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형제의 만남 (창 33:1-11)

  • 잡초 잡초
  • 239
  • 0

첨부 1


이번주간에 일본 북해도 삿뽀로 유바리에서 일본교회대표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유바리에는 한국사람 수만 명이 강제 징용되어 석탄을 캐던 탄광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석탄박물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옛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그 추운 북해도에 끌려가서 추위에 떨며 막장에 들어가기 전 먼저 신사에게 가서 참배를 하고 막장에 들어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우리의 이 암울한 역사를 만든 일본은 아직도 사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아는 것처럼 일본은 요즈음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을 하고 고즈미 수상이 신사참배를 하는가 하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 한국의 발전을 가져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서슴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한국 사람도 아닌 일본사람들이 이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문제는 일본정부가 반드시 배상해야 된다고 말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사람의 만남은 여러 가지입니다. 평화를 위한 만남도 있고 전쟁을 위한 만남도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만남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려면 한이 없어야 합니다. 한을 푸는 방법이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고리가 풀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그 어떤 자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벗어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과 에서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20년만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너무 감격적입니다. 20년 만에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입 맞추며 울었습니다. 서로가 그리워했던 사람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우리 이산가족들의 만남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보고 싶은 얼굴들 만났으니 얼마나 감격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끌어안고 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에서와 야곱의 만남은 그리운 사람끼리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에서를 속였고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에서를 피해 도망친 사람입니다. 무엇이 반가웠겠습니까? 서먹서먹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만남은 극적입니다. 무엇이 이처럼 감격적인 만남을 만들었습니까? 변화입니다. 야곱이 변화 되었습니다. 야곱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는 일에 고민을 한사람입니다. 그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업드렸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업드릴때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업드렸습니다. 그리고 확신이 서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사랑은 죽지 않았습니다. 봄의 싹이 올라오듯 야곱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땄습니다. 그 열매가 이스라엘입니다. 너는 내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소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소유하셨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소유하셨습니다. 이산지는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무도 손 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놀라지 마라 네 손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를 사랑하는 여호와로라.”

확신이 생겼습니다. 야곱이 형에게 나아갑니다. 이제는 속이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일곱 번 절하며 나아갑니다. 변화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야곱이 고개를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은 종이 주인을 만났을 때, 신하가 군주를 만났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이전에 생각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살아 남기위해서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400명이나 거느리고 나오는 에서가 겁을 먹었나요. 아닙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돕고 있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놀라지 말라 네 손잡아 주리라.” 겁이 나지 않는다면 이 행동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겸손입니다. 그가 변화 된 것입니다.

그 변화는 과거에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던 일을 사죄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태도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의 인사는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형이 손 내밀기 전에 자기 손을 내밀어 겸손함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잘못했던지 간에 먼저 손 내밀고, 먼저 화해하고, 먼저 화목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우리가 화해의 사신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하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화목의 사신입니다. 화평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행하는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양보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보고,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무슨 일 벌어지고 있습니까? 한 사람이 변화되어 돌아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에서와 야곱은 만나면 전쟁을 한번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워했던 결과는 예상외로 너무나 간단하게 끝이 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공포에 가득 차서 에서와 대면한 곳에는 야곱이 생각하고 있던 분노에 가득 찬 에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서는 야곱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될 때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문제를 풀면 인간의 모든 문제도 풀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문제가 풀려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지혜를 동원을 해도 문제는 풀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집나간 아들을 위하여 밤마다 문을 열어놓고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집나간 아들은 고민을 많이 합니다. 이리 저리 고민하다가 결국 차마 죽지 못하는 심정으로 귀가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집에는 분노하는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지같은 모습의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용서와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준비한 새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며, 살찐 짐승을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입니다. 고 가르친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용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뀝니다. 내가 변화하면 세상도 변화합니다. 야곱이 새롭게 되니 에서도 새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도 바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되면 ‘하나의 민족인 남한과 북한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 수 있는 때도 오리라 믿습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을 보게 되는 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용서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 감동적인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도 에서에게도 평화가 왔습니다. 가장이 평화하니 온 가족이 평화합니다. 가장이 평화하지 못하였을 때는 온 가족이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가 평화를 가지니 온 가족이 하나 되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나와서 에서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눔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는 야곱과 선물을 거절하는 에서의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진정한 만남은 이렇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이 어디서 왔습니까? 용서받고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병이 생깁니다. 밤잠 못자는 병이 생기고 머리 아픈 병이 생깁니다. 소화가 안 되는 병도 생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용서 받고 여러분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에게는 이제 두려운 일이 없습니다. 머리 아플 일도 없습니다. 10절입니다.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예전에는 두려움으로 주려고 했던 물질이었는데 정말로 이젠 기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형의 얼굴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처럼 느껴집니다. 은혜 받으면 이렇게 달라집니다. 겨울은 지나가고 꽃이 피는 봄이 옵니다. 에서와 야곱은 만나서 용서했고 용서를 받으며 화해를 했습니다. 평화가 왔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기쁜 날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김영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