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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도 모르는 것들 (요 13: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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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가운데 지난 두 주일 동안 미국여행을 마치고 잘 돌아왔습니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디를 가도 집이 제일 좋고, 어디를 보아도 한국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 제가 가장 많이 가본 곳은 미국의 대학교입니다. 그 중에 인상적인 학교가 북 캘리포니아에 있는 명문대학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전쟁 때에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사람들의 기념비였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과 같이 미국에서도 ‘노블레스 오빌리제’를 이 학교의 학생들이 먼저 솔선 수범했던 것입니다. 전쟁은 목숨을 내놓는 일입니다.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 무서운 전쟁에서 아깝게 전사한 학생들의 이름이 돌판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한국 전쟁 때에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한국의 지금은 그들의 희생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제는 6.25 전쟁 기념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되새길 필요는 없지만, 전쟁의 무서움은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신문의 설문조사를 보니까 지금 젊은 세대가운데 3명중 1명은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생각하기도 싫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전쟁불감증의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학을 돌아보면서 또 하나 인상깊은 것이 학교 중앙에 위치한 아담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대학의 설립자가 어머니를 기념하여 지은 것이었습니다. 처음 대학을 설립할 때 그는 기독교인이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 돈을 벌어 인재를 키우는 일에, 후대를 위해, 쓰는 것이 가장 보람있음을 배운 것입니다. 그렇게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학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가이드가 말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인데 해마다 졸업식을 주일에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일예배 시간인 11시에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통이 되어 왔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공립학교가 주일에 졸업식을 한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캐나다의 학교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청교도의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에서 주일에 졸업식을 거행하고,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주일에, 그것도 예배 시간에 졸업식을 거행합니다. 우리가 미국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큰 이유도 없습니다. 알 것 같은데도 모르는 것이 미국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아는 것 같은데도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알 것 같은데도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 그것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말씀의 오묘함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 이후에 가룟유다의 배신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 말씀이 요한복음이라는 것에 아주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전체 21장에서 반 이상을 여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특히 13장부터 17장까지를 ‘다락방권면, 혹은 설교’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주님의 가장 큰 초점은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바로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들어 온 말씀이고, 대하면 대할수록 깊이와 오묘함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더 많이 알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주님께 계속해서 질문했고, 주님도 대답해 주셨고, 그래도 모르는 것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깊이, 신비, 능력, 오묘함, 바로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말씀의 오묘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말씀이 완전합니다. 말씀이 확실합니다. 말씀이 마음을 기쁘게 하고, 영원하고,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말씀이 오묘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오묘함을 알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듣고 알았던 말씀이 내 삶에서 더 큰 역사를 일으켜 참으로 오묘한 말씀의 위력과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1973년 5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가 열렸습니다. 미국에서 실무자가 한국에 왔고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날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소를 정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러 의견가운데 동대문운동장과 남산 음악당, 그리고 한강백사장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찾아낼 수 있는 가장 넓은 집회장소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여의도 광장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곳은 반대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광장만 조성되었지 부대시설이 없었습니다. 교통도 불편했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집회를 가져 본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광장이 너무 넓었습니다. 서울운동장에서 모이면 몇만 명이면 꽉 찹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집회라는 갈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의도 광장은 최소한 30만 이상이 모여야 모인 느낌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의도 광장의 어려움은 서울시가 선뜻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견은 거의 묵살 당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현장에 가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모두 여의도 광장에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여호수아서 1장 3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리고 손을 잡고 여의도 밟으면서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극적으로 허가가 되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던 날, 우리 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백만 명 이상이 광장에 모였습니다. 발바닥으로 밟은 곳을 하나님께서 모두 주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많이 듣고 보았지만, 그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알았고, 땅을 필요로하는 유대인에게 해당되고, 옛날에게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오묘함입니다. 우리가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을 현장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어떻게 역사 하는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제 겸손히 말씀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심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오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씀의 오묘함을 더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인간의 마음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배반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제자 중에 ‘똑똑한 사람’입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알만큼 안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며 거칠게 살 때, 그는 집에서 책을 뒤적이던 사람입니다. 그는 ‘분명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처럼 예의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급하거나 거칠지가 않았습니다. 사리를 잘 판단하고 아주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에게 회계라는 직임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제자를 신중하게 선택할 때 한 사람으로 선정된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3년 동안 함께 하면서 주님을 말없이 가까이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고,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아무도 그가 주님을 배신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고,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정과 삶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을 기쁨으로 삼고 주님을 따라간 자들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보고, 기적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평생 살겠다고 다짐하며 따라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주님을 배신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주님이 말씀 앞에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배신할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베드로만큼은 아닐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가 배신할 줄을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오래 사귀고, 오래 함께 하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평생을 살면 다 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압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제가 여행 중에 어떤 부부와 밤새도록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래 살았는데도 남편을 모르고, 아내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아는 것 같지만 모릅니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오직 인간을 아는 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뿐입니다.

