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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인생의 사명을 다시 보자 (행 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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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의 무덤

어제는 6.25 사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5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전방 연천 G.P.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으로 희생된 8명의 장병들 합동 영결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 5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광주의 시민들을 총으로 학살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 같은 동족들, 동료들끼리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세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깊은 아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밖에 있는 적을 향하는 열정을 갖지 않으면 항상 내부의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교회 안에서 갈등과 반목과 분열이 일어나고 지나친 자기중심적 주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면서 자아를 향한 에고의 무덤을 파게 되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에게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둘 다 혼인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아들과 딸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L.A.에서 살고 있는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딸과 사위가 어머니를 반겨주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밀린 얘기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깜짝 놀랄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가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아껴주는 사위가 대견스럽게만 보였습니다.

다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갔습니다.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반겨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꼴도 안 보이고, 금이야 옥이야 받들어 키워서 미국 유학까지 시켰던 아들이, 궁상맞게 제 손으로 아침을 지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한없이 측은하고, 한편 며느리가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남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 어머니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는 잣대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동일한 행동을 보면서 자기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내가 차에 타고 있을 때는 횡단보도를 늦게 건너는 행인을 욕하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빵빵대는 운전사를 욕합니다.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 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 운전입니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합니다.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는 짓이고, 내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주장이 뚜렷해서입니다. 남이 민소매를 입으면 “그래, 다 벗어라, 벗어.” 하고, 내가 민소매를 입으면 “어때, 시원해 보이지?” 합니다. 남이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고, 내가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일입니다. 남이 술잔을 돌리면 위생 관념이 없는 짓이고, 내가 술잔을 돌리면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왜 이러한 불합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현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주관성이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기중심성이 결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곧 자기중심적 주관성, 이것이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두 남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 자기중심적 주관성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첫날 사위의 행동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다음날 아들의 행동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을 어느 정도 양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며느리가 괘씸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전날 사위의 행동을 보고나서는 딸이 편안하게 늦잠을 자는 것에 대해 흡족한 마음을 가졌던 겁니다. 그래 놓고서 바로 다음날 며느리가 괘씸하게 생각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 주관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닙니다. 하나는 그 자체가 추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 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했는데 괘씸한 마음이 올라왔다는 것이, 바로 힘든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게 모순입니다. 자기중심성이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인데, 그게 엉뚱하게 자기를 힘들게 하니 말입니다. 이중 잣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 했습니다. 그것의 뿌리가 자기중심적 주관성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동일한 잣대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자기중심성을 <에고:자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완전히 자아를 비우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다만 좀 가벼워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자아가 강하고 무거운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가 약하고 가벼운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하나님이 약해지고, 하나님이 강해지면 자아가 약해지는 겁니다. 마치 시소 현상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으로 기운 상태가 많은 사람이 있고, 자아 쪽으로 기운 상태가 많은 사람이 있는데 평생을 자아 쪽으로 기운 시소를 타고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더러 자아 쪽으로 기울 때가 있더라도, 가급적 하나님 쪽으로 기울 때가 많은 시소를 타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른 인생이란, 번갈아 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소게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쪽으로 기운 시소를 타고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가 한결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마치 보채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면 편안해지듯 말입니다.

어떤 남자가 스승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자기는 부인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아름답고 다른 한 명은 못생겼는데 문제는 아름다운 부인은 싫어하고 못생긴 부인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자기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 때 추함이 생겨난다. 너의 아름다운 아내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이는 추해졌다. 반면에 너의 못생긴 아내는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이는 그냥 겸손하게 살 것이다. 그 겸손이 그이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래서 너는 아름다운 아내보다 못생긴 아내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이 말은 우리에게 귀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아름답다는 자의식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교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교만은 추합니다. 이 남자의 아름다운 부인에게는 아름답다는 에고가 한껏 커져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에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에고가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에고란 그 자체로 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못생긴 부인은 자신의 추함을 의식하며 겸손해졌을 겁니다. 겸손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아름답다는 에고가 없습니다. 에고가 없는 겸손으로 그이는 한껏 아름다워졌을 겁니다.

이러한 자의식, 에고는 자신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에고를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에고적 자의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판단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판단하는 자기 생각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생각입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판단하면서 그는 나쁜 사람이고, 죄인이고, 틀려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시던가요? 중심은 다만 하나일 뿐입니다. 두 개의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개의 중심"이란 "네모난 원"이라는 말과 같이 성립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든지, 아니면 판단하는 생각이 중심이 되든지, 양자택일일 뿐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든지, 선악과를 먹든지 하나만 먹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나를 찾아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

그리고는 이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고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겠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아니 별로 생각해 보지 않고 그냥들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놓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야, 나는 이러 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옳고, 내가 하는 일은 잘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특별히 종교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정말 바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큰 확신을 가지지 않고 행동하는데 실상은 이단과 사이비에 있는 사람들이 더 확신을 가지고 더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확신은 옳은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은 바른 것입니까?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

사울은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는 1절에 나오는 말씀에 거의 드러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한마디로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여전히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다메섹에 올 때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계속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과 살인의 욕망으로 대하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알고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아주 중요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자존심도 다 버리고 그 일을 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정을 하여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권리의 공문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사울이었지만 그의 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속은 많은 갈등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22:10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사울에 대해서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그 일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양심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속에서는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육체적인 괴로움보다 큰 것은 양심의 괴로움 곧 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 길 하는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통 소나 말은 적을 공격할 때 뒷발길질을 합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공격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시 채를 뒷발길질한다면 자신만 괴로운 것입니다.

