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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리다굼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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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기에 앞서서 복음송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를 다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방금 불렀던 노래 가운데 '걱정 근심 전혀 없네'라는 가사가 본래 영어 찬송에는 '모든 두려움은 다 사라졌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내 인생의 미래를 만날 수가 있다'는 것이 본래 찬송의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의 감격이 없는 밋밋한 삶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신앙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간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음에 대한 새로운 생명의 삶을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지치고 고달픈 삶에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분 때문에, 자기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일어날 수가 있었노라고 하는 신앙 고백의 산 증인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서도 이러한 고백적인 신앙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 보면, 12살 먹은 소녀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의 드라마가 증언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그 소녀 곁에 예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달리다굼!"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본래 아람 말인데, 그 당시에 상당히 많이 쓰이던 보편적인 말이었다고 합니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언제 쓰느냐 하면, 아이들이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아오면 아이들을 깨웁니다.  "얘야, 너 일어나라!"  그럴 때 쓰는 말이 달리다굼이라고 합니다.
'달리다'라는 말은 '아주 작은 것, 불쌍한 것, 연약한 것' 그런 것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굼', 또는 '구미'라는 말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달리다 굼!"  "나의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
이 말씀과 함께 이 소녀는 벌떡 일어납니다.  새로운 삶이 그에게서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절망의 시대입니다.  다시 일어설 기력이 없이 주저앉아 버린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서는 얼마든지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입니다.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단순한 사회적 갱신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입니다.  생명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들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달리다 굼."  "사랑하는 아이야, 일어나라!"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달리다굼"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부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리다 굼"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고통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리다 굼"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모든 갈등의 자리에서, 의심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리다 굼."
달리다 굼의 역사는 오늘 내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역사는 오늘 이곳 언양 영신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달리다 굼, 이 역사는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달리다 굼, 이 역사는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터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여러분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의 짧은 목회 경험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념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아 일어났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일어났지만, 그것이 오늘의 첨단과학 시대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내 안에서 역사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저 생각으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관념적인 신앙을 거부해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았다면 내 질병도 나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이 터지도록 물고기를 잡았다면 내 사업도 그렇게 넘치는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면 오늘 나도 내 앞에 놓여 있는 인생의 홍해를 가를 수가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서도 날마다, 순간마다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부활의 기적, 그것이 나의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내 삶이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옳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내 삶 속에서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올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의 시작은 사실은 35절이 아닙니다.  좀더 앞서서 22절입니다.  마가복음 5장 22절과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 소녀의 아버지는 회당장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당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당',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 복판에 있었던 그런 기관입니다.  이것은 물론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었지만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수행됩니다.  회당은 학교 역할도 했고, 심지어 재판소 역할도 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비슷한 역할까지 회당장은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명예가 있었고, 사회적 존경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회당마다 적어도 10명쯤의 관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큰 회당의 경우에는 회당장이 3사람씩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가 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그 당시 예수는 젊은 예언자,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사람, 어떤 이단의 교주처럼 취급될 수도 있었던 그분.  그러나 그 예수 앞에 나와서 회당장이 엎드립니다.  그냥 나와서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22절에 보면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그 다음에 보면 "발아래 엎드렸다"고 그랬습니다.  발아래 엎드렸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살아온 날들을 통하여 너무나도 잘 압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나의 이 알량한 자존심이 상처받고 구겨지는 것이 싫어서 몸부림을 칩니다.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면 세상 전부가 무너진 것처럼 통분해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이 정도의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예수 앞에 엎드렸다는 것,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희망마저도 흔들릴 그런 중차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별의별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릴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희망, 마지막 소망을 예수께 걸고 그는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회당장에게 사랑하는 딸로 말미암은 고통의 딜레마, 그것이 없었다면 이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겠습니까?
우리 중에서도 내 삶이 고통받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역경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비바람과 폭풍우가 없었더라면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  오늘 여러분 가운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고통이나 역경을 가리켜서 변장된 축복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고통, 이 역경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허하게 나사렛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엎드려서 어떻게 합니까?  23절에 보면, "많이 간구하여"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간곡히 청하였다"고 했습니다.  한번만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생님, 살려 주세요.  내 딸을 살려 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소리치고, 매달리고, 부르짖는 이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저는 우리 한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도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체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상에서 체면에 가장 민감한 의식을 가진 민족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체면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싶어도, 은혜 받고 싶어도, 깊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고 싶어도 자기 체면 때문에 안됩니다.  '내가 뭐 이 나이에' 이런 사람들, 체면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체면 때문에 오늘도 인생의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어도 주님 앞에 나오지를 못합니다.  해결될 수 없는 인생의 딜레마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를 못합니다.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 속에 주님의 부활의 능력,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내 인생 속에서 부활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오늘 문제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 앞에 나와 엎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희망을 걸고 주 앞에 엎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부활의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 부활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삶이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두 번째로,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 가셔야 합니다.
본문 23절 말씀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 다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24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보십시오.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내 딸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더니 예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하실 줄 믿으십니까?
