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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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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화의 한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다면 '스피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전세계를 접속하여 온 세계의 인포메이션을 한순간에 공유할 수 있는 시대 속에 살고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은 좀더 편리해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딜레마는 이 편리함이 우리의 삶의 바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우리들의 이 바빠짐이 삶의 의미를 더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로 인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고 있지만,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체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불란서의 철학자이면서 에세이 작가인 삐에로 쌍소란 사람이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느림과 신속함이 벌리는 열띤 공방전의 세상에서 속도가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현대문화를 스스로 기소하는 검사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느리다는 것을 게으름으로 정죄할지 모르지만 이 저자는 오히려 "느림이 미덕일 수 있다" 라고 오히려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느림이 한 사람을 관찰할 때, 우리가 하나의 환경을 분석할 때, 하나의 사건을 들어다 볼 때 객관적인 안목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감동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자는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최근에 목격해 본적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속도 문화의 가장 크다란 비극이 있다면 "안식의 상실"이라고 지적합니다.  반대로 현대문화의 구원이 있다면 안식을 회복하는데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드물게 보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개척하러 와서 참으로 긴박하고 바쁜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배부른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집 사람과 결혼하고 지금까지 휴가라는 휴가를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바쁨은 저 혼자만의 바쁨은 아닐 것입니다.  30대와 40대 초반인 우리 모두가 좀더 안정적인 내일을 위해 오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단없는 기차처럼 심호흡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근간에 와서 저는 안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안식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안식은 우리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름철입니다.  여름철에 짤막한 휴가를 계획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학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안식, 휴가"하면, 팔자 좋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에게 무슨 안식의 여유가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야만 안식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오랜 시간을 가져도 안식하지 못할 수가 있고, 짧은 시간을 가져도 질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안식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늘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사무실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 들어가 흙을 만지며 땀을 흘리고 노동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을 내어서 커튼을 닫고 조용히 책을 읽고 열중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안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안식을 처음으로 만드시고 우리들에게 안식이 필요하다고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 필요 없는 유일하신 분이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그는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분은 쉬셨을까요?  여기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왜 쉬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피곤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1절과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쉬셨던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의 동사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그 다음에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에 보면 "다 이루니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 지으시던 일이 다했기 때문에 그분이 쉬셨다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분은 창조의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치셨다는 말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창조하신 만물을 돌봐야 하는 엄청난 섭리의 사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시간을 멈추시고 쉬신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창세기 1장을 들여다보면 그 대답을 쉽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창조의 과정이 마무리 될 때마다 또 다음날에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한 날의 창조를 마무리하면서 그 소감을 매우 인상 깊은 한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창세기 1장에, 가령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보신 하나님의 소감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좋았다"  히브리어로 좋았다는 단어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격을 담아서 말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지나간 엿새동안의 창조를 돌이켜보며 그것을 즐거워하는 시간이셨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자축의 시간이었다 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감사의 시간일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일한 결과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여유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예외 없이 지나치게 바쁘고 서둘러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쫓겨가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에 설득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지적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 혹은 기능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시간이 생산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가치관 중에는 심미적 가치관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솜씨와 창조를 바라보는 여유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 앞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와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 엄청난 홍해바다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습니까?
"그만 가만히 있으라! 당황해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라고 모세는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서두르는 제자들에게 잠시 길을 멈출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좀 바라보라!"
