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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으세요! (벧전 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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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진 軍紀綱,'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19일은 온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날이었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중부 전선, 최전방 GP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김모(某) 일병이 수류탄 1발을 던지고 K-2 소총을 난사해서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육군의 수사당국이 사고 경위에 대해서 발표는 했지만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참변을 당한 병사들은 대부분이 외아들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숨진 소대장은 전역을 10일 앞두고 이와 같은 참사를 당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은 부모님들과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앞으로 이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고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군기강이 해이해진 것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군기가 풀린 원인이 무엇인지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저도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만 GP는 그야말로 전방 중에도 최전방 감시초소입니다.
가장 군기가 엄정해야 함은 물론이고 병사들이 늘 깨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GP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GP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참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GP나 GOP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초병(哨兵)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방심해서 안 됩니다. 긴장을 풀어서 안 됩니다.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전방을 주시한 채, 항상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합니다.

경계 근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군에서 내려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근무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경계근무를 잘못 서서, 전방 철책선이 뚫릴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구(警句)가 나왔을 것입니다.

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초병들의 사명은 정말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거나 자고 있을 때에라도 그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경계근무를 잘 서 줄 때 후방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고도 깨어 있지 못한 까닭에 생긴 참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들 방심하고 있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고가 돌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어떤 동료 한 사람이라도 김일병의 모습을 잘 관찰해서 이를 감지(感知)했더라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사고가 일어난 소초는 그 어떤 부대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부대원들 전부가 화목한데 한 사람만이 부대생활에 적응을 못한다,
이것이 더 큰 소외감을 부채질했던 것은 아닐까요? 
자기 홀로 왕따를 당하고 외톨이처럼 소외당하는 김일병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병들어 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열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 마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퍽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하여 아예 무관심한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이것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풍경소리,' 깨어 있음의 소중함이여!>
절에 가면 처마 밑에 달려있는 풍경(風磬)이라는 작은 종이 있습니다.
'그윽한 풍경소리'라는 표현도 있듯이 바람이 불 때마다 댕그랑댕그랑 소리를 냅니다.
대개 풍경은 물고기 모양의 금속판으로 되어 있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풍경을 답니다.
하나는 산새들이 밤에 절로 날아들다가 풍경소리를 듣고 처마에 부딪히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고기가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있듯이 수행자들도 늘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스님 중에 성철(性徹, 1912-93)이라는 분은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으로 유명한 선승입니다. 
장좌불와는 한문 그대로 오랫동안 앉아서 눕지도 자지도 않고 하는 참선 방법입니다.
성철 스님은 무려 8년 동안이나 눕지도 졸지도 않은 채 장좌불와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비록 우리와 종교는 달랐다고 할지라도 그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치열한 수행정신만큼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 있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당연히 잠을 자야 하겠지요.
그러나 잠을 자는 순간에도 방심하거나 헛생각을 품지 말고
늘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어떤 위기와 고난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해맑은 의식 속에 늘 깨어있는 사람은
그 위기와 고난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당달봉사라고 부릅니다. 
세상에는 당달봉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마음을 풀어놓고 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깊은 잠이 들었어도 그 의식은 늘 청정하여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른 정신, 맑은 의식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는 건강하고 안전하게 됩니다.
어떤 위기와 고난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전방에서 일어난 사고소식을 접하면서 저는 "항상 깨어 있으라"는 하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한 시도 졸거나 방심하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맑은 생각, 건전한 생각을 품은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합니다.
버스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열차를 탈 때에도 승객들이 다 졸거나 잠이 들어도
운전하는 분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온 승객들의 안전과 생명이 깨어있는 운전자들의 어깨 위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IMF의 위기가 갑자기 왜 찾아왔습니까?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치고있어도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소비만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나라 살림이 엉망이 되고 있어도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와 같았던 것입니다. 