  지하철의 광고 중에 북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과 큰 글씨로 ‘북어가 사람 속을 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 지난밤에 술 드신 분들에게 속 풀라고 권하는 북어 죽 광고였습니다. 자세히보면 이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북어도 사람 속을 알고 풀어주는데 사람은 속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속을 정말 잘 몰라서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자꾸 변하기에 더욱 모르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사용하는 말 가운데 ‘성인 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인아이란 일차적으로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 정서가 충족되지 못하고 상처받은 결과로 성인이 되어서도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자아를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아는 자아와 알지 못하는 자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자아가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불규칙 바운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유행가 가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점점 자기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얼마나 자기를 아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나를 알수록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나를 알수록 더욱 겸손해 집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더욱 겸손하고, 더욱 조심하고, 더욱 나를 깊이 돌아보고 알아가면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님의 사랑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배신을 말하고,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미 유다에 대한 주님의 용서는 세족식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신 주님께서 배신자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유다를 빼고 세족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유다는 그곳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든지 주님은 유다가 없는 상황에서 세족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대하는 우리도 이 거룩한 예식에 배신자와 같은 사람을 빠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어디를 보아도 세족식에서 유다가 빠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주님이 배신자의 발, 더럽고 추악한 그 발을 씻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족식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이 누구의 발부터 씻겼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주님의 이런 행동 앞에 선뜻 먼저 나서기가 힘들었던 그 때에, 주님은 누구의 발부터 씻겼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저는 유다부터 씻겼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가장 먼 곳에서, 가장 험한 곳에서부터 오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는 바로 주님을 사랑과 용서를 보여줍니다. 배신한 제자들, 실망시켰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실망시켰지만 다시 찾아오셨고, 배신했지만 만나주셨고, 손을 뿌리쳤지만 다시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용서입니다. 지금까지 알았지만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깊이 알아야 하고, 더 풍성히 체험해야 할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사랑이 결국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르고 참된 삶을 위하여, 험악한 세상 길에서 힘있게 살수 있는 삶의 용기와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여행 중에 다시 한번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엿보았습니다. 큰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갔지만, 그들의 삶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개인도 어렵고, 공동체도, 이민교회도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전부가 아닙니다. 환경이 좋은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늘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허전함으로 삽니다. 그들은 늘 두 개의 시계를 걸어놓고 삽니다. 하나는 현지의 시계, 다른 하나는 한국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들의 현주소요, 이민자의 삶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가 ‘이민자’입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힘든 것입니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사업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때에 위로와 힘은 오직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나를 강권하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강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로 하여금 눈물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그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행을 떠나기 전 ‘아직도 가야할 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 그리고 최선의 길입니다. 아직도 가야할 그 길에서, 아직도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오묘함이요, 인간의 속이요, 그리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더 많이 알고, 체험하면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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