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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을 사랑하라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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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하고 부르짖음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뜨겁게 복음을 전파했는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3천명이 전도되었고, 얼마 후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뺀 남자의 수만 5천명이 되더니 그 후에는 셀 수가 없는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사랑 교회도 이런 큰 부흥의 은혜와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급속도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자 이 하나님의 일에 대적하는 악한 마귀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귀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였던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귀와 악한 무리들은 급속도로 예루살렘에서 성장하고 있는 이 새로운 세력을 핍박을 통해 막을 것을 결심하고 그 중에 밤낮으로 복음을 열심히 전파하며 헌신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님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죽이기 전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그들의 가슴을 찔러 쪼개고도 남는 능력의 설교였습니다. 그 영혼의 깊은 죄악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였습니다. 죽은 영혼을 깨우며 살리고도 남는 큰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54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의 죄가 지적되고, 마음이 찔리면 회개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상하게 하나님의 날카로운 성령의 검이 그 마음을 찌르고 수술을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마음의 아픔은 느꼈지만, 그들의 육신은 그 마음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를 갈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를 더욱 쌓았던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이런 영혼들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히브리서 4:12-13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말씀은 살아 있는 칼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서 우리의 혼도 찌르고, 관절과 골수와 우리의 영혼까지 파고 들어가 우리 인생의 마음과 뜻과 생각까지도 하나하나 짚어 나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끔하고 아프고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성령의 은혜와 그분의 역사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성령의 음성을 듣고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이를 갈았습니다. 말씀을 듣기 싫어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돌을 들고 달려 든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혼이 잘 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이 가슴을 찌르고,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낮아져서 회개하고 고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듯이 오늘날 많은 분들이 “말씀은 좋은데.... 말씀에는 능력이 있는데.... 말씀에 가슴이 찔리기는 하는데.....”하고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스데반 집사님의 시대처럼 심지어 말씀에 찔림을 받고, “목사가 사람을 때리는 설교를 한다. 자기를 공격하기 위해서 하는 설교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곳에 있는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서든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겸손해지고 그 말씀을 실천할 생각을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영혼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자신들이 임금님의 잔치인 천국에 가도록 자기 영혼을 자기가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명예를 얻고 그 명예를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이 저 하늘나라에 가도록 자신의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복음 16장에서 좋은 자색 빛의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잔치를 벌린 부자와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인생을 살았던 가난한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천국에 있었지만 한 사람은 뜨거운 불로 가득차 한 시라도 견딜 수 없었던 지옥에 있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물질적인 부자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고난을 받기를 거부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나사로는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 성도들을 의미합니다(눅16:25). 나사로라는 뜻이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간 인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사로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부자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심령에 애통함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나사로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물질로 마음의 위로를 삼으려고 합니까? 혹은 명예와 가지고 있는 힘으로 마음의 위를 삼고, 영혼의 양식을 삼으려고 합니까?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는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다”는 영혼의 법칙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어느 부자는 일년 동안 농사를 지어 큰 이익을 본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주님은 결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과 그분의 사랑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해야합니다. 나사로처럼 진실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하루라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십자가의 피로 온전히 적셔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나의 영혼을 주님의 십자가로 온전히 구원하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스스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며 그분의 몸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우리 자신들을 드리고 천국을 향해 담대히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스데반은 고백합니다. 5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의 마지막 고백은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날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철저한 도움으로 주를 위해 받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또 한 사람의 나사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하십시오. 그 영혼이 잘 되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받는 인생이요, 천국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영원히 기록된 영혼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60절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쳐서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된 영혼이 구원을 얻도록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이 포함된 이웃들과 형제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죽음을 앞에 둔 마지막 기도를 통해 실행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죄된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와서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기도를 해야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혼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형제와 골육의 친척들이 예수를 믿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롬9:3). 자신만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영혼들을 보면서, 저 지옥의 고통과 뜨거운 불길 속에 고통당할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면서 눈물을 어떻게 흘리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어 평안하게 천국 갈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형제나 자매나 이웃이나 사랑하는 친지들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도 좋다는 말입니까?

  디모데전서 5: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그 뜨거운 지옥의 고통 중에 저 세상에 지옥이 있다는 것과 천국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날마다 인생의 쾌락에 빠진 자신의 다섯 형제를 생각하며 눈물로 아브라함에게 죽은 나사로를 살려 그들에게 가서 이곳에 제발 오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눈물로 고통 중에 호소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그 부자는 앞으로 그 형제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영혼이 제발 이곳에 오지 말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제 적극적으로 그들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막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제 저 어둠 속에 죽어 돌아다니는 죄악의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여 날마다 강건해지고 영적으로 뜨거워지도록 평안을 얻도록 간구하겠습니다. 둘째는 믿음 없는 형제와 자매와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입이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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