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1907년도와 1970년대 (약 2:14-26)

  • 잡초 잡초
  • 316
  • 0

첨부 1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님 보고 예수 믿지 사람보고 예수 믿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맞지 않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씀이지만, 그렇지 못한 초보 신자들이나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청년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어린 아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기들을 보면 틀림없이 자기 엄마 아빠를 닮아 있습니다. 저는 아기들을 볼 때마다 그것이 그렇게 신기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하는 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를 보면 네 엄마 아빠가 누구인지 알겠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겠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크리스천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인정하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직함, 착함, 성실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와 같이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우리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와 같은 기대 상실이 오늘날 전도의 문을 막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그와 같은 기대를 잃어버리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 하나를 편향된 로마서 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예배 시간도 많고 성경공부 시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어느 성경보다 로마서를 많이 공부하였는데, 로마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이신득의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로마서는 이신득의를 가르치는 성경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의 이신득의를 한 쪽으로 치우치게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나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의 이신득의의 교리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지나친 율법주의를 지적하기 위하여 쓰여 진 교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한 번 잘 지켜보려고 하는 열심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하나를 잘 실천하기 위하여 600여 가지의 조례를 만들만큼 저들은 율법을 행하고 지키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욕심이 없는 사람에 비하여 율법을 더 잘 지키고 행하게 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고 행하게 되었을 때 저들은 오히려 사탄의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행함을 자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를 더 빛내기 위하여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서는 그와 같은 잘못에 대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쓰여 진 말씀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로마서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행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믿음과 하나님을 앞선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전달되면서 행위 자체까지 부정되는 오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신득의의 교리는 행위를 부정한 교리가 아니라 행위가 믿음을 앞서는 것을 비판한 교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행위가 믿음을 앞서도 믿음이 죽지만, 행위 자체가 없어져도 믿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른 쪽으로 가라하시고, 세상은 왼 쪽으로 가라 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믿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왼 쪽으로 간다고 하여도 홀로 오른 쪽으로 가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대로 행하고 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가기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왼 쪽으로 간다면 세상에 누가 그를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겠습니까?
하나님도, 세상 사람들도 그를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로마서의 이신득의 교리는 그렇지 않아도 행함에 부담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함에 대한 신앙적인 부담을 벗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모양과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 잘못된 자리에서 벗어나 겉과 속이 다 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07년도에 우리 한국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을 하였었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나는 아간과 같은 놈입니다. 친구가 세상을 떠날 때 재산 정리를 부탁했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100량을 잘라 먹었습니다.’라고 울며 회개하는 것을 시점으로 온 한국교회는 대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변하여 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성령 운동을 통하여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이처럼 부흥하고 성장하는데 큰 몫을 감당하였다고 확신합니다.

1970년대에 우리 한국교회는 또 한 번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 한국교회는 깊은 성령체험을 합니다.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기도원들이 세워지고,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에 수 천 수 만 명이 모이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한국 교회는 또 한 번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배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의 성령운동과 1970년대 우리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운동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1907년 성령운동에는 회개운동이 열매처럼 있었는데, 1970년대의 성령운동에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못된 로마서 이해 때문에 행위를 거의 무시 하다시피 하는 경향이 있어서 1970년대의 성령운동은 그와 같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1907년의 성령운동은 정직과 성실과 착함으로 방향을 잡아 발전한 반면, 1970년대의 성령운동은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쪽으로 방향을 잡아 발전을 한 면이 많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양선이라는 열매가 있습니다. 양선이라는 말은 영어로 goodness입니다. 공동번역은 그것을 그냥 선행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는 선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다. 모양은 같아 보여도 열매가 없으면 좋지 못한 나무이고, 열매가 많고 좋으면 좋은 나무입니다. 같은 성령운동 같아 보여도, 외형적인 성장과 부흥은 같아 보여도 1907년의 부흥과 1970년대의 부흥은 질이 다릅니다. 품질이 다릅니다. 1907년의 나무는 좋은 나무였고,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나무는 별로 좋지 나무였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나무가 되어 뿌리 채 말라 버릴 위험에 처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절 말씀인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믿음으로 이신득의를 강조하는 로마서와 배치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을 하였던 루터까지도 그렇게 이해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까지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서로 배치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들음이라는 말은 참으로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들음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고 그 단계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귀로 듣는 들음이 있습니다. 모든 들음의 기본적인 첫 단계입니다. 그러나 귀로 들린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듣지 않은 것은 진정한 의미의 들음이 아닙니다. 소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듣지 못한 들음은 소귀의 들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들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귀로 듣는 사람이 있고, 마음의 귀로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를 할 때보면 설교를 경청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고, 공감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멘, 아멘을 외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와 같은 분들이 바로 설교를 귀로 듣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듣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상의 들음으로 손과 발로 듣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말 잘 듣는다.’라는 말은 순종을 잘 한다는 뜻입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뜻은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음은 순종입니다. 최상의 들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감동하고 느끼는 것으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느끼고 감동함으로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하고 행하는 것으로 듣는 것입니다. 최고의 들음은 순종입니다.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은 믿음은 순종과 행함에서 난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점점 없어집니다. 행함이 없으면 마음의 감동도 없어지게 됩니다. 나중에는 화인 맞은 양심이 되고, 나중에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는 자신의 행위에 도취되어 믿음의 의보다 율법의 의를 더 강조하였던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여 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과 행함이 믿음을 앞서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쓰여 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행함을 부정하기 위하여 쓰여 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로마서가 주장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행함을 부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가 주장하는 믿음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은 행함을 믿음 앞에 둠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행함을 믿음 뒤로 돌리고 하신 로마서의 말씀을 우리는 곡해하여 아예 행함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오해는 행함에 대한 부담이 늘 있었던 우리들에게 영적인 합리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합리화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교회와 교인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순종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행함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연약한 교회가 됨으로 자연스럽게 믿음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리는 잘 지르지만, 모이기는 잘 하지만, 정작 믿음의 실력은 약한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실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수를 키우기보다, 교회의 외형을 키우기보다 믿음의 실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행위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잘못되고 왜곡 된 이신득의 교리를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입으로만 예수 믿는 일을 그만 하십시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시고자 하였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입으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몸으로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몸으로, 삶으로 말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교회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1907년도의 교회는 그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1907년도의 교회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성령 충만함이 탁월한 정직함으로, 바보 같으리만큼 착함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포도주 항아리에 물을 가져다 붓고 그것을 떠서 가져가리만큼 순종하였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든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어 다시 한번 우리 한국 교회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가나의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일에 앞장을 서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