6장에서 사울은 스데반의 변론을 들었는데 그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살아계신 주 예수를 본다고 선언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고 그 모습만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양심과 싸우며 부분적으로 순수한 열정으로 부분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확신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행동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그 일에 빠지게 합니까? 어떤 괴로움을 어떤 확신을 지워버리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일은을 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실상 자신의 양심만을 괴롭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은 그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런 파멸로 가는 사울을 예수님은 만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예수님

사울에게 그런 갈등이 있을수록 살기가 더욱 등등하여 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날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를 좇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그렇게 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의 다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가 전혀 기대치 않은, 생각하지 않은 빛에 둘러싸이게 된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빛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빛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전혀 기대하지 않은 빛이 그를 갑자기 둘러쌓습니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환경에 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빛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당당하고 살기가 등등한 사울도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출 때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빛 앞에 내 뜻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빛도 놀라운데 그에게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며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곧 바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영적인 사람이었기에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했다면 예수와 그를 따르는 예수쟁이들 밖에는 핍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더 놀랍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던 그 많은 일들, 그리고 바쳤던 많은 시간들, 그 많은 정성들 그것이 곧 이 땅에서 예수를 없애려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은 바울은 기절초풍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행동, 선하다고 하는 행동, 나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 그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바른 길을 간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성자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거짓이라고 알았던 것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라고 알았던 것이 거짓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만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울이 그 진실을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거짓이 깨지고 하나님 안에 진실을 좇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새 길,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던 길에서 하나님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돌이키는 역사가 우리 삶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작은 한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곧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더 나가서는 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끌려 다니는 삶

혼자서 당당하게 잘 살아가던 사울, 이제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빛을 보아서 소경이 되었지만 실상은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볼 것을 제대로 못보고 살았던 사울이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핍박했고 믿고 따라야 할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고통케 하는 일이었고 자신을 고통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려던 목적지 다메섹을 혼자 가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갔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한 자의 삶입니다. 내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깨어난 자로서의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 삶이 바뀌는 경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진정 나를 찾아서 사는 삶이 되었고 진정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었지만 그런 나는 죽고 진정한 주인인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가 아름다워 보여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게 되면 그 인생은 평생을 노력해도 2류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분야이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분야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 다 자신의 위치에 알맞게 목적에 맞게 지으셨기에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공 여부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늘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사명과 믿음은 같이 갑니다. 믿음은 평생 사명을 구체화할 수 있는 통로와 같습니다. 사명자가 분명한 비전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것을 신념으로 삼지 않으면 창조적인 힘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시 보게 하는 예수

주님은 사울이 머물고 있는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유대인답게 율법에 있어서 흠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행 22:12). 아마 그가 주의 은혜를 입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이르기를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행 9:10-11). 사울도 지금 환상을 받고,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행 9:12).

이때 아나니아는 놀라면서 주께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지금 다메섹에 온 것도 기독교 신자를 체포할 공문을 받아 가지고 와서 머물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행 9:13-14). 그때 주님은 다시 아나니아에게 이르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행 9:15-16).

그후에 즉시 아나니아는 다메섹 직가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을 찾았고, 거기서 눈을 못 뜨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며, 그 집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나니아 자신에게 나타난 일을 알려주고,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행 9:17). 그 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 시간에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9:18).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 “주께서 너를 다시 보게 하신다.”라고 하였는데 여기 다시 보게 한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행 9:12, 17, 18). 그는 이 후에 자기의 동족들 앞에서 변명할 때 “사울아 다시 보라”하던 이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행 22:13). 주께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사울을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울을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침내 그는 영육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다시 보는 인생

“사울아 다시 보라”(행 22:13) 하던 아나니아의 음성은 주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게 명하신 대언(代言)입니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그 눈의 기능이 중단되어 버린 그의 시신경의 회복(복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의 눈의 기능이 되살아났습니다. 주님은 그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전에 선수적으로 먼저 그를 체포하시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와 살아있는 인격적 음성으로 그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살아 계신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입에서 나오는 그의 전도에는 언제나 부활의 복음, 부활의 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된 자신.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보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자신을 보았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더 나아가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을 보았고,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보았고, 주 앞에 서는 그날 그때에, 주께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미래 인생의 극치를 바라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주안에 있는 자신, 자기 실존을 본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적 재인식을 의미합니다.

자기 인생의 사명을 다시 보라는 의미

그가 주의 광채 앞에 눈이 어두워 길바닥에 엎드러져 있을 때, 이미 그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왜 왔는가? 무엇 하러 왔는가? 하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보라! 그것은 어둠에서 광명이고 육에서 영이고 사망에서 생명입니다. 그것은 새 미래를 향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향한 거듭남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소망입니다. 그것은 재생이고 재기입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새 용기입니다. 그것은 새 출발입니다. 그것은 새 시작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기원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받는 비전(vision)입니다.

사람은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힘이 있을 때 거드름거리며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힘이 있을 때, 돈이 있을 때, 권력이 주어졌을 바로 그때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인간을 재는 잣대는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하여 겸손하여서 주님의 그릇이 되어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이 되었듯이 사람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을 빛을 받아 변화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한가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일할 시간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을 일으키며, 열정은 평생 사명을 달성하게 해줍니다. 사명자의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를 때 하나님은 그것을 성취의 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와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원의 열정입니다. 성령도 불처럼 역사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빛은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초점이 흩어진 빛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맑은 날,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한군데 집중시키면 종이를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태양 빛이라도 집중되지 않으면 종이를 태울 수 없습니다.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낀 사람은 시야가 어지러워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점이 분명한 안경을 끼면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지면 이탈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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