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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 (엡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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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행전 22:3~5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기에 율법의 잣대로는 흠 잡힐 것이 없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이단으로 여기고 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으며, 스데반이 유대인의 핍박으로 순교 당하는 그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누구 못지않은 열심이 있었으나 거듭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종교적인 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전도도 잘 하고 봉사도 잘하고 충성하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종교적인 열심을 살펴보면, 열심히 해야 복을 많이 받고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매사가 자기위주이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합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다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사도 바울을 보면 그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로마서 14:8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삶의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3:4~9을 보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 거듭난 후 그동안 소중히 여겼던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버렸으며, 삶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나는 내가 회심을 하고 중생을 체험하기 전에도 선교사였으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예수를 열심히 믿었고 교회의 모든 일에 충성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었고 종의 믿음이 있었다.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이나 아들의 믿음은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는 것이다. 이것이 큰 은혜요, 큰 축복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럽은 일찍이 복음화되어 대부분의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자기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명목상의 기독교인일 뿐 거듭난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다가 예수 믿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중생한 신자가 아닙니다. 그저 그들의 문화가 기독교 문화일 뿐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이 유럽 대륙을 휩쓸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 말씀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성경 말씀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챨스 다윈과 같은 사람은 원숭이와 사람의 조상이 같다는 진화론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원인이 진화되어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0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4~ 5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미 저와 여러분을 알고 계셨고 저와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출생과 죽음의 시기까지도 이미 결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시편 139:16을 보면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벌써 나를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으며, 나의 출생과 죽음의 날이 되기도 전에 주의 책에 나의 생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살다가 어디서 죽을 것까지도 다 계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저의 경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났으나 부산에서 30여 년 동안 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모두가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계획된 그대로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4~26을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우리 인생들의 ‘연대를 정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부모에게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따라 태어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주의 경계를 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저 자신이 어디에서 살 것도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아이가 부모의 가족계획과는 상관없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피임에 실패해서 아이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부모들은 몹시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이 없이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모두 다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어떤 일이라도 우연히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절대로 실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한마디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4~5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을 보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볼 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자신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야지 어떻게 남의 아내가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 당시 우리야 장군은 전쟁으로 인해 전선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저녁때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는 아리따운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이 여인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다윗은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당시 절대군주인 왕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이 여인은 충성스런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다윗은 이 여인과 하룻밤을 보냈고 그 결과 밧세바가 임신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우리야 장군을 급히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지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우리야 장군은 전쟁 중인데 어떻게 집에 가서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느냐고 단호히 거절합니다.
다윗은 할 수 없이 끔찍한 작전을 세웁니다.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로 다시 보냅니다. 그리고 그를 군대의 맨 앞에 세우도록 지시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충성스런 부하를 죽이는 간접 살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밧세바를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그즈음 죄악의 씨로 태어난 이 아이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습니다.
그 후 다윗은 상심한 밧세바를 위로합니다. 사무엘하 12:24~25을 보면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무서운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더니 용서하시고, 밧세바를 통해 가장 지혜로운 아들 솔로몬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5:7). 여러분 중에 혹 양심의 가책이 되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죄를 범한 사람일지라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만 하면 반드시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회복시켜주시고, 넘치는 복을 주시는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 평안히 살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계획하시고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우주 만물을 우리를 위해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태양과 달과 별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7~12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성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 됩니다.
이사야 46:3~5을 보면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택한 백성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이 안아주시고 품어주시고 구하여내시고 백발이 되기까지 천국에 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항상 돌봐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해주셨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해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과 이 은혜를 잠시도 잊지 마시고 큰 은혜를 찬미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정필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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