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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와 영성 (창 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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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의 기준을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에 둡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에게 더 필요한 것, 더 소중한 것, 귀하게 여기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오랫 동안 지속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여전히 계속해서 귀중히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아오는 클래식컬한 음악 혹은 영화가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변함없는 것’을 우리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서로 맺은 사랑이 변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결혼한 커플들 보면 서로 변치 않기 위해 마음을 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변치 않을수록 그 결혼은 더욱 아름다워 집니다. 마찬가지로 금이 사랑받는 이유는 금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희귀한 것을 우리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구하기 힘든 것, 보기 힘든 것이 가치가 있습니다. 예전에 세계에서 단 두장 밖에 없는 우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우표 한장을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남은 한 장 값이 두 장을 합친 가격보다 비싸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 우리에게 가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삶 속에 가장 가치 있는 일과 행위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랫동안 지속되고, 변치 않고, 유일한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배’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이 땅에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지속됩니다. 주님이 오시고,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면 이 땅에서 행해지던 모든 것이 중단됩니다. 그런데 예배만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지속하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일은 변함이 없으며 영광 받으실 분은 한 분 밖에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단적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없어 전도하려는 마음이 내 속에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 목표와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그만큼 전도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전도도 예배를 잃어버리면 가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우리가 선교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배드리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배드림이 없는 그곳을 위해 전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드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천국으로 갔을 때 그 때는 전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예배만이 그 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예배에 실패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생에 있어 실패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실패라는 것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할 때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겠습니까? 그냥 왔다 가는 것이 예배입니까? 참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예배의 의미를 되살려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첫째,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그들 삶속에 임재하심을 통해서 그들이 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심리학, 상담학을 공부하면서 제 자신과 사람들을 보며 내린 결론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변화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옛날 입맛 , 옛 친구 , 옛 습관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변화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입니다.

성경 속에서 변화된 인생을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들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꿈을 접고, 길을 가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고 성경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 대화의 주제는 ‘죽음’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명이 주제가 되어야 하는데, 죽음이 그들 대화의 주제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허무와 죽음 그리고 없어질 것들을 대화의 주제로 삼고 살아가는 분은 없으십니까? 그들의 삶의 방향은 주인공에서 주변인으로 점점 몰락해 가고 있었고, 이것을 작은 도시로 가는 발걸음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면서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시냐!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그들은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삶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발걸음을 돌려서 도전해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가 생명과 부활로 바뀌어 갔습니다. 얼굴에 환한 빛이 돌고, 소망과 기쁨과 희망의 빛으로 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새로운 인생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요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별로 문제 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가 살던 삶의 영역을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길을 위해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출발하겠다는 결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것을 열등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돈과 권력을 일평생 추구해왔던 사람입니다. 민족의 재산을 뜯어서 자신의 배를 불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섰지만 그 속은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어놓고 자신이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가진 자가 돈에 더 집착을 합니다. 돈을 아주 귀중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삭개오가 돈을 내어 놓았다는 것은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를 지지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인생의 기반을 다 내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내어 놓는다 해도 그 삶에 다가온 변화가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이기고도 이세벨의 공격 앞에 그는 지쳐서 낙담했습니다. 깊은 우울에 빠져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그러던 그가 호렙산 동굴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훌훌 털고 새로운 사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중에 이러한 분이 혹시 없으십니까? 대화와 표정 속에 슬픔과 절망의 빛이 담겨 있고, 주변인으로 전락해 가는 절망적인 삶을 사는 분,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며 두려움 때문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분은 없으십니까? 내가 여태껏 의지해 왔던 물질이나, 명예, 권력들, 자존심 이러한 것들로 인생의 근원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시는 분들이 이 중에 계십니까? 아니면, 선하게 열심히 살았지만 세상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는 삶에 지쳐 새롭게 시작해 볼 용기조차 없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본문 창세기 15장 17절에 나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보여주신 언약을 어떻게 확인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5장 8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간구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이 만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 바로 이 예배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을 계시록 1:9~10절  말씀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재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 밧모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에게 핍박을 받아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그 몸은 기둥에 묶여져 기름천에 싸여 밤새도록 궁전의 마당의 뜰을 밝히는 불쏘시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점점 지하로 스며들고 교회는 무너져 갈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사도요한의 삶 속에도 절망뿐이었습니다. 자신도 유배되어 왔으니 희망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절망적인 순간에도 “주의 날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씀드리면 “예배를 드리는 날에”라는 표현입니다. 괴롭고 힘이 들수록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드림에 참여 했습니다. 여러분, 공적인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산기도 가서 은혜 받는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임재하시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바로 그 주님이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 앞으로 교회가 해 나가야 할 일들과, 성도들이 앞으로 살아갈 일들을 계시하여 보여주면서 또한 그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하고 바라보며 주님 앞에서 복된 예배의 날과 시간을 지키며 엎드렸을 때에 그는 주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꼭 하나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간구함에 대해 응답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모습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시간은 강론 시간에 불과하게 됩니다. 철학이나 성경에 대해 강의하는 강의 시간과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하나님이 임재하기 때문에 말씀이 선포 될 때에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망과 희망의 메시지가 됨을 알아야 진정한 의미 있는 예배시간이 됩니다.

