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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방법 (삼하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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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종종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20장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나오게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은 하나님이 대단히 관대하시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 하신다고 할 만큼 진노하시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분명 모세는 120세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음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바위에게 명하라고 한 것이나 지팡이로 친 것이나 무엇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더 큰 실수도 하지 않습니까?

분명 처음에는 출17장에서 “너는 반석을 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명하라고 하시고는 치자 진노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고전10: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반석이 누구라고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물은 신령한 음료랍니다. 신령한 음료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장39절에는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왜 하나님이 첫번째는 치라고 하셨고 두 번째는 명하라고 하셨습니까? 바위가 갈라지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명하지 않고 바위를 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고 정식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다윗 성을 짓고 생각하니 잊혀졌던 법궤를 모셔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국가적인 행사로 3만명을 모아서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오려 합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온 백성이 참여하는 행사였는데, 그만 그 새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소가 뛰므로 법궤가 떨어지려 하니까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댑니다.

그러자 웃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도대체 웃사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무서워서 어떻게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오히려 잘 한일 아닙니까? 일부러 손을 댄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진노를 받았습니다.

오늘 내 일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그들의 잘못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분명히 민수기 4장에는 고핫 자손들에게 어깨에 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메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메라고 했는데 왜 싣고 왔습니까? 편리주의 때문입니다.

메는 것 보다 싣고 다니면 훨씬 편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편리주의가 성전을 매매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때로 편리함 때문에 하나님의 일들을 그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편리함 때문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이 수레에 싣고 왔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전통 때문입니다.

삼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제안을 합니다.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하자 그러면 이길 것이다.’ 모두 다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실로에서 법궤를 모셔오고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구약시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내가 믿는 신이 강하냐, 네가 믿는 신이 강하냐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법궤를 빼앗았습니다.

블레셋에서는 우리의 다곤신이 강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별 것 아니다. 축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그들의 신을 모신 다곤신전에 나란히 모셔놨습니다.

다음날 아침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곤신이 머리가 떨어져서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불길하게 생각하면서도 머리를 도로 올려 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머리뿐 아니라 팔과 다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아스돗에 독종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분명 이스라엘의 법궤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드라는 곳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동일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에그론 사람들이 법궤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안을 합니다. 법궤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갓 뗀 암소 두 마리로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러면서 만일 수레가 곧장 가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곧장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결정합니다.(동전결정)

그런데 수레가 곧장 벧세메스로 향하여 갑니다.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 다 보므로 오만 칠십명이 죽게됩니다.(삼상6:19)

왜냐하면 민수기 4장 20절에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지막 법궤를 옮겨오는 것을 본 것은 수레에 싣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것은 적어도 7.80년후의 일입니다.

마지막 법궤 운반의 모습이 수레에 싣고 왔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나?를 생각했더라면 문제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윗 역시 아무런 생각없이 전통대로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합니다.(성전건축)
 

두 번째 잘못은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무엇이 잘못입니까? 민수기 4장15절에 만지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내가 판단하면 안됩니다. 만지지 말라면 나는 만지지 않으면 됩니다.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은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만지지 말라는 말씀만 지키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왜 만졌을까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1)      롯의아내와 사위들à 농담으로 여김

예2)      하와의 유혹 à 정녕 죽으리라(창2:17)--- 죽을까 하노라(창3:3)

예3)      나아만 장군 à “내생각에는”
 

세 번째로, 오벧에돔의 축복입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복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죽고 다윗이 화를 내고 예루살렘으로 가버렸는데 그중에도 복을 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어떻게 갔다고요?  “메어간지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방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오벧에돔과 같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황 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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