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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1) (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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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과 다음주일 두주에 걸쳐서 우리교회의『비전선포식』을 앞두고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두주동안 설교를 하겠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우리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니다.

어떤 목사님이 너무 바쁘셔서 결혼식주례다, 병원에 환자 심방이다, 장례식 인도다, 하고 정신이 없으셨습니다. 그날도 오전에 장례식 인도를 마치고 결혼식 주례를 하시러 결혼식장에 오셨는데 너무 피곤하셔서 주례석 자리에 앉아서 잠깐 조셨습니다.

이윽고 결혼식 시간이 되어 정신을 차린 목사님은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시작하는 선포를 했습니다. "에.. 지금부터 고 ***군과 고 ***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그 말이 뭐 잘못입니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옛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대로 살던 습관은 다 포기하고 오직 상대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줄 때 자신의 기분, 감정, 입장, 체면, 기질, 스타일.. 다 버릴 때에 비로소 행복한 가정의 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진정한 죽음의 시작이며 결혼식을 고 *** 군과 고 *** 양의... 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에 다닌 다는 것은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갈릴리 촌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등 서로 사는 형편이 달랐고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교회에 오면 위로를 받아 새로운 기쁨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2:46에는 처음 교회의 모습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처음의 교회는 교인과 교인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교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후 2세기 후반에 살았던 체칠리우스라는 한 이교도가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적은 짤막한 글이 있는데, 이 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고 우리의 현재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 그리스도교인들은 아무 차별 없이 막무가내로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군요."
당시 사회는 귀족사회요, 노예사회였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한 사회였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만은 그런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 형제요 자매로 지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신분의 차이가 없는데 신분의 차이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좋은 교회의 모습은 각 자에게 주어진 은사로 함께 도우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은 다 다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이런 예화를 들더라구요.

강가에서 네 형제가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재미에만 정신이 팔려서 강 깊은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 중 셋째가 깊은 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네 형제 가운데 수영을 할 수 있는 아이는 첫째 큰형뿐이었습니다. 헤엄을 칠 수 있는 큰형이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즉시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붙잡긴 했으나 힘이 부쳐서 강둑으로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둘째가 나무 가지를 잡고서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큰형은 물에 빠진 셋째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에게 셋째가 물에 빠졌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서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자, 자 천천히 한 사람씩 이야기해 보아라. 내가 다 들어줄 테니!"

큰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너는 동생이 물에 빠졌을 때 어떻게 했느냐?""예, 처음에는 당황도 되고 해서 멈칫하다가 동생을 살려야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둘째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했느냐? "아버지, 저는 수영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형이 힘들어하기에 나무 가지를 잡고 손을 내밀어 형을 끌어주었어요." 오. 그래 잘했구나.
이제는 네 형제 중 제일 막내만 남았습니다. 아버지는 막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했니?" "아버지,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강둑에서 손뼉을 치며 '잘한다. 잘한다. 형 힘내라 힘!' 소리만 쳤어요.

아들의 대답을 다 듣고 난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그래 내 아들, 모두들 장하구나. 잘했다 잘했어!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아버지는 즐거워했답니다.
바로 이 가정의 형제들의 모습이 본래 교회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한 기독교 잡지에서 "10년 후의 교회생활의 모습"이라는 특집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는 인터넷이 보편화된 시대에 교회생활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상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10년 후에는 목사가 설교하러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녹음하는 스튜디오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대도 찬양을 하기 위해 교회로 가지 않고 목사나 마찬가지로 스튜디오로 간다는 것이지요. 교인들도 옷을 차려 입고 교회당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들은 집에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상에서 마음에 드는 설교를 골라 듣고, 마음에 드는 성가대 찬양을 골라 듣는 시대가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헌금은 마음에 드는 교회(?)에 신용 카드로 보내면 그뿐입니다. 안 보내도 그만 이구요.
그 기사의 결론은 10년 후에는 인터넷상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대가 오기 때문에 굳이 '교회생활'이라고 부를만한 부분이 우리 삶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을 내렸다가는 훗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큰 일 나지요. 그래서 기사는 이런 변화에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그것은 그때 사람들이 갖게 될지도 모르는 '밀착된 인간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변수가 되리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만일 10년 후의 교회생활이 그 기사가 예측한대로 그렇게 된다면, 저는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설교를 듣고 찬양 듣고 헌금하는 것 이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고, 또 '교회'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교회생활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교회생활 없이도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등등의 문제를 물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아동 문학가이신 안성진 목사님께 어떤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목사님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그는 놀랍게도 6.25 한국 전쟁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전쟁 와중에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다고 했습니다. 대구로 피난을 내려가 허름한 천막에서 살던 시절, 먹을 것이 없자 식구들이 다 흩어져 혹시 땅바닥에 떨어진 곡식을 줍고, 저녁이 되면 그렇게 해서 모아진 곡식에서 돌이나 쥐똥 같은 것을 골라낸 후 그것으로 밥을 지어 온 식구들이 둘러 안장 한 숟가락씩 나눠 먹어도 그 때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식구들 모두 서로 사랑을 느끼며 서로를 그처럼 소중히 여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그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합니다. 비록 배는 고파도 성경 말씀을 듣고 그토록 비참하고 구차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마음, 감사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바로 행복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시설이 좋으냐?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 얼마나 잘 먹었느냐? 목사님 설교가 얼마나 좋으냐? 얼마나 좋은 찬양을 들었느냐? 중요하지요. 그러나 서로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몸으로서의 성전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성전으로써의 교회는 예루살렘의 교회는 절기때 모여서 예배드리고 흩어지는 교회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는 예수님이 몸을 나눠주시잖아요. 모였다가 바로 흩어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 사랑을 나눌수 있는 교회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역입니다. 이 사역에서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 를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의 사역은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와 교육- 친교이고, 둘째, 봉사가 있는 전도입니다.

