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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하는 하나님 (슥 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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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하는 하나님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스가랴 4장 6절-10절)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약한 사람에게 힘 있는 사람이 함께 해 주면 그 약함이 상쇄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부자가 함께 해 주면 그 가난도 상쇄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현자(賢者)가 함께 하면 어리석음도 상쇄됩니다.
무능한 자에게 능력자가 함께 하면 그 무능이 도리어 강함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막연히 정신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번역하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관념이나, 사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적 우리의 삶 속에서 임재 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  니다.
특히 이사야 선자자의 예언을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41:10“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였고,
이사야 43: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했고,
이사야 43:5“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모두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

1. 하나님은 <폐허>위에서 함께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스가랴>는 주전 6세기 경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주전 6세기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여, 포로 생활로 지내던 암담한 세월을 보냈던 그런 시절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제일 희망이 없었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지의 내용은 소망의 예언이었습니다.
그의 메세지 내용은‘그날이 오면’이었습니다.
‘그날이 오면...’이란 폐허 위에서 바라보는 희망이었습니다.

그 희망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소망의 찬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에 생수가 다시 솟고,‘그날이 오면’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의 영적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의 노예의 신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강대국 바벨론이었고, 예루살렘은 이미 없어진 변방의 한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역사에서 이미 사라진 백성이 다시 무슨 수로 망해버린 고토(故土)를 회복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허망한 소리 같기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통일을 두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모두들 비현실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일 어느 목사가‘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평양과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했던 선천과 북한 전역에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될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지금 이 말을 얼마나 귀담아 듣겠습니까?
‘언제? 무슨 힘으로? 우리 생전에는 그것이 가능하겠는가?’‘어림도 없지...’등등 그런 생각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을 열정적으로 선포 하였습니다.
역사는 그가 예언한대로 적중되었습니다. 
당당했던 바벨론이 주전 587년 페르시아 왕(Persia) 고레스(Kyrus)에게 항복하여 식민지들에게 해방의 날을 맞게 하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1945년 8월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문이 낭독될 때 어리둥절 했던 것 같이 이스라엘은 꿈꾸듯 이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126:1절에“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폐허 위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폐허는 인간의 절망의 밑바닥입니다.
그런 인간의 처절한 밑바닥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좌절과 절망스러움의 폐허 위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였던 재물, 믿었던 친구, 사랑하던 가족이 먼저 갈 때, 그리고 꿈에 그리던 희망사항이 모두 물거품으로 되돌아갔을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기약 없이 도망치던 밑바닥 길에서, 불안하고 외로운 자리에서, 노숙하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하나님이 여기도 계셨도다’라고 하고 돌을 세워 제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노숙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자리가 도리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아야합니다.

모세도 정처 없는 세월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그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폐허였습니다.
그러나 광야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폐허의 자리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함께 하십니다.
거의 불가능이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서 역사합니다.

2. 또 하나님은 <죄인들>과 함께하여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 그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즉 죄인을 불러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실존에서 우리는 죄인임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죄인들과 함께 역사를 일으킵니다.
죄인 된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말입니다.
죄인 된 길에서 길이 열려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내가 곧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낙인찍어 절망케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네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네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크리스천들 중에는 이점을 몰라 감격이 사라진 상태로 방치해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율법의 아들이 되어가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아, 그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어가도록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 죄인이 자기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인 것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을 결단하면, 언제든지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한번 발을 잘못 들여놓은 그것으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 확장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모두 의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켜서 의롭게 사용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었습니다.

3. 하나님은 가장 <미약함>과 함께하여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스룹바벨>은 귀국 후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에 중요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시절 재건 작업에 기초를 쌓은 느헤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의 재건 사업을 비웃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빈정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도 없는 것들이 무얼 하겠다고 하느냐?’
‘이미 불타버린 돌을 흙더미에서 꺼내 다시 쓰겠다는 거냐?’
‘그런 성벽은 여우 한 마리만 기어 올라가도 무너지고 말텐데...’
야유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들린 추는 가장 미약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의 손에 들린 추는 쇠도 아니요, 금도 아니요, 기껏 돌로 만든 측량 추였습니다.
그것으로 측량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미약하고 작은 것과 함께 하여 역사를 이뤄나가십니다.

저는 오늘 우리나라의 남과 북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이 없이 보일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보면, 그런 기도를 아무리 해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여 당신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역사의 산 증거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국의 수많은 병사보다, 한사람 기도의 사람 존 낙스의 기도가 더 힘이 있었다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오늘의 모든 상황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함께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인으로도 절망스러움의 환경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부끄럽고 죄 많은 나였지만, 이제 회개하고 결단하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미약하게 시작하였으나, 창대케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김이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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