의 시조가 된 록펠러, 둘째는 강철 왕으로 불리는 카네기, 셋째는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포드입니다. 그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성경 말씀대로 산 사람이 바로 록펠러입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 그의 학력의 전부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가 말년에 그의 십일조를 관리하는 회계사만 40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큰 부자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결코 포기하지 않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젊었을 때 자신이 모은 돈과 함께 사람들에게 빚을 내서 금광을 하나 샀습니다. 광부들을 모아서 꿈을 가지고 몇 개월을 파고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금 조각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속아서 금광을 산 것입니다. 광부들은 자신의 월급을 주지 않는다고 난리를 쳤고, 사채업자들은 그를 고소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나 이제 일어설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 폐광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가 한 참을 기도하는데 그 마음에 갈라디아서 6:9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 그는 그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참을 기도하는데 그 마음에 "더 파라. 깊이 파라. 계속 파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팔 만큼 팠습니다. 그래도 금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더 파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기도를 마치고 광부들을 설득시켰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다시 삼 개월 동안 그 금광을 더 깊이 파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금이 나왔을까? 아닙니다. 그곳에서 그는 결코 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금광에서 다른 것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가 나온 것입니다. 3개월을 더 깊이 파들어 갔을 때 갑자기 땅 속에서 석유가 솟아 난 것입니다. 만일 록펠로가 그 고난에서 절망 중에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대표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까? 한자 중에 산다는 뜻을 지닌 글자가 날 생(生)자입니다. 그 자는 소 우(牛)에 하나 일(一)자를 합친 글자입니다. 이 글자는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에서 왔다고 합니다. 즉, 산다는 것은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힘들고 위태롭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한번 씻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교회 오고 포기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리고 성을 돌았던 사람들처럼 한 번 돌고 아무 변화가 없어도 또 다시 다음주에 와서 또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변화가 없어도 또다시 인생의 여리고 물에서 나만이 씻었듯이 생명의 말씀에 씻어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 그 인생이 변화되고 문둥병이 낫고, 인생의 여리고는 무너지는 것이고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둥병이 치료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첫째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사람들이 전달하는 복음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씻고 또 씻고 돌고 또 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인생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며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 동안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 인생의 여리고가 무너지며, 인생의 문둥병이 치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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