주님! 제 집에 오십시오.  여러분, 주님께서는 내 집에 찾아오시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문제와 갈등과 그리고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가정에 초청하지 않으십니까?
'함께 가 주십시오'라고 초청을 하니까 "그와 함께 가실새…."  회당장은 드디어 예수와 함께 걷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만나고, 이제 예수와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집으로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 시점에서 회당장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이제 주님 만나고 주님과 함께 걷게 되었으니까 그 주님을 통하여 해결의 소망을 안고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 집에 가시면,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우리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해결의 희망을 안고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과 함께 걷고 있었던 길에서 사건이 또 하나 발생합니다.  25절이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이 사건이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치료받는 사건과 맞물려 있습니다.  사실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다가 한 여인이 주님 앞에 와서 또 도움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이 여인이 치료를 받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일 분이 아쉬운 때입니다.  한 순간이 새로운 때입니다.  그런데 그의 해결이, 사랑하는 딸의 문제의 해결이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어떤 여인 때문에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 이것은 회당장의 입장에서 보면 방해 거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신경질 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회당장의 입장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겠습니까?  여기에서 저는 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이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강화시켜주시려는 의도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 내 문제가 급합니다.  그런데 내 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은 기도해서 빨리도 응답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응답을 받는데 나만 응답 받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해결되는데 나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 다른 사람들은 기도응답 받고 다른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경험하는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다 들어주는데 왜 내 기도만 안 들어주십니까?"  이렇게 접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친구의 기도를 응답하신 주님, 그렇다.  그 주님은 내 기도도 응답해 주신다' 이렇게 접근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다가 인생을 포기해 버린 이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이 사람을 치료하시는 주님은 내 집에서도 동일한 역사를 행하실 줄 믿습니다.  이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보면서 내 믿음이 강화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보면 이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사건이었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갈 길이 바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체하고 있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여기서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서,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네가 기다릴 수가 있느냐?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수가 있느냐?  바로 이러한 시험이 또한 이 사건 속에 게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생애를 관찰하던 사복음서의 기자가 특별히 기도의 교훈을 중심으로 써 내려간 복음서 가운데 하나가 누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유달리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사건입니다.  억울한 일을 경험한 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와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는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 비유를 가르치면서 이런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그렇습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기도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의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가르침을 위해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과의 신뢰의 관계가 생기도록, 문제의 해결을 지연하면서 기다리게 하시고 기도를 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엎드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믿으십니까?
그런데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이 한 번만 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만 문을 두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이 말의 뜻은 계속해서 구하라, 그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몇 번 두들겨 봐도 이 문은 열릴 것 같지 않게 굳게 잠겨 있습니다.  닫혀진 문 앞에서 인생을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 두드리십시오.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더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구하고 찾고 계속 두드리십시오.  마침내 열릴 것입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주님이 곁에 계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의 때는 아닙니다.  계속 두드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주님만 곁에 계시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계속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우리는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물러 서셔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문제가 해결되고, 아니 되고를 떠나서 항상 주님 곁에 머물러 서 계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인생 속에서 마침내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맛보시기를 원하신다면 세 번째로,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본문 35절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던집니다.
"당신의 딸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은 끝났습니다.  희망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절망의 보고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는 이미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었을 것입니다.

38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장례식의 광경을, 슬픔을 당한 이 집의 모습을 좀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여기에 보면 좀 이해하기 힘드는 단어가 나옵니다.  "훤화함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39절에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여기에서 "훤화"라는 말은 '방해, 소음, 소란, 소요'라는 뜻입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게, 사람들은 혼란되어 있습니다.  소란을 일으키고 혼란되어 있었습니다.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통곡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한 복판 속에서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다같이 한 번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습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것은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두려워 말고 믿어라, 계속해서 믿어라'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상황은 끝났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직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믿어라.  세상 사람들이 절망이라고 말하는 이 절박한 순간 속에서도 계속해서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이 소녀도 일어났습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부활했습니다.  부활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사망의 절망, 이 육체적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이 확실하다면 깨어 일어남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도 잠자리에 들면서 절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이 죽음의 사건 앞에서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육체적 사망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절망은 영적 사망입니다.  사람은 육체적 사망을 두려워하고 고민하지만 영적인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 사망을 아십니까?  영적인 죽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망, 이 영적인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려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과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셔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단절시킨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쏟으셨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나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연결됩니다.  믿으십니까?
나는 영적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부활의 위대하신 주님은 나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 건너편에 부활의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도상에서 우리가 무력함에 시달리고 우리가 좌절하고 우리가 주저앉아 앞이 캄캄할 때 주저앉은 우리 곁에 부활의 주님은 그때도 어김없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달리다굼!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딸이여, 일어나라!
여러분, 주님의 손길,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약속의 말씀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의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25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죽어있던 자들이 하나님이 음성을 듣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렇습니다.  주님의 음성, 주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살아날 것입니다.  삶에 희망을 얻을 것입니다.
달리다굼!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말씀은 소망이 되어 일어날 것입니다.  달리다굼!  내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우리는 절망을 박차고 일어날 것입니다.
달리다굼!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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