예배시간에 은혜받기 어려운 사람들이 바로 교역자들입니다. 사회와 안내를 한다고 해서 예배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자신의 경우를 봐도 꼭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배가 기쁨이기보다 일로 다가와 마음이 산란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 다니신 분들 역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배가 습관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배의 역동성, 생동감, 생명력,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감각이 둔해 집니다. 습관적으로 드리는 분이라면 예배 시간에 아무 의미 없이 앉아 있기도 하고 예배를 안 드리면 불안하기 때문에 억지로 와서 앉아 계신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절망적인 삶을 되돌릴 수 있는, 내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것으로 되돌려 드릴 수 있는 존귀한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베르디의 첫 오페라 작품이 플로렌스라는 곳에서 공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주장 구석에서 한사람의 모습만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명한 작곡가였던 롯시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롯시니 에게만 그의 마음이 쏠려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나왔다면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단 한 가지,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겠다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만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고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를 만나주셨도다.’ 라는 고백이 예배를 통해서 나와야 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 삶에 없으면 예배는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며 그 예배는 모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자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고 영향을 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배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고 하나님께 그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어봅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자신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축복이 임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5장 9절에 보면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여기서 왜 하나님이 3년 된 것을 취하라고 하셨을까요? 제물 중에 3년 된 것이 가장 최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소유한 것 중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드리는 것이며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너무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드리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12:1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씌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곳 제사든지 제물을 죽여서 피를 내게 되어있습니다. 살아 있는 제물을 쓰지 않습니다. 모든 제물은 다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에 나올 때에 우리의 모습이 죽기를 원합니다. 내 자존심이 죽고, 내 경험과 지식이 죽고, 내가 자랑하는 모든 물질이 죽고, 내 외모가 죽는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쪼개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만 사모하고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예물로 받으시는 겁니다.

내 자존심이 살아있어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여전히 화가 나고, 경험으로 인한 생각들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여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내 지식이 살아 움직이니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 내 인생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죽을 때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나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을 받으셔야 합니까? 주님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에 worship은 worth라는 단어와 어근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을 요청 하셨을까요? ‘나는 오늘 너를 너 되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 갈대아 우르에서 멸망당해야 했을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자녀 삼으시고 위기와 어려울 때마다 건져 주시고 복에 복을 주셔서 오늘 이 자리에 까지 오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주신 복을 가지고 미래를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으로  돌려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예배드리는 자리까지 오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에게 여자와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협박 했더니 3분 사이에 1억3천이라는 돈이 들어왔다는 황당한 사건이였습니다. 어렵게 번 돈을 엉뚱한 곳에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을 함부로 쓰는 것, 선한 자존심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물질과 지식과 경험을 가장 소중한 곳, 즉 하나님을 위해 쓸 때 가장 값지게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지혜와 물질을 밧세바라는 한 여인을 위해 쏟아 부었을 때 그의 인생에 불행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올려 드렸을 때에 그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한 것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을 썩어질 것과 허무한 것들에 버리는 가치 없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치 없는 곳에 버린 후 절망하고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늘의 예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네 생물이 있는데 밤낮 쉬지 않고 노래한다고 합니다. 4:8절을 보면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4:11절을 보면 24장로가 자신의 면류관을 하나님께 던지면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5:12절을 보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여러분, 위 말씀들을 요약하면 무슨 의미가 됩니까?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합니까? 나의 창조주 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는 모습들이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이 시대에 볼 수 있는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습입니다. 낳아주신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둠과 죄와 사망가운데 있을 때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못 드린다는 말입니까? 부스러기 시간과 물질을 드리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것을 하나님이 받으셔야합니다. 봉사한다고 예배드리지 않는 것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예배드림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봉사도 헛된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영광과 능력과 존귀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그분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51곡 합창은 헨델음악의 최고봉이라고 합니다. 메시야 중 가장 강력하고 절정에 이르는 합창을 보여줍니다. 