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따르는 자들의 권리(2) (마 9:14-17)

  • 잡초 잡초
  • 199
  • 0

첨부 1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의 역사에 하나의 분기점을 제공하였습니다. 역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History라는 말은 “그분의 이야기”라는 “His Story”란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역사를 표현하면서 사용하는 기원전과 기원후라는 말도 기원전을 나타내는 BC라는 말은 “주님 전에(Before Christ)”라는 의미이고, 기원후를 말하는 AD라는 말은 “우리 주님의 해에”라는 의미의 라틴말인 “Anno Domini”라는 말의 약자(略字)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역사의 등장은 우리 인류 사회에 커다란 분기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각 개인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새 사람(New Being), 혹은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우리의 모습은 옛사람(Old Be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도 새 사람과 옛 사람으로 나누게 하는 분기점의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우리 각 개인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분의 뒤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과 더불어, 우리의 삶의 현실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받은 바, 그 제자 됨의 권리를 예수님처럼 바르게 잘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실이 우리 모든 피조물들에게 있어서는 기쁘고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현장을 이미 신약성경을 통해서 접하여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통해서 이러한 복음의 활동을 눈으로 보고, 우리의 심령에 새겨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복음의 역사가 허락되어 있음을 믿고, 이 일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들로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믿음의 수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복음의 역사를 감당하고 계심을 마태가 우리들에게 특별히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계속 생각해보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8장부터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 중에서 특별히 10개를 선별하여 이러한 복음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을 고치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모습, 로마 백부장의 종의 중풍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활동,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을 아시고 이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문둥병과 중풍병 그리고 열병은 그 당시 사람들의 3대 고질병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질병을 고쳐주신 주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허약함을 치료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문둥병은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은 병으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율법의 이름으로 따돌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일반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소외된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로마 백부장의 종의 중풍병도 고쳐주시는 데에서 또한 발견됩니다. 로마 백부장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개나 돼지 취급받던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방인의 종이니 얼마나 낮고 천한 부류의 사람이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의 중풍병까지도 예수님은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외받고 낮고 천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는 또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장모는 그 당시 사람의 수에 치지도 않던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나약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율법적으로 민족적으로 계급적으로 그리고 성별에 있어서 소외되고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마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 사회에 열악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제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위하여 우리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과 더불어서 마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이러한 일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해서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4번째와 5번째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큰 광풍을 만나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떨면서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배 안에서 주무시다가 깨신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말씀으로 꾸짖었을 때, 잔잔하게 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은 풍랑까지도 잠잠케 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는 마귀의 권세까지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소개합니다. 가다라 지방의 무덤에서 살던 귀신들린 사람으로부터 그 귀신을 내쫓아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들어있던 귀신은 군대에서 말하는, 사단 병력의 많은 귀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러한 귀신들을 내쫓으심으로 이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역시 복음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사로잡는 모든 악한 세력에게서 우리를 고쳐주시고, 자유케 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권세까지도 능히 물리치시고 쫓아내시는 분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라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태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복음의 역사의 진수(essence)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해보겠습니다. “복음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는 “기쁜 소식”이란 내용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기쁜 소식이지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먼저 하신다”는 하나님의 선취적인 행위의 모습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어떤 요구나 바램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해 주시는 그 모습에 복음의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의 성격에 부응하여 일하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친구들이 메고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메고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는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 바로 이러한 복음의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중풍병자가 자기의 죄를 고하기도 전에, 이미, 먼저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취적인 행위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고 하시면서, 이러한 죄 사함의 모습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마태는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태는 하나님은 이러한 권세를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주셨음을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마 9:8의 말씀으로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귀한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권세를 자신의 권리로 행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권리를 자기를 높이거나 내세우는 모습으로 행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이러한 권리행사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리행사를 제자 된 우리들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자 됨의 권리를 자기를 높이거나 과시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는데 써야하는 그러한 권리행사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의 앞부분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또 다른 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권리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죄 사함의 권세를 죄인들을 향하여 의사의 심정으로 감당하는 것으로 권리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권리행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워할 수 있는 권리(The Right to Be Joyful)”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하고 묻는데서 시작됩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언제부터 이러한 금식을 시작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금식이라는 행위가 풍기는 모습은 어딘가 심각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자기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한다든지, 아니면 국가적인 변란이 있다든지, 어떤 뜻한 바가 있어 거기에 대한 결단을 한다든지 할 때 금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마 세례 요한도 그 당시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금식을 하며, 또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금식을 행할 것을 가르쳤으리라 봅니다. 세례 요한의 이러한 금식에 대한 자세와 가르침에는 아마도 그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을 감소시키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세례 요한처럼,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다른 경건한 사람들도 이렇게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금식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금식이 잘못된 행위라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문제의 본질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 이러한 금식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당시의 이러한 금식 프로그램에는 금식이 지닌 신학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러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행위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행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여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호의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일종의 인간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행동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조바심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인간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 소망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이점에서는 세례 요한과 같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세례 요한과 같은 메시지를 유대인들에게 던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과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예수님은 지니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마지막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작하고 계심을 알고 또 확신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 앞에서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는 모습에서인 것입니다.  친구들에 의해 침상에 누운 상태로 예수님 앞에 온 이 중풍병자는 그 당시 병든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그 마비상태가 치유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복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병든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구원의 사역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죄인들과 그저 먹고 마시는 그런 분으로만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11:19에서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고 조롱을 받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는 모습 속에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역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 계시지도 않고, 활동도 안 하시거나, 아니면 성미가 까다로우셔서 사람들이 잘 받들어야 활동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형편을 이미 아시고 활동을 먼저 시작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들에게 대답하신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깨닫고 이를 수행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새로운 시작을 유대교에 얽매여 있던 바리새인이나 심지어는 세례 요한까지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유대교라는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부대에 새 헝겊이나 새 포도주를 담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각은 오늘 본문의 경우에서는 새것과 옛것이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응답하는 오래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점에서 금식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사람들이 마땅히 응답해야만 하는 모습인 ‘기쁨’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이 말씀에서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앞에서 언급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부딪힌 모든 사건들에 대한 종합적인 입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고,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제하고, 남들이 금식할 때 축제 기분에 젖는다는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옛 것에 맞서서 새 것을 지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리고 옛 관습들은 뒤에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새 방법들을 찾을 때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들과 바리새인들은 모두 다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 일들을 찾아내어 기뻐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연약함이나 세상의 악들에 대하여 우울해 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잘못되거나 순수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가짐과 더불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의 암시들에 대해 무엇보다도 민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의 암시들을 발견하여, 여기서 소망의 근거를 찾고 현재 우리들의 모습에서 지녀야 할 자세를 고백적으로 성찰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정을 이미 아시고, 일하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의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제자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권리로 행사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을 우리는 의무감에서 소극적인 자세로서가 아니라, 권리로서 적극적인 마음가짐과 자세로 행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지녀야 할 권리 중의 또 하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고,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는 가운데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그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선언하시는 가운데 이러한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이러한 복의 자리에 우리 모두 설 수 있도록 하십시다. (노강국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