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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공동체 습관(2) - 온유 (갈 5:2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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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공동체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인식 내용에 따라 인생 행복이 달라진다.

인간이 세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곧 다양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작게는 가족 공동체로부터 크게는 지구촌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서 정리된 생각들을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행동화합니다. 이 행동은 공동체의 삶의 일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공동체 속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양식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행동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작은 문화충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작은 문화 충돌을 지혜롭게 처리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며, 공동체에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작은 문화 충돌을 온전히 처리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외형적인 증세를 나타내거나, 개인적으로 침체와 좌절 가운데 빠지는 내면적인 증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며 공동체 앞에 나서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공동체 속에서의 자기 존재의 인식 내용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우월하게 인식하거나 열등하게 인식합니다.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과 비교한 상대적인 평가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화시킬 때나 공동체의 다른 존재의 어떤 행위를 접할 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우월의식 속에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다른 존재를 무시하거나 경멸하기 쉽습니다. 열등의식 속에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다른 존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난하기 쉽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은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 속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옳은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행위를 공동체 가운데 수용하기보다는 거부감을 더 느낍니다. 그런데도 그는 공동체의 거부감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거부감에 반발하며 도전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는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나타낼 때 그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속에 담긴 인격적인 감정을 먼저 접하기 때문입니다.

무시와 경멸의 인격적 침해와 함께 다가오는 우월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행위는 공동체 내에서 거부됩니다. 매도나 비난과 함께 다가오는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행위도 공동체 내에서 거부됩니다. 공동체 내에서는 어떤 사실보다 인격적인 감정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실로 인해 공동체 내에서 관계는 유지될지라도 인격적인 감정의 파괴로 인하여 충돌을 일으키고, 함께하기 힘든 관계로 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두 종류의 모습을 “교만”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나타냅니다.

우월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우월함을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인식하며, 그 우월의식으로 공동체의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므로 능동적으로 교만합니다. 반대로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들도 그 열등의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공동체의 다른 상대를 매도하거나 비난하면서 자신의 열등의식을 보존하려는 수동적인 교만을 나타냅니다. 사 3:5는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라고 그 예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자존감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은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우월의식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열등의식 속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내에서 우월한 자들 속에서나, 비천한 자들 속에서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마음의 습관이 있고, 자신을 향하여 희락을 누리는 마음의 습관이 있으며, 이웃을 향하여 화평케 하는 마음의 습관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오래 참습니다. 그들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들에게 양선을 행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결정을 행동화 할 때마다 신뢰할 만한 믿음의 충성으로 공동체에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며, 다른 존재의 행위를 그 “온유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2. 공동체 속에서 온유한 자의 자기 존재의 인식이 행복의 비결이다.

갈 5:23의 성령의 8번째 열매인 “온유(프라우테스)”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는 “잘 길들여진 가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들에서 자기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야생마를 잡아다가 우리에 넣고, 조금씩 길들여서 주인의 의도에 따라 사용하게 된 가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생마의 힘과 능력은 그대로지만, 그것이 길들여짐에 의해서 그 힘과 능력이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되는 통제 능력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힘과 능력은 있지만 그 힘과 능력을 자기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직 주인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조절되는 상태입니다.

“온유”의 헬라어 단어인 “프라우테스”에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아나우”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비천하며, 억압된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뜻이 다시 전의(轉義)되어, 자기를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서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는 어떤 이웃에게도 노하지 않고,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겸손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존재할 뿐 공동체의 다른 존재와 비교하며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을 수 없는 성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성령께서 길들여 주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길러주시는 열매로서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시는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친절하게 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환경을 향하여 나아갈 때도 겸손하게 나아갑니다. 공동체 속에서 비교나 판단이 없으므로 우월의식도 없고, 열등의식도 없는 겸손과 친절로 나타납니다.

곧 온유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아는 겸허함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공동체의 이웃과 비교 평가한 모습을 자신의 존재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존감을 지닌 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공동체의 이웃에게 “친절, 겸손, 공손, 동정, 용납, 너그러움”의 태도로 나갑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웃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불쌍히 여깁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공동체를 향해 나갈 때는 겸손하게 나가며, 공동체를 맞이할 때는 친절하게 맞이합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공동체를 향한 “온유의 습관”으로 길러 주십니다. 온유는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공동체 습관”입니다. 예수님은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능력과 권세를 지니셨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권세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온유함을 지닌 성도들이 쉼을 누리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온유한 자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나약한 자도 아닙니다. 모든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권세가 성령에 의해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길들여진 자입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그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는 습관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므로 온유의 습관은 공동체를 위한 습관이며, 하나님을 향한 습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온유의 습관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딛 3:2에서 디도에게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내야 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각종 공동체마다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이 가득하며, 그로인한 각종 갈등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공동체 가운데서 성도들의 “온유함”을 기대하십니다. 성령은 성도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향하여 온유함으로 나가게 하시며, 공동체의 모든 요구를 온유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민 12:3에서 피곤하고 지친 가운데 자신의 욕심만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길을 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하며, 그들과 대조되는 모세의 온유함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이 신뢰할 만한 믿음인 충성으로 공동체를 향하여 나갈 때 겸손과 친절의 옷을 입은 온유한 성품으로 나가지 않으면 갈등과 충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요구를 겸손과 친절로 옷을 입은 온유한 성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겸손하며 이웃 앞에 겸손한 마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비천한 종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앞에서도 이웃을 섬기도록 명령 받은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서의 존재로 자신을 인식해야 합니다.