4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모두 9차례나 됩니다.
그런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대부분이 위기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찾아오듯이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위기가 닥칠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 깨어 있으라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말리는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셔서 세 번씩이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아픔을 알지 못한 채 쿨쿨 깊은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장차 들이닥치게 될 위기와 고난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여러분 '영적 각성'(覺醒)이 무슨 뜻입니까?
영적으로 깨어나라는 뜻이 아닙니까?
영적인 수면 상태로부터 깨어나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통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지 않으면서 영적 각성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으세요!>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다같이 본문 8-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서 기자는 시 22: 13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마귀를 '우는 사자'로 비유합니다.
방심한 채 잠이 든 사람은 우는 사자가 덤벼들 때 피할 수 없습니다.
사자가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알지도 못하고, 또 어떻게 싸워야 할지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자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잠든 사람은 사탄마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우리를 삼키려고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을 볼 수도 없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사탄과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근신하며 깨어 있는 것으로만 안 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마귀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초병이 깨어 있는 것까지는 좋은 데,
적이 침투해 올 경우 신속한 대응을 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위기상황을 수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오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초병만이 적을 가장 빨리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 있음'은 적군과 맞서 싸움에 있어서 선결조건이며 필수조건인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마귀가 가지가지의 형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할 때
깨어 있는 성도만이 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는 성도들만이 마귀의 준동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성도만이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근신하며 깨어 있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 온 이 시점에 깨어 있는 성도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나가보면 세상은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사악한 죄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사탄의 세력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우는 사자와 같이 덤비는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평소에 긴장을 잃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방심하고 잠자는 사람은 넘어집니다.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깨어있는 거룩한 버릇을 기르십시오!

노(老)스승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수풀 속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멈추더니만 옆에 있는 네 개의 나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이제 막 땅위로 나오기 시작한 어린 나무였으며,
두 번째 나무는 작기는 하지만 땅에 뿌리가 제대로 잘 박힌 나무였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아주 단단하게 자라난 작은 키의 관목이었으며,
네 번째 나무는 완전히 자라난 큰 나무였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명령했습니다.
"첫 번째 나무를 뽑아봐라."
제자는 손가락만 가지고서도 쉽게 뽑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 나무를 뽑아라."
제자는 첫 번째 나무와 달리 제법 뿌리가 단단히 박힌 두 번째 나무를
뽑는 일이 수월치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뽑기는 뽑았습니다.
세 번째 관목을 뽑을 때는 두 팔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간신히 뽑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네 번째 나무를 뽑을 차례가 되었는데 제자는 두 팔로 나무를
끌어안고 죽을힘을 다해봤지만 이파리조차도 제대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치가 우리의 나쁜 버릇과 마찬가지란다.
습관이 아직 어린 나무와 같을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쉽게 뿌리뽑을 수 있지만,
그 습관이 오래되어 큰 나무처럼 될 때에는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여러분, 나쁜 습관은 어거스틴의 말처럼 폭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좀처럼 빠져 나오기 어려운 사슬이 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어려서부터 좋은 버릇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는, 거룩한 습관을 기르십시오!
거룩한 버릇은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고난받으며 마귀와의 싸움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전서의 중요한 주제는 이방계 기독교인들의 고난의 문제입니다.
이방 문화 속에 살다가 교회로 들어온 성도들이 이방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자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쓰여진 서신이 베드로 전서인 것입니다.

베드로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도 다함께 고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누군가 나와 함께 고난받고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어떤 부부가 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절이었기에 아내가 한국식당에서 일을 해 남편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설렁탕이 남아서 남편에게 주려고 가져왔습니다.
남편이 먹으려고 보니까 설렁탕에 담배꽁초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한동안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가 가여웠습니다.
만일 설렁탕에 담배꽁초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되면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 생각하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설렁탕을 남김없이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뜰로 나가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은 이 이야기를 자기 아내에게 오랫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이 일을 모르고 있다가 세월이 꽤 흐른 다음, 남편의 제자한테서 들었습니다.

여러분, 괴롭고 힘든 시절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누군가 내 아픔에 동참하여 함께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우리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겪고 있을 때 누군가 여러분과 같은 고난을 함께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함께 계실뿐더러 여러분을 돕는 이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깨어있고, 더불어 고난받기>
결론을 맺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드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와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함께 고난을 당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가족들,
이웃들도 함께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 있는 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함께
고난을 겪고 있는 한, 그 고난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이 바로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다같이 10절 말씀을 함께 읽으심으로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restore) 굳게 하시며(support) 강하게 하시며(strengthen)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establish)."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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