전도 갔다가 돌아와서 서둘러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잠시 중단하자고, 먼저 가서 쉬자고 제안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리고 이미 역사하신 그분의 역사하심을 좀 생각해보라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생각으로 바라보면 이 바라봄 속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거기서 찬양이 나옵니다.  바라보면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배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게 쫓기다 보면 우리는 늘 신경질 나는 삶의 반응을 보이기가 쉽습니다.  여유 있게 다시 돌아볼 수 있었던 나의 삶의 적조, 때로는 불평했지만, 때로는 안타까워했지만, 때로는 원망했지만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 삶의 발자국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준 아내가 감사하고, 말없이 함께 기도로 같이해 준 기도의 동역자들이 감사하고, 교회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 마음에 버거움을 가져다주었던 사람들까지도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회복된 감사의 마음, 이것은 안식을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안식에 관한 놀라운 성경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서 4장 10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안식 속에 들어가 있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래서 인생의 장에서는 잠시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8월 1일부터 남해 거제도에서 전교인 수양회를 갖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예배 후에 운영위원회를 하면서 이번에는 특별히 가족들만의 시간을 주도록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과의 깊은 사랑의 시간, 감사의 시간, 안식의 시간을 가져 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무더운 여름의 계절, 여러분들에게 과거를 돌이켜보는, 그리고 예배를 회복하는, 감사를 회복하는 이런 안식의 여유가 주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안식이라는 것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안식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피곤함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식이 우리에게 피곤함에서의 회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에너지의 소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소모되면 일단 그 에너지가 보충되지 않고는 우리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을 계획할 때 그 안식이 우리의 육체적인 회복에, 또 정서적인 회복에, 또 우리의 영적인 회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안식인 것인가를 먼저 고려하고 물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안식일을 허락하셨을 때 그 안식일의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과거를 돌아보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안식이란 날을 구별하신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의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축복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여기서 구별하다는 뜻이 더 합당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을 재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날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 축복되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그 분은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을 계획하실 때 반드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런 안식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축복된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중세기의 수도사들은 수도하는데 힘들다가 안식년을 맞이하면 더 깊은 광야, 더 메마른 사막으로 나가서 안식년을 가졌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예배와 기도에 전념하면서 그들은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식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서 광야에 가서 수도해야 한다고 여러분에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의 계획이 무엇이든 그것이 나를 거룩하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나를 건강하게 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나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휴식의 계획을 가져야 합니다.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건강한 놀이가 건강한 안식을 가져다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놀이를 정죄하는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는 옛부터 놀이를 정죄했기 때문에 놀이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놀이문화라는 것이 고작해야 긁고, 쪼는 것입니다.  즉석복권을 긁고, 화투를 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 있어서 아마도 한국 부모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 단어일 것입니다.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공부해!"
또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놀지마!"
그러나 현대의 교육학은 놀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학습입니다.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된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 시온의 거리, 천국의 거리를 8장 5절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치리라"
천국은 천진난만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장난치고 있는 거리라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놀이는 죄악이 아닙니다.  건강한 놀이는 우리의 여가와 우리의 안식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볼링이 기독교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볼링 교과서를 보면 1페이지에 볼링의 시조가 마르틴 루터 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래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다가 잠시 쉼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 공놀이를 하던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놀이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건강하지 못한 놀이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놀이가 끝난 후에 힘을 얻기보다 내가 더 지쳐야 한다면,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놀이를 생각한다면 나는 놀이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놀이가 나의 인생에 활력을 더해줄 수가 있다면 육체적이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놀이도 안식의 한 방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선진국일수록 놀이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놀이 문화가 발달한 교회가 부흥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꼭 놀이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훌륭한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에 가면 떼제 공동체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 유럽의 영성은 깊은 밤이고, 어둠입니다.  그런데 떼제의 언덕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넘쳐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데도 너무 조용하다는 겁니다.  한국의 기도원하고 전혀 다른 풍토입니다.  그리고 신선한 평화가 있습니다.  떼제 수련원 공동체의 곳곳에서는 작은 팻말들이 계속 붙어있습니다.  그 팻말은 영어로, 독일어로, 혹은 불어로 Silence라는 간판이 쓰여있습니다.  침묵! 침묵! 침묵!  거기에 오직 한가지의 규칙을 요구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 동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가 다 침묵하는 것입니다.  별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이따금씩 수사들이 인도하는 찬양시간에만 단순한 찬양을 부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며칠을 지나고 나면 그들이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새로워져서 그들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따금씩 아플 때 무엇을 합니까?  아프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치료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음, 그것이 나쁜게 아닙니다.  우리는 일부러 그런 시간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7절에 보면, 하나님도 안식하시고 안식을 통해서 얻으신 하나님의 경험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그런데 영어 성경에서 보면 이런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쉬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로워지셨다."
하나님도 안식을 통해서 새로워 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안식의 필요가 있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 안식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안식은 곤고한 나의 현재를 새롭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일부러라도 안식의 가치를 발견하고 안식을 찾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은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합니다.