마땅히 찬양받으실 그 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곡은 요한계시록을 배경으로 하는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는 어린양 예수만이 합당하다고 찬양합니다. 그것은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 가운데 죽을 내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기에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주님께 올려지는 영광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드리고 있습니까?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누군가를 모시고 살아가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미래를 위해 그 소중한 것을 어떻게 소비하고 계신지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여러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받을만한 분에게 드리십시오. 그래야 그것이 가치 있고 빛이 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그것은 가장 값진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려고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미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떠할 것이며, 그 후손이 어떻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 까지 예배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어느 땅이 아브라함것이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일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할 것은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좇아가는 것 뿐 입니다. 공식적인 예배가 끝난 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걸어가는 삶이 예배의 연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이 끝났다고 예배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시간은 예배시간이고, 끝나고 나면 내 시간이라는 이원론적인 구분을 하기 때문에 이 예배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이 시간은 수동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그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삶 속에서 고독한 결단을 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일을 행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자로서의 연속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당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좀 더 우리는 이안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공식적인 예배 시간만이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가운데서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 살아나가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겠지만 실상은 우리자신의 욕구대로 삶을 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생활 속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5장 17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먼저 연기 나는 풀무불이 보입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이 보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삶에 연기 나는 풀무불처럼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그 뒤에 보여 지는 타는 횃불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 삶을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바로 예배의 현장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예배자로서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5:14절에 보면 예배를 마칠 때 장로들이 ‘아멘’ 하며 엎드려 경배한다고 쓰여 져 있습니다. 여기서 아멘이라는 말은 끝이 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멘의 의미는 “Me, too”, "Truely!" “진심으로 나도 원합니다.”하는 동의하는 의미입니다. 음악에서  도돌이표와 같은것 입니다. 내가 찬양하고 예배했던 그 모습대로 다시 되돌아가서 연속적으로 살고 싶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헨델이 24일 만에 무려 259쪽에 해당하는 대곡인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완성 해 갈 때 크라이막스는 정하고 나서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앞에 고백한 모든 것을 가장 짧은 단어로 재강조 할 수 있는, 그리고 이 찬양과 노래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이 52번의 ‘아멘송’ 입니다. 마흔세 번이나 아멘이 나옵니다. 약 5분정도 연주 합니다. 이 마흔세번의 아멘을 1부, 2부, 3부에서 반복하는데 이 연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들어보면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헨델이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둔 것은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자신의 아멘’을 포함하는 시간을 예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향한 구원의 소식과  하나님의 사랑이 이 예배당 안에서 그쳐야 합니까? 내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그 구원의 역사는 계속해서 내 삶을 통해 이어져야 하고,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드러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이 모습은 결단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헨델은 아멘으로 그 곡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시간에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불러야 할 노래입니다. 언제나 우리 삶에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오심과 고난 당하심과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에 대한 복음의 역사는 오늘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있든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당 안에만 갇혀 있는 신앙에서 이제는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공식적인 예배시간만이 예배라는 생각을 이제는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문을 나가면서 여러분은 어쩌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가장 어려운 결단을 하며 고독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배드리는 순간들이 얼마나 좋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것을 즐기는 사람은 참된 예배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불렀던 노래가 내 삶속에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이 예배를 통해서 찾길 사모하십시오. 내 삶을 바꾸는 것은 목사의 설교가 아닙니다. 찬양대의 찬양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환경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는 것 입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반드시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산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전심으로 찾고 찾을 때 주께서 만나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예배 속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배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상처받는 연약한 나 까지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시간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배는 오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의 현장에서 계속해서 불러야 할 노래요, 드려져야 할 예배인 것을 기억하면서 예배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예배자의 축복을 누리는 우리 주님의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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