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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을 소유하는 비결 (마 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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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조지 본(George Bone)이라는 유명한 코미디언이 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왜 옷을 주지 않고, 벌거벗고 살게 하셨는지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옷을 주면 틀림없이 주머니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것이고, 또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거기다가 돈을 채워달라 할 것이기에 아예 옷을 안 주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코미디언다운 말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욕망을 꼬집는 유모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습니다. 소위 에스컬레이팅합니다. 상승작용을 합니다. 차라리 없을 때에는 되는 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물질을 가지게 되면, 좀 더 좀 더 하게 됩니다. 점점 커지기만 합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줄도 모르고, 남들의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받는 줄도 모릅니다. 뭐 사람이 죽건살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병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가운데 마르쯔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의 기본욕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 욕망이 생리적 욕구라고 합니다.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잠자야 되고, 배설해야 하는 동물적인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동물적인 욕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욕망이 안전의 욕구라고 합니다. 좀더 편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집을 원하고, 좋은 자동차를 원하고,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원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세 번째 욕망이 사랑에 대한 욕구라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하고 또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아주 원초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적 사랑을 받았기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의 욕망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사실 이번 28사단에서 총기 사고가 난 배경에는 여러가지 병영생활에서 고통을 받은 숨은 사정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고통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주도했을 개연성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인정받지 못했기에 잘못 선택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의 정의 분명하게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권위와 하나님 영역에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지옥에 간다고 규정합니다.

중앙일보에 보니까 대만에 있어서 자살의 심각성에 대해서 소개한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통계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2003년 우리나라 자살 인구는 1만1000여명. 하루 평균 30명꼴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신분층을 가리지 않고 그중 보도되는 건수가 3~4건이고, 어떤 때는 밀려서 보도되는 경우도 있다고합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는 24명이나 돼 전년대비 4.9명 증가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30대의 경우엔 자살이 사망원인 1위입니다. 자살의 배후에는 우울증이 있습니다. 주위에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치료를 받게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질환인데 최근 인기 여배우의 자살이 가져온 사회적 충격이 큽니다. 자살은 이제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닌 우리 삶의 보편적 행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만에서는 년 중 7,000건이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자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통계를 내어보니 실직 이유가 45%였다고 합니다. 대만은 자살 중 가장 큰 이유가 실업이었습니다. 실업이 뭡니까? 한마디로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이큐 90이하는 자살하는 법이 절대 없고, 똑똑한 사람들이 자살한답니다. 만인으로부터 또는 가족으로부터 뭔가 인정을 받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최근 지방에 모특수고등학교에서 학생에 대한 문제로 가족들이 집단 자살을 했습니다. 당사자인 아들은 죽지 않았는데 작은 삼촌집에 사는데 학교에서는 오지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학생이 교실에 찾아가 벽돌을 던지고 복도에서 제초제를 먹고 자살을 했습니다. 인정 대신에 무시를 당하게 될 때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졌다'는 극단적 소외감도 자살로 이어지게 됩다. 그러므로 심리적 소속감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대가족이 해체되면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지지세력이 없는 것도 자살 증가의 한 원인"이며, 여기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 있는데, 무능해서 직업을 가지지 못해서 돈을 못 벌었습니. 부인이 돈을 벌고 남편이 가사 일을 하는데, 부인이 남편을 무시하고 구박까지 합니다. 남편이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당신이 뭘 알아" 합니다.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하며 구박합니다.

어느 날 남편이 시장을 보고 오다가 그만 교통 사고를 당해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부인이 부리나케 응급실로 달려가서 의사에게 물었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사 선생님 하는 말이 "당신 남편 죽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제 부인이 남편의 시신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살아 났습니다. "여보, 여보 나 안죽었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하는 말 "당신이 뭘 알아? 의사가 죽었다면 죽은 거지"하더랍니다.

세상에, 이런 여자하고 사는 남자라면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기본적인 욕망이 깡그리 무시되니 말입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말입니다.

다섯 번째 욕망이 자기 실현의 욕구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나름대로 꿈이 있고, 이상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자기 정체를 높이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쯔가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의 기본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플러스 알파의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에 대한 욕망입니다. 전도서 3:11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그랬습니다.

본문 12절에 계속 보면,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그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이요,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바론 디 로스칠드’라고 하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바론은 한 화가의 작품모델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델의 모습은 바로 거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남루한 복장을 한 바론은 그 화가 앞에 정말 초라한 옷을 입고, 얼굴은 초췌한 모습이며, 손에는 다 낡은 컵을 하나 든 모습을 하고는 앉아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거지였습니다.

