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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편애하지 맙시다 (창 25: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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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백발이 되도록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나이 마흔에 리브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리브가는 결혼해서 상당 기간 아기를 갖기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리브가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가졌습니다. 성경에 두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자주 싸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면서 하나님에게 까닭을 물으러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뱃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달이 차서 리브가가 몸을 풀었습니다. 먼저난 형은 몸이 붉었습니다. 온 몸이 털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에서라 지었습니다.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리브가가 이 쌍둥이를 낳았을 때 나이가 60세였습니다. 두 아들은 건강하게 잘 자랍니다.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들에서 삽니다. 동생 야곱은 성질이 차분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집안에서 지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남자다운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읽은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소설가 르나르(Jules Renard, 1864-1910)가 쓴 소설 “홍당무”를 아시지요. 루비끄 부인은 닭장의 문이 어둠 속에 열려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식모 아이가 문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세 아이 중에서 제일 큰 웨릭그스를 보고 닭장을 닫고 오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는 겁쟁이였습니다. 또 게으름뱅이였습니다. 그는 아무 대답도 안 합니다. 책만 읽고 있습니다. 그러자 딸 엘네스피노에게 문을 닫고 오라고 합니다. 그 역시 책만 읽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왜 이리 바보일까? “홍당무”야 너 어서 가서 닭장의 문을 닫고 오너라고 합니다. 홍당무란 머리카락이 붉고 온 얼굴이 주근깨가 깔려 있는 막내 아들의 별명이었습니다. 그 별명은 어머니가 붙인 별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나도 무서워요.” 했습니다. “덩치가 저만한 자식이 거짓말 하지마.” 하고 윽박지릅니다. 그는 등불도 주지 않고 내보냅니다. 홍당무는 겁에 질려 어둠속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닭장 문을 잠갔습니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돌아옵니다. 그는 어머니가 칭찬해 주기를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모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관심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홍당무야 이제부터는 네가 매일 닭장 문을 잠궈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서두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습니다. 다른 형제들보다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격이 비뚤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분풀이를 막내 홍당무에게 합니다. 그래서 자주 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과 어머니는 미워하는 불행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홍당무의 아버지는 못생긴 아들 홍당무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주 집을 비웁니다. 장사하러 가느라고 거의 집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홍당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이 아이가 비뚤어진 것은 편애 때문입니다. 물론 잘난 아이도 있습니다. 또 못생긴 자식도 자식입니다. 잘난 마음에 드는 자식만 사랑하면 큰일입니다.

부산중앙교회에서 너무도 잘나고 예쁜(숙명여대 졸업) 어머니가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어머니에 비하면 너무 못생겼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너무 너무 예뻐합니다. 이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아버지는 맏이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는 둘째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편애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잘 아시지요. 편애는 편 가르는 행위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난 생명체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이 말씀을 앉았을 때나, 길 갈 때나, 잠 잘 때에도 가르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를 실천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책입니다. 그가 아들 예수님을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편애하면 정신적 불구자가 됩니다. 부모를 증오합니다. 반항아가 됩니다. 문제아가 됩니다. 어느 누가 자기 자식이 문제아 되기를 바랍니까? 그러나 그렇게 만드는 장본인이 부모입니다. 사실 가정은 사랑이 숨 쉬는 곳입니다. 삶이란 뒷갈망입니다. 장막은 언젠가 내립니다. 지친 어깨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은 덧없습니다. 세상은 그래도 살 맛 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편 가르기입니다. 겉옷을 벗고 새 옷을 입자는 개혁세력이 있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있습니다. 제 뜻에 맞지 않으면 구호를 외칩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사생결단 덤빕니다. 단식투쟁도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모든 것이 경제 원리로 통합니다. 실용적인 사상입니다. 이것이 미국 철학입니다. 실용주의(Pragmatism)입니다. 현금가치주의입니다. 내게 득이 되면 적과도 동침한다는 세상입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이삭의 가정을 봅시다. 아버지는 사냥을 해서 요리를 대접하는 첫째를 더 사랑합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여성적이고 집안 일을 곧잘 도와주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편 가르기입니다. 이미 여기서 두 아이의 내일은 결정이 난 것입니다. “너는 왜 형처럼 사냥을 못하느냐?”  “너는 왜 야곱처럼 집안 일을 잘 하지 못 하느냐?”는 말이 자주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소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부터 진로를 선택합니다. 적성 검사를 합니다. 문과에 더 소질이 있는지, 이과에 더 소질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야 그가 대학교에 진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다른 사람처럼 다 잘하라는 것은 무리인 것입니다. 이삭은 이미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두 쌍둥이가 자주 의견대립이 되었습니다. 사실 편애는 곤비주의 씨앗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후손이 어떤 관계인 것 잘 아시지요. 앞으로 나오겠지만 동생이 형에게 팥죽 한 그릇을 줍니다. 배고픈 형에게 죽 한 그릇도 그냥 주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의 이름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에서는 그렇다고 첫째가 둘째가 되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선뜻 허락했습니다. 앞으로 엄청난 비극이 벌어집니다. 물론 그의 부모는 이런 불행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편애하면 받는 사람은 기본 좋습니다. 반면 받지 못하는 쪽은 속이 상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서로 견주면 안 됩니다. 늘 잘하는 것을 칭찬해야 합니다. 항상 그 인격의 아름다움은 다 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아들들의 비극을 잘 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의 정도에 따라 자녀의 길이 결정이 됩니다. 디모데 목사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기도의 영향이 컸습니다. 모세는 그의 어머니의 사랑과 애국심 교육으로 해방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도 그 어머니의 기도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한 때 흔들렸습니다. 방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장님, 농아였던 불구자 헬렌 켈러가 위대한 사람이 된 것도 어머니의 힘이었습니다. 에디슨은 발명의 왕입니다. 학교는 그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에게 발명의 왕이 되게 했습니다. 위대한 사람 뒤편에는 언제나 그들의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어머니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눈에 보이게 티를 낸 것입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골고루 사랑해야 합니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를 더 사랑하고 그 다음을 덜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상속법도 아들 딸 구별 없이 꼭 같이 부모 재산을 받을 자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삭의 쌍둥이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는 첫째를 더 사랑했습니다. 어머니는 둘째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공부 좀 잘 하고 재주가 뛰어나다고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언제나 부모 같은 마음으로 목회 하려고 합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친하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사단(Group)을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저울에 단 듯이 할 수는 없습니다. 편애는 즉 편 가르기 행위입니다. 그런 사회는 곧 분위기가 험악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늘 이 말씀과 함께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6.26-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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