세 번째로 안식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결코 안식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안식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쉬셨다! 그리고 성경은 창세기 2장 3절로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에 다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가 창조한 만물을 돌아보시고 인생을 돌아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의 위대한 섭리를 안식의 순간을 통해서 더욱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안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식의 또 하나의 의미요 축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은 결코 낭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안식을 가리켜서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괄호라고 했습니다.  글쓰다가 괄호. 잠시의 쉼.  그러나 그 쉼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같은 저자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류의 문화의 발전은 뜨거운 폭염에 태양이 내려 쪼이는 노동의 현장에서만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오는 날의 동굴 속이야말로 문화의 산실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비오는 날의 동굴 속을 생각해 보십시오.  펑펑 비가 쏟아지는 날, 옛날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그냥 앉아서 비오는 것을 쳐다보는 겁니다.  그러나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 아이디어, 그 생각 속에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야말로 문화의 불꽃, 창조의 불꽃이었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보다 건강한 미래를 만들지 못합니까?  생각없이 서두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가 겪고있는 커다란 진통과 아픔은 무엇 때문입니까?  졸속 때문입니다.  서두름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서두르고, 그리고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있는 것이 아닙니까?  쉬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어갈 수 없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특별히 우리 한국인들이 더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본래 한국인들이 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라고 말합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밥을 짓던 모습을 보면 오랜 시간동안 밥을 만들고 뜸을 들이고 온기를 피워내고 아랫목에 밥그릇을 조용히 묻어두고 가족 식구들이 마침내 식탁에서 나누는 교제의 시간들을 우리는 회상해볼 수가 있습니다.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씨가 쓴 글에 보면,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바빠졌느냐?  라면이 나온 때부터 바빠졌다 라고 합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가 출현한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라면은 일본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라면의 종류를 다양화시킨 것은 한국처럼 발달된 나라가 없다라고 합니다.
보면 숫자마다 라면을 다 만들어 냈습니다.
일, 일번지 라면.  이, 이백냥라면.  삼, 삼양라면.  사, 사발면.  사천짜장도 있습니다.  오, 오뚜기 라면.  육, 육개장.  칠, 칠보면.  팔, 팔도라면.  구, 구운면.  열, 열 라면.  열 라면은 드시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열 받습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너무 급해지고 있습니다.  너무 여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의 길에 이런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름의 졸속에서 자유하십시오.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멋진 간섭을 기대해 보십시오.  인생은 짧지만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 앞에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저와 여러분은 이 안식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왜 우리는 안식을 잃어버렸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우리가 안식을 잃어버린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우리 마음속에서 평안을 빼앗아갔습니다.  죄가 우리 마음속에서 여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속에 독기 서린 한을 심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이런 죄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왭니까?  그분은 어느 날 팔레스타인의 피곤하고 지쳐버린 군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분은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오는 순간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죄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평안이 회복됩니다.  그는 진실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을 잃어버렸습니까?  다시 그 분 앞에 오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그곳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그 풍성하신 은혜 그리고 그의 그 넓은 평안 안에 거해 보십시오.  내 안에서 안식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회복되는 안식의 마음속에서 다시 본 하늘과 땅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과 땅인지,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 놀라운 미래, 또 미래를 향해서 손짓하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삐에로 쌍소가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의 마지막 감동적인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날 것이다.
내일 나는 다시 한번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계절의 바퀴를 그분과 함께 돌릴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모든 계절이 내게는 너무나 정겹고 아름답기만 하다.
나는 빛이 기울어질 때까지 빛과 동행할 것이고
밤이 새벽에 의해서 찢겨 나갈 때까지 밤과 동행할 것이다.
누더기를 입고있는 이 세상, 나는 이 세상에다 위엄 있는 의복을 입혀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나의 참된 충동들을 알고있기에 세상이 입혀준 누더기를 벗겨낼 것이다.
내일 다시 한번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이 행복한 기회를 소중하게 누리게 될 것이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일어나시겠습니다.  함께 일어나서 기도하실 때 주보 속지에 있는 복음성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를 불러 보겠습니다.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양 속의 가사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르시겠습니다.
우리를 쉼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시는 그분의 음성을 이 찬송을 통해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피곤하신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혼란한 분이 계십니까?  상처가 무거워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운 곤고함이 나를 붙들고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그 안식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안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 앞에 오십시오.  그 짐을 붙들고 있지 마십시오.  그 분 앞에 다 내려놓으십시오.  아픔도 좌절도 당황함도 다 내려놓으십시오.  고통도 원망스러움도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 분 안에 거하십시오.  그 분의 사랑 속에 빠지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반주 없이 허밍으로 불러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 내려놓으십시오.  모든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그 분이 주인 되게 하십시오.  그 분을 의뢰하십시오.  그 분이 소망이십니다.  그 분이 구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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