그때 그 화가의 친구가 우연한 길에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바론의 영락없는 거지 분장에 그 화가의 친구는 전혀 그 유명한 부자 바론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바론이 들고 있었던 그 컵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동전을 동냥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론의 컵에 자신의 동전을 넣었던 그 화가의 친구는 은행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게 됩니다. 그 편지에는 일만 프랑 자기앞 수표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해졌습니다.

“과거 어느 날 당신은 아리 쉐펄의 화실에서 바론 디 로스칠드씨에게 동전 한 닢을 적선해 준 적이 있습니다.??
로스칠드씨는 그날 받은 돈으로 투자를 해서 다음과 같은 이윤을 남겼기에 당신에게 돌려줍니다. 선한 행동은 선한 행운을 가져다줍니다.”??

한 선한 행동이 커다란 상금으로 돌아온 경우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마태복음 10장??40절에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냉수 한 그릇으로라도 섬기며 나누는 자라도 우리 주님은 결코 잊지 않고 상 주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33을 암송하십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으로 인간되게 하고, 풍성하게 사는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행복에 이르는 네 번째의 길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그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예레미야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고 말입니다.

미가 6:8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그랬습니다. 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의를 행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의를 획득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얘기도 아니요, 의로운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절대적 의의 수준에 이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사람은 역사적으로 딱 한 분만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창세기 3장 2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으며, 부활을 통하여 죄엄ㅅ는 의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게서 인간 역사에 간섭하셔서 공의를 보여주신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누구도 의에 여기에 도달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전한 의에 도달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복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의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의로움을 사모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의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를 열정적으로 사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구체적인 우리의 삼ㄹ에 적용을 한다면 「하나님의 기준을 내 기준 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목말라 하면서 구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며, 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복있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상황에서 의에 대하여 정말 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소망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믿음의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요, 정열적인 추구요, 열정적인 소망을 가지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알게 모르게 지금 부요병에 걸려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주를 찾고, 열심을 내기에는 너무나 육적이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쾌락적이고, 썩어지는 세상적인 것에 살쪄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아플루엔자라는 병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풍요병 말입니다.

이 풍요병이라는 말을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칼 융 연구소장′인 「존 래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풍요병의 증상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은 것이 의욕상실을 꼽았습니다. 사람이 부해지고 돈이 많으면 더 의욕이 생길 것 같지요? 천만에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게을러지고, 삶의 의욕이 약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돈 많다는 나라치고 복잡하지 앉은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살율도 못 사는 나라에 비해 휠씬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절대빈곤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었습니다. 주림이 뭔지, 목마름이 뭔지를 까마득하게 잊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아십니까? 마치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위험 수위까지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의가 밥 먹여 주냐?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면 손해 본다라는 생각이 만연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늘 강력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말하는 「의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넨"입니다. 기본형은 "디카이오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떠나서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행복할 수 있는 길이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사모함이, 의에 대한 열정이 나에게 정말 살아있는 것입니까? 내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선에 대해서, 정직에 대해서, 진실함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의욕과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의에 대한 열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굳어져 있고, 안일주의에 빠져있고, 타성화 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나의 열심도를 묻는 질문입니다. 문제는 배부르고 등 따스함으로 말미암아 의욕도 사모함도 그 열심도 식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돌이키라고 권고하는 음성을 듣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에 류슈큐니라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2위로 입상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후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연주회를 하므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돌아다니며 연주회를 하기를 무려 9년입니다.

그러던 중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동안을 꼼짝 못하고 감옥 속에서 썩어야만 했습니다. 온 세계 음악애호가들이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 좋은 연주회를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며 매우 섭섭해했습니다. 이제 6년 후에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연주회를 한다고 광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기 시작합니다. '아니, 6년 동안 피아노를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연주회를 하겠다는 거야?' 그래 저마다 별로 기대들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6년 동안 한번도 피아노를 쳐보지 못한 사람이 그 어느 연주회 때보다 훌륭하게 연주를 했습니다. 온 세계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 기자들마다 마이크를 들이댑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구?"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한시도 연주를 떠나 본 일이 없습니다. 내 생각에 악보를 잊어버린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오로지 6년 간을 연주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의 이 연주를 위해 6년을 연습한 것입니다."

