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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의 축복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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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힘과 능력 >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의 어머니 최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최 권사님은 처녀 때 아주 신실하고 착했습니다. 그래서 한 노 전도사가 그녀가 마음이 들어 며느리로 삼으려고 했는데 최 권사님은 평생 독신으로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서원해서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졸라서 결국 결혼했는데 그렇게 해서 낳은 딸이 송명희 시인이었다고 합니다.

최 권사님이 과거에는 딸의 일로 가끔 탄식했다고 합니다. “내가 독신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지키지 않아서 딸이 그렇게 됐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 한 서원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자녀를 장애인으로 만드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 대로 바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처녀 때 신앙 좋은 순수한 처녀라면 한번쯤은 “하나님! 평생 독신으로 하나님만 섬기며 살래요!”라고 고백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다짐을 깨고 결혼을 했다고 하나님께서 자녀를 뇌성마비로 태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사람은 가끔 힘들면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그때 그래서 이 고난을 당하지.”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의 고난의 정확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죗값으로 돌리는 습관성 죄책감을 버려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고난과 약함은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한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항상 죄와 연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 자신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고난의 이유를 우리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난의 밤이 지나면 광명한 새벽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면 우리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용서의 힘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용서받은 존재이고, 용서받은 존재로서 누군가를 용서하며 산다면 우리는 사단 마귀가 건드릴 수도 없고 공략할 수도 없는 무적의 영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용서의 능력을 체험하면 지금 정신병원에 있는 상당수의 환자들은 즉각 퇴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암 종류만 250가지로 손톱과 발톱과 머리카락 외에는 다 암에 걸릴 확률이 있다고 합니다. 왜 암이 생깁니까? 유전적 요인도 있고, 음식이나 환경이 나쁜 것도 원인이 되지만 가장 큰 암 발생의 원인은 절망과 스트레스와 미움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보통 하루에 3백 개의 암세포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안과 기쁨을 가지고 사는 정상적인 몸은 그 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과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그 응어리가 암세포를 암 덩어리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용서와 위로를 생각하며 원수조차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 용서의 능력을 얻는 길 >

사람은 용서받을 때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사랑과 용서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장면을 통해서 용서의 능력을 얻는 길을 4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 5절까지를 한번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본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제일 처음 내세운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그 율법을 최고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사실상 큰 의미에서 율법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몰입하면 용서의 확신도 얻을 수 없고,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의 이중 잣대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면 남녀를 같이 잡아 돌로 쳐 죽이게 되어있는데, 남자는 보내고 여자만 붙잡아온 모습을 보십시오. 이렇게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남을 얽어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내세워 살기보다는 차원 높은 은혜의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내세우면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체험할 길이 없습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산속의 기도원으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저녁때, 한 학생이 화장실이 가려고 하는데 화장실이 밖에 으슥한 곳에 있어 무서워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요!” “뭐가 무서워!” “귀신이 나올 것 같아요.”

그 얘기를 듣고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너 하나님 믿어? 안 믿어?” “믿어요!” “그런데도 귀신을 무서워해! 하나님이 귀신보다 강하잖아! 그리고 이곳 기도원에서는 귀신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거야! 그러니까 혼자 갔다 와!” 결국 그 학생은 혼자 벌벌 떨면서 화장실에 갔다 왔습니다.

이 선생님의 얘기는 지식적으로는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어린 학생에게는 그 상황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손을 잡고 화장실까지 따라가 주는 것입니다. 율법적 지식은 사람을 거의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질 것입니다. 사업의 축복, 자녀의 축복, 교회 부흥의 축복도 우리도 노력은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주어집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까? 공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 보면 율법보다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집니다.