첫째는 모이는 교회이고 둘째는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모여서 배우고 예배드리고 친교하는 교회"
우리가 모여서 배우고 예배하고 친교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가지신 손양원 목사님이 있습니다. 여수순천반란 사건 때에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인 살인범을 양자로 삼았다고 해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칭호를 받으신 분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기에는 그런 동기가 있었다고 해요.
여수반란 사건이 터져 두 아들을 죽는 끔찍한 사건이 있을 1948년 10월 12일 손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애양원 교회에서는 손 목사님의 평양신학교 동기 동창이며 신사참배 거부로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이인재 조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부흥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흥집회를 하던 중에 손목사님의 두 아들이 죽는 어려움이 생긴 거지요. 그 때 그 딸인 손동희 권사님의 간증에 의하면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은 넋 빠진 사람처럼 되었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제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고 해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사로 오셨던 이인재 조사님이 손목사님의 어깨를 치면서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손 목사, 정신 차리시오. 우리도 과거 감옥에서 순교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순교를 허락지 않으셨소. 오늘 젊고 아름다운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이 그리도 아깝소?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니라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오.”
손 목사님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손 목사님의 마음속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취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써낸 글이 그 유명한 9가지 감사문이었습니다.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1)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2)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3)한 아들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합니다.
(4)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5)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들 둘이 순교한 것을 감사하는 신앙도 대단하지만, 그 감사는 주의 종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에 순종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복음성가는 복음성가 가수 김석균 집사가 작사 작곡한 찬양입니다.

1.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2.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김석균 집사가 이곡을 쓰게 된 동기가 있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교회에 가기 위해서 부산을 떨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저 00교회 목삽니다. 기억하시겠어요?”
“아, 녜. 안녕하세요. 기억하고 말고요”
순간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모습이 스쳐갔습니다. 몇 평이나 될까. 아주 작은 지하 교회.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 이곳을 복음화 시키겠다고 맨손으로 뛰어든 개척교회의 목사님의 얼굴이 떠 오른 것입니다. 한 번 집회를 인도하러 갔으면 기억이 안 나겠지만, 두 번이나 갔으니 금방 생각이 난 것입니다.
“목사님, 어떤 일로 전화를 주셨어요?”
“우리 아들이 죽었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무나 황당한 말을 듣고 의아해 하는 나에게 목사님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어제께 토요일 오후에 사모가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답니다. 그때 하나밖에 없는, 다섯 살 먹은 아들이 베란다에서 놀다가 엄마가 한 눈을 파는 사이 아파트 밑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아침 그 아이의 노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겁니다. 집사님이 주셨던 찬양음반을 집에서 항상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아이가 흥얼흥얼 따라 부르더라고요. 집사님, 내일 아침 7시에 발인 예배를 드립니다. 오셔서 그 아이가 부르던 찬양 몇 곡만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전화가 끊기면서 나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그 목사님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읽고 전도하고, 때로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 금식하며,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과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만 전념하며 사는 분인데 왜 하필 그분의 아들을 데려 가셨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겠어요. 혹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지나 않을까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목사 아들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비난하고 조롱할 텐데요. 성도들마저 실망한 나머지 그나마 몇 명 안 되는 성도들마저 다른 교회로 가버리면 어떡하지요? 하나님, 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그 때 하나님이 성경 말씀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이사야 45장 7절)
'내 부족한 지식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목사님의 가정과 사역을 망하게 하겠는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뭔가 깊이 깨닫게 하시는 바가 있겠지. 아니, 내가 이런 상황을 만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욥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하고 감사하겠는가. 그러나 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분이니까.'

그 후 방송에 이 사연을 소개하면서 목사님을 위로했고, 찬양도 한 곡 띄워 보냈습니다.

한 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집사님, 저 요즘 울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지금까지 저를 통해서 일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욥에게 베푼 축복이 제게도 임하리라고 믿습니다.”
너무도 빨리 일어선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년이 지나서 그 목사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복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 아이보다 더 지혜롭고 건강한 아들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쁜 딸도 선물로 주셨다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도 크게 성장해서 새 성전을 건축했다는 자랑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대로 산 사람에게 베푼 하나님의 축복을 보며 방송을 통해 목사님을 위로했던 찬양곡을 소개합니다. 그 찬양곡이 바로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입니다.
이 시간에도 고난으로 인해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찬양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기도하면서 이 찬양을 들려드립니다.

성경학자들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은 욥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욥기는 의인 욥이 고난당하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욥같은 의인이 고난을 받으니까 친구들이 와서 비난합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나타나셔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이유와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짐승에 새끼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묻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알겠습니까? 그러자 욥이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이 세상은 권선징악을 얘기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권선징악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내가 하는대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찬양만이, 감사만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교회가 되실 줄로 믿습니다. (오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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