굉장한 얘기 아닙니까?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연주하는 마음 말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르렀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주리며 목말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모했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정어린 마음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의 문제가 아닌 철저하게 자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2:1에 보면,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슴이 목말라 하면서 시냇물을 그리워하며 갈급해 함 같이 자신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그러하다는 고백입니다. 물을 사모하는 사슴같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때고, 갓난아이들이 어머니의 젖이나 젖병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빨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에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자세입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몸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의 몸은 97%가 물이고, 신생아의 경우는 77%가 물이고, 어린 아이의 경우는 70%가 물이고, 성인의 경우는 사람의 몸은 성인남성일 경우 60%, 성인여성이 52~58% 이상이 물이고, 노인의 경우는 50%가 물이라고 합니다. 결국 뭡니까? 육신이란 점점 물이 모자라서 늙고 죽는다는 얘기입니다. 말라죽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 우리가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간호사가 와서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링게르 주사부터 꼽지 않습니까? 그 링게르라는 것은 물입니다. 약간의 포도당을 섞은 증류수입니다. 이 말은 맹물을 피 속에 집어넣으면 산다는 얘기입니다.


이 체내의 물이 극단적으로 부족하면 땀이 나오지 않고 체온이 올라가고 혈액이 농축(진하고 걸어진다)돼서 흐르기 힘들어지며, 뇌경색이나 심근경색의 발병으로 이어집니다. 물에는 몸안에 쌓인 독소나 노폐물을 오줌으로 녹여 배출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노폐물이 쌓이지 않게 물을 마셔 오줌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수분을 충분히 보급하면 노화를 지연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모자라서 병들었으니까 수분을 우선적으로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환절기를 당하면 몸살 감기환자들로 병원마다 만원입니다. 의사가 환자보고 그런 처방을 내려줍니다.

하루에 따듯한 물을 열 컵 이상 마시세요 라고. 이것은 철칙이랍니다. 그래 머리맡에 아예 물 컵 갖다 놓고 살다시피 해야 합니다. 미군들을 보면 2.0l짜리 물병을 옆구리에 달고 다니며 삽니다. 물을 많이 마셔야 빨리 건강이 회복 됩니다. 필요량을 채우기 위해선 하루 1.8ℓ(한되)의 물을 섭취해야만 됩니다.


** 이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주리고 목마름같이 의를 사모하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사모합시다. 말씀을 사모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핍박이라는 단어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전혀 핍박받는 것이 아닌데도, 본인이 생각할 때 내가 지금 핍박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주변에서도 집사님이 핍박을 참으라는 가증스러운 말을 서로 주고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혀 십자가가 아닌데도 목사님, 제가 이 십자가를 지고 지금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잘못해서 죄 지어 놓고 벌 받으면 십자가다 박해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하고도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에서 죄의 값으로 매를 맞는 참는 것은 아무런 칭찬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핍박도 아니고 박해받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난 성격과 기질, 잘못된 습관 때문에 타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내가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고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지만 내 성격이 못되고, 내 기질이 나쁘고, 잘못된 습관들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주변사람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그것은 결단코 핍박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대의명분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이것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지만 성경적인 원리로 보면 이것은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화나 사회정의를 위하는 대의명분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믿지 않는 불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의를 위해서 핍박 받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군사독제 치하에서 민주화투쟁을 위해서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분신자살을 한 전태일 같은 사람을 두고 순교자이 뭐니 했지만은 우리가 엄밀하게 성경적 원리를 적용한다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 핍박을 당한다,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원리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합니다. 이 말의 원리를 문맥적으로 연결해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해석해야지 정확한 해석인 것입니다.

여러분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우리에게 하늘의 상이 크다고 예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것이나 사울이 목이 잘린 것이나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이 순교를 한 것이나 기독교 역사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순교의 자리에서 절망하고 낙담하고 절규하고 원망하고 탓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의 재물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의 상이 그들 앞에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천국의 소유자, 천국의 주인공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일을 기피하지 않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을 닮아가도록 거룩함을 사모하십시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함 같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하십시다.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십시다. 여기에 바로 배부르게 하는 은총과 행복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만족하게 되고, 행복하게 살고, 신령한 것들로 채움받는 영육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고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는 곳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갈증만 더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사모하는 곳에는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시편 107:9에도 약속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 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편 34:10에서도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면 하늘문이 열려 이 땅에 필요한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미 성도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을 받아 죽은 영혼이 살아나 생명을 얻었고, 영생과 천국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마땅히 행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로마서 13:8절에??"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구원의 댓가로 예수님은 생명까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해 주셨습니다. 또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손길들의 도움을 얻었습니까? 빚진 자라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저절로 생겨나야 합니다. 주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빚진 자의 자세로 삽시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신앙까지 성숙한 믿음의 성도가 될 때 위로 부터 책임져 주시는 행복해지고, 만족케 되는 축복이 함께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영과 육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혀 주셔서,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왔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로 올바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에게 그 의를 사모하되 주리고 목마름같이 할 수 있도록 은혜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수 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게 하셔서 배부른 삶, 만족한 삶,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치관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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