2. 침묵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군중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성난 군중들에게 그저 침묵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때로 우리들의 삶에서는 이와 같은 침묵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침묵이 큰 소리보다 더욱 큰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감이 없을수록 소리가 높아지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가끔 기도할 때 “믿~쉽니다!”라고 크게 소리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믿음이 있어서 소리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소리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큰 믿음의 표현이 되고, 더 큰 호소력을 가지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 중국 노나라에 중형으로 다리를 잘린 왕태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나고 평판이 좋아 그 문하생이 공자의 문하생만큼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의 제자 상계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불구자인 왕태 선생님은 겉모습은 비천해 보이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사모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도 움직이지 않는 그분의 마음의 고요함 때문이네.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흐르는 물이 아닌 정지된 물에 비추어보는 것처럼 왕태 선생의 잔잔하고 순전한 마음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되니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네.” 그 대화에서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성도의 삶은 명경지수의 삶입니다. 종교인은 대개 분주하고 소란하지만 성도는 대개 소리 없이 기도하고 봉사하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항상 입보다 귀를 높이고, 말보다 행동을 더 많이 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 중에 침묵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추운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 생명이 없는 것 같지만 강한 생명력이 그 뿌리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겨울 동안 그 생명은 속으로 더 깊어지고 강해지다가 봄이 오면 그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들은 인생의 겨울을 잘 보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겨울은 춥고 힘들지만 꼭 있어야 하는 계절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겨울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겨울의 길이는 짧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욕을 당해도 축복한다”고 했습니다(고전 4:12). 우리가 그런 신앙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면 곧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주어질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개인적으로 돕는 한 분으로부터 급하다고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는 모습을 알면서 어떻게 내게까지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를 할까?” 그러나 너무 어렵게 사는 분이었기 때문에 “하도 다급하니까 나 같은 목회자에게까지 손을 빌렸겠지.”라고 생각하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대출받아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점차 그 사람에 대한 미운 마음이 들고, 그 생각만 하면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어려운 선교지에 교회 하나라도 세우는데 보탬이라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하니까 더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의 상한 마음을 아셨는지 며칠 전에 책을 통해 제가 당한 경우와 유사한 한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멀리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사모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급하다고 돈을 빌려간 한 친구가 돈을 갚을 수 없다는 연락을 했다는 전화였습니다. 그 돈은 목사님에게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목사님은 분노가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집회에서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할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곧 그 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상처와 좌절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곧 주님의 평안과 위로가 하늘로부터 임하고,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몰입하자 갑자기 모든 분노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고, 그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곧 목사님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회장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누군가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목사님 손에 수표 한 장을 꼭 쥐어줬습니다. “목사님! 요새 월세 내기도 어렵지요? 전세라도 얻으세요.” 나중에 보니 그 돈은 친구에게 빌려준 돈의 10배였습니다.

그날 밤, 그 목사님은 잠자리에 누워서 자기를 부인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속였던 그 형제의 축복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형제는 축복을 위해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바로 그때,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한 “욕을 당해도 축복한다!”는 말씀이 깊이 체험되었다고 합니다.

그 글을 읽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선교사님을 위해 썼다고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자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그 형제에 대해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고, 곧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신기한 평화가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늘나라의 기본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난을 믿음으로 묵묵히 잘 견디면 고난보다 훨씬 더 큰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하나님은 적은 것을 잠시 손해 보게 하시고, 더 크고 영광스러운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참고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될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할 때입니다. 옛날에는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못 참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더 넉넉한 마음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믿음이 커졌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참기 힘들 때 참으면 용서의 능력은 커지고, 곧 사단은 물러가고 천사가 다가와 우리를 수종 들 것입니다.

3.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고,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먼저 살피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에는 대단히 분개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보는 만큼 나의 잘못을 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남을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잘 아는 것처럼 판단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모습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우리가 모르는 장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모들 보기에는 자녀가 항상 부족해 보이지만 자녀에게도 부모가 모르는 장점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앞날에 대해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꾸준히 기도하면 자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랄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첫 딸 은혜에 대해서 염려가 많았습니다. 겁이 많고,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얼마나 잘 우는지 가끔 은혜 모습을 보면 “저 아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나?”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는데도 요새도 혼자 집에 있지를 못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무서워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에게도 담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놀이 기구 탈 때는 얼마나 담대한지 모릅니다. 놀이시설 가면 웬만한 어른들도 자이로드롭이나 자이로 스윙을 타지 못합니다. 순식간에 몇 십 미터 상공에서 내려오는데 공포 자체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눈 뜨고 탑니다. 바이킹에서 제일 공포감을 주는 곳이 제일 뒷좌석입니다. 그 끝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은 공포에 젖어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를 때 은혜는 머리 흐트러진다고 태연하게 머리 만지고 있습니다.