3.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성도는 성령에 의해 온유한 자로 길러진다.

하나님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을 온유한 자로 길러 가십니다. 온유의 열매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길러지는 열매입니다. 첫째로 성령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음을 “온유한 마음”으로 길러 주셔서 온유의 열매를 나타내게 하십니다. 마 11:29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다고 하셨고, 우리에게 그 온유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딤전 6:11에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하면서 온유가 성도의 마땅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벧전 3:4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특성이 온유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온유한 자와 함께하시며, 가르치시며, 인도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시 25:9에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도 약 1:21에서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성도는 온유한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며, 보는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온유한 마음을 통해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의 행위를 접하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행위를 용납하고, 겸손과 친절로 그들을 대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다른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즉 온유한 마음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의 마음을 온유하게 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로 만들어 가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언어를 “온유한 언어”로 길러 주셔서 온유의 열매를 나타내게 하십니다. 성도들이 마음의 결정을 외부로 나타내는 첫 표현이 언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언어가 온유한 언어가 되길 원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끊임없이 언어의 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바울은 갈 6:1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자에게까지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딤후 2:25에서는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하시며 거역하며 불순종하는 자를 징계할 때도 온유함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함이 없는 능력과 권세는 언어폭력입니다. 비록 범죄한 자나 징계 받을 자를 향한 언어라 할지라도 온유함이 없는 언어는 그 효과를 얻지도 못하는 하나의 폭력에 해당할 뿐입니다. 오히려 노를 격동시키거나 분노를 일으키고, 다툼과 갈등을 키울 뿐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온유한 언어가 생명을 살리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 온유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성도의 입술을 길들여 갑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언어로 길들여 갑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의 언어로 길들여 갑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유순한 언어로 공동체의 분노가 사라지게 만들어 가십니다. 슬기로운 언어로 우월의식에 빠진 자나 열등의식에 빠진 자들의 공격적인 표현들과 방어적인 표현들 속에 담긴 교만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온유한 언어로써 범죄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하시며, 징계 받는 자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셋째로 성령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태도를 “온유한 태도”로 길러 주셔서 온유의 열매를 나타내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월의식 속에서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살아가던 자들의 태도를 온유한 태도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열등의식 속에서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을 매도하고 비난하며 살아가던 자들의 태도를 온유한 태도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또한 자신에게 그렇게 다가오는 자들을 온유한 태도로 맞이하여 그들의 교만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온유한 태도는 갈등의 공동체를 평화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시는 성령의 방법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 76:8-9에서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온유한 태도로 준비된 자들을 위하여 일하시기 위해서 일어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벧전 3:15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시며 성도들의 복음사역 까지도 온유한 태도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공동체 속에서 온유는 공동체의 영역을 평강의 땅으로 만들어 간다.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온유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유일하게 복이 약속된 열매입니다. 온유한 마음, 온유한 언어, 온유한 태도로 공동체 가운데 나가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입니다. 모든 능력과 권세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쓰실 수 있도록 준비한 자에게 약속된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종의 위치에 있음을 알고,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복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합니다.

구약의 시 37:11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고 약속합니다. “땅”을 차지하고 “화평”을 즐기게 하신다는 복의 약속입니다. 신약의 마 5:5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약속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복은 “땅”입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거주지로 구분지어 주신 영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땅이요 축복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영역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공동체의 영역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공동체 속에서 화평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행복한 공동체 습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온유함으로 공동체를 향하여 믿음의 행동을 취하며, 공동체의 행위들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때 그 공동체 가운데서 화평의 복을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화평으로 공동체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온유함이 공동체의 영역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언어의 온유함이 공동체의 갈등들을 해결합니다. 태도의 온유함이 공동체 가운데 거짓 없는 사랑의 교제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길러 주시고 훈련시켜 주셔서 습관화 된 온유는 공동체를 차지하게 하며, 그 공동체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게 합니다. 공동체의 모든 갈등과 다툼들을 치료하여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를 통해 차지한 공동체만이 행복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힘과 권력만으로 차지한 공동체는 행복 대신 갈등과 괴로움만 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부름 받고 서 있는 땅을 온유함으로 차지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하나님의 종 된 위치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마다 순종하며 드리기만 하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통제하며 겸손과 친절로서 그 능력과 권세를 이웃을 위해 사용해 갈 때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월한 자든, 열등한 자든 교만한 마음으로는 어떤 땅도 차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붙들린 능력과 권세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 도구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붙들린 열등의식도 공동체를 파괴하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포악(暴惡)”한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애굽이나 바벨론의 포악과도 같습니다. 포악은 온유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능력과 권세는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아는 자의 행위입니다. 렘 46:16은 그 포악을 피하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능력과 권세가 없지만 그것을 가진 자들에게 도전해 오는 열등한 민족들의 방어수단이 포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잠 16:18-19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한 자가 포악한 방법으로 얻은 탈취물이나 땅은 결코 그의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기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온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땅을 누리도록 약속해 주시고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속에 있지만 공동체 속에서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며 공동체 가운데 나가는 것이 그 공동체를 얻어 평강을 누리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행복한 공동체 습관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행복한 마음의 습관으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누리는 자는 행복한 행동 습관으로써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으로 이웃을 대할 뿐만 아니라 그 이웃들이 함께 살아가는 땅인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충성으로 나아가되 온유함을 나아갑니다. 그 마음과 그 행동이 충성으로 나아가는 곳마다 온유함을 통해 정복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온유함으로 제공하며 정복해 갑니다.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이 나타내는 능력과 권세를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며 정복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문화 정복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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