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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경의 수단과 목적 (마 2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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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 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 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4)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6: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1. 성실함으로 환경을 이기지 못하면 인생의 수단인 환경이 목적이 된다.

인간의 삶과 물질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인간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든지 물질을 통한 행위로써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식사를 하려면 수저나 식기 등 다양한 물질들이 있어야 합니다. 청소를 하려면 청소용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음악을 감상하려면 각종 기기들이 있어야 합니다. 홀로 정신적인 사고활동을 하는 것 이외의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이 물질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물질과 같은 환경에 따라 그 양이나, 질이나, 속도에서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종 환경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각종 물질적인 환경, 인간관계의 환경, 정신적인 환경 등 다양한 환경들을 생각하며 감사하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어떤 행위를 하고자 하여도 환경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그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수행하려면 각종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에 환경에 대한 압박은 인간의 삶의 목적을 압도할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의 압박과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에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을 이겨내고 인생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최근에도 한 월간지에서 그러한 대상으로서 김종빈 검찰총장의 인생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40km 이상 떨어진 해안 마을 “장등”이라는 “깡촌”에서도 동네 20여 가구 중 가장 가난한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여수시 관문동의 보육원에 보내어져 성장해야 했던 그의 인생여정을 소개합니다.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여수시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물질적인 후원으로 고대 법학과에 입학하고, 다시 가정교사를 통해 대학교를 마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의 검찰총장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인생이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의 검찰총장직 수행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식들은 “유전유학 무전무학(有錢有學 無錢無學)"을 핑계로 현실 환경 속에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환경은 인생의 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수단이 넘쳐날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넘친다고 유리한 것만도 아니고, 부족하다고 불리한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환경 속에서 어떤 인생의 목적을 품고 성실하게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너진 사람들이 자신의 넘쳐나는 환경들을 순식간에 황무하게 만드는 역사도 보았습니다. 또한 인생의 목적이 견고한 사람들이 부족한 환경을 이기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역사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 중에서 가장 슬픈 역사는,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시간이 흘러갈수록 환경을 수단으로 보지 못하고 그 환경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넘쳐나는 사람들도 그 넘치는 환경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여기며 낭비해 갑니다. 환경이 부족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 환경을 인생의 수단으로 여겼으나 반복적인 실패 속에서 그 환경 자체가 인생의 목적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목적을 상실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2. 환경이 수단인 사람은 언제든지 사람을 얻기 위해 환경을 사용한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적으로 우리의 삶이 혹시나 환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수단인 환경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있다면 이제라도 다시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환경은 인생의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또한 그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물질이나 일과 같은 어떤 산물이라면 결국 환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과 동일한 인생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러한 물질문화의 중심에 있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어떤 사역의 결과나 사역 그 자체인 사람은 그 인생의 목적을 이루어갈 수는 있을지라도 환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행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잃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과 환경 중 무엇이 인생의 목적이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의 환경들이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환경에 눌려 실패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이며, 그중에서도 어머니들입니다. 정상적인 어머니들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환경에 굴복하는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보다 자신의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기 쉬운 아버지들은 환경에 눌려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한 그 목적을 이룬다 할지라도 외로움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노년의 어르신들을 무수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과 환경의 두 요소 중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요? 사람과 환경은 서로가 수단도 되고 목적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환경을 사용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환경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어느 한 쪽이 목적으로 귀착됩니다. 환경과 사람이 동시에 목적이 되거나 동시에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질문화가 언제나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을 물질에 두도록 유혹을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최종적으로 환경을 얻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경이 목적이 되고, 사람은 그 환경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인들의 다수가 사람보다 환경을 더 추구합니다. 냉철히 바라보면 우리들의 인간관계의 대다수가 우리가 기대하는 환경을 얻기 위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환경을 얻기 위해 대 다수의 사람들을 배치합니다. 환경을 얻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 사람들이 포기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최종적으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환경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목적이 되고, 환경은 그 사람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대 다수의 환경들이 재배치됩니다.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환경은 얼마든지 포기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 환경을 포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사람을 얻기 위해 환경을 사용하도록 요구합니다.

마 26:6-16의 말씀은 이러한 두 유형의 극단적인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마 16:1-5에서 사건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장차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고,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마 26:6-13은 그 예수님을 얻기 위해 자신의 환경을 사용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마 26:14-16은 자신의 환경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유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다니의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는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물질이라는 환경의 조건들을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여인의 행위의 목적이며, 비싼 향유 자체는 수단일 뿐인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한 환경까지도 포기하고, 그를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사용한 “매우 귀한 향유”는 “나드”라는 향유로서 한 옥합의 가격이 300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일년 연봉에 해당하는 고가품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중심에 모시기 위해서 그 환경을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시간에 열 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자신의 환경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마 26:14는 첫 단어를 “그 때에”라고 표현합니다. 한 편에서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환경을 포기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유다는 당시의 노예 한 명의 몸값에 불과한 은 삼십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과 권력 등의 환경이 목적이었으며 예수님은 자신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였고, 또한 그분을 포기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과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언제나 환경을 통해서 사람을 얻으셨습니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사역의 환경을 통해 사람들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준비하고 구성하신 환경의 목적은 사람을 얻는데 있었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한 환경의 구성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도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물질문화관이었습니다. 천하의 한 사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소유인 물질을 흔쾌히 내어 줄 수 있는 물질문화의 세계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다니 여인이 사용한 향유 한 옥합도 그처럼 귀한 물질문화의 본이었습니다. 물질적 환경의 최종 목적이 사람에게 있었고, 예수님께 있었던 물질문화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6:13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면 제자들이 비난했듯이 낭비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언제나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얻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하십니다. 신명기 28장은 전체가 인간을 향한 축복의 환경과 저주의 환경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사람을 얻기 위함이며,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도 사람을 얻기 위함이십니다. 사람을 얻고,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피조물을 복 주시기도 하고 저주하시기도 하십니다. 심지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의 환경이든 저주의 환경이든 하나님은 그 환경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결국 그 환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경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모든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얻기 위해 우리의 환경의 변화를 주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들도 우리의 인생의 모든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과 사람을 얻는 것이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우리의 환경을 통해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눅 16:9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로까지 친구를 사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 주요 목적이 될 때 지켜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과 사람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시간과 물질의 투자 우선순위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물질과 환경을 얻기 위해 준비해 둔 수단으로서의 인간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환경 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예수님도, 다른 동료 제자들도 모두 포기할 정도의 물질문화에 빠져 있는 인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베다니의 여인처럼 예수님과 다른 믿음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환경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통해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며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환경 조정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많은 지식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내가 얻어야 할 하나님과 사람들의 모습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얻는 자가 최고의 승리자입니다. 베다니의 여인은 향유를 포기함으로 최고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음의 후손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망했습니다.

“환경의 수단과 목적”이라는 물질문화의 두 핵심은 영원한 행복을 향한 우리들의 현실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흐름은 환경을 인생의 목적으로 설계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환경을 사람과 예수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인생 설계를 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역사는 언제나 사람을 위해서 환경을 수단으로 사용한 자들의 승리의 역사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창조 이래 그 역사의 흐름을 바꾸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역사는 인물 중심이었고, 왕 중심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사 또한 절대다수가 인물 중심으로 구성된 역사를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종국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도 우리의 물질적 환경이 아닌 우리들이 환경을 통해 얻은 예수님과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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