그런 은혜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정말 모르는 구나! 그런 대로 험한 세상에서도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처럼 누구에게나 부족한 점도 있지만 잘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100명의 재벌들에게 “왜 재벌이 될 수 있었느냐? 성공요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대답이 많았던 것이 “인간관계에서 장점만을 보고 말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칭찬을 많이 하고, 감칠맛 나는 말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사업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허물보다 남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의 능력도 커지고 성공 가능성도 커질 것입니다.

4.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이 여인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주님과 이 여인이 단 둘이 만났을 때 이 여인은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공중 석상에서는 다른 여자는 물론 심지어 딸이나 아내와도 대화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보면 안 된다고 여자가 보일 때 눈을 감고 지나가다가 돌부리에 부딪쳐 넘어지는 랍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문화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성과 대화하는 장면은 무수한 오해와 비판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깊은 만남과 대화로 그 여인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루면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예수님이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여자의 간음죄는 상습적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그런 상습적인 죄인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질 때 우리는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체험하고 더욱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지만 주님은 사랑을 던졌습니다. 결국 그 사랑과 용서가 이 여인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다른 사람은 살리는 길이고, 나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치료약은 주님과의 만남에서 얻은 사랑과 용서라는 약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무섭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비판하면 대개 어둠이 계속되지만 사랑하면 곧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 지식보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

요즘 지식의 중요성이 첨차 강조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최고로 방문자가 많은 곳이 지식 검색을 하는 사이트입니다. 요즘 성공의 제일 요소는 지식과 정보입니다. 지식과 정보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폐해도 많습니다. 가장 큰 폐해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많습니까?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착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지식이 없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리가 성도로 살면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 이래로 사단이 인간을 꾀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된다고 인간을 속였습니다. 그 속임수에 아담과 하와는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담이 속았던 그 속임수에 다시는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교만은 “나는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교만한 생각은 반드시 패망을 낳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최고의 고백은 “저는 잘 몰라요! 그러나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지식을 내세워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람은 사실상 가장 무식한 사람이고, 사랑을 내세워 누군가를 품에 안는 사람은 사실상 가장 유식한 사람입니다. 물론 지식이 많은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지식을 최고의 지식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사랑이 없는 지식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무식입니다. 지식을 앞세우면 문제는 끊임없이 생기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문제는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생기는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지식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해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천재 과학자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사랑의 의미를 모르면서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이 교회를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식보다 더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살리는 힘입니다.

일전에 7살 난 아들과 5살짜리 딸을 가진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들이 놀러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7살 아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응급수술을 받던 중 급히 피가 필요했는데, 아들과 같은 AB형의 혈액형은 딸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한 아빠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빠가 급히 피가 필요한데 네 피를 좀 줄 수 없겠니?”

5살 딸이 눈물을 머금고 곧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에 아빠가 침대에 누운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어린 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빠! 저는 언제쯤 죽어요?” 알고 보니까 이 어린 딸은 자기가 피를 뽑으면 죽는 줄 알면서도 오빠에게 피를 준 것입니다.

비록 이 어린 딸은 지식은 부족했지만 오빠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식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 중의 누구 한 사람이라도 사랑의 피를 뽑아주면 우리 선교회의 사역도 힘 있게 펼칠 수 있게 될 것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선교사님들의 눈물도 닦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피를 뽑으면 죽는 줄 압니다. “나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남까지 생각하고, 우리 교회도 유지하기 빠듯한데 어떻게 선교까지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피를 뽑는 심정으로 호주머니를 비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 소중한 일을 위해 나의 소중한 것을 양보하고 양위할 때 반드시 더 크고 소중한 것으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이 여인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철저히 회개한 후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납니다. 그처럼 주님 안에서는 어떤 고난과 더러움과 불결함도 빛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빛을 받고 돌을 던지기보다는 사랑을 던질 때,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 우리 앞에는 놀라운 신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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