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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공동체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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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예배 후에 있었던 치유세미나에서 강사 목사님이 강의 마지막 부분에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평소 제가 주장하던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여서 공감을 갖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해요. “여러분,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이 임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대답은, 아버지가 두 분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승 엘리야는 하나님 아버지 한분 밖에 없었지만 엘리사는 하나님 아버지 외에 엘리야를 영적 아버지로 모셨기 때문에 엘리야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한분이었지만 엘리사는 기도하는 사람이 두 분이어서 스승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았고 갑절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영적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가만히 보면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만 혼자 다닙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면 나도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늘 주변에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받고 체크를 받습니다. 그러니 잘못될 확률이 훨씬 적고, 신앙의 성장도 빠릅니다.

다음으로 영적 가족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영적 아비나 가족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망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큰 은사와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가 없었고 늘 혼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지만 오직 한 가지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드시고 관계를 맺어 살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 때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문제의 근본원인은 인간이 홀로 지내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 진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관계의 왜곡은 사실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관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외딴 섬처럼 고립되고 단절되고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과 문제가 다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끊어진 관계를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이란 끊어진 관계가 이어지고 왜곡된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과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차별하고 비교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연합이 일어나고 하나 됨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계가 좋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그들이 가는 곳에는 연합이 일어나고 하나 됨이 있습니다.
반대로 은사와 능력이 뛰어나고 교회 다닌지도 오래 되었는데 그 사람만 가면 다툼이 있고 나누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좋던 관계도 오히려 끊어져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나는 교회 안에서 몇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나 한번 세어 보십시오. 그냥 지나가면 얼굴이나 알고 인사하는 정도 말고, 밤중이라도 찾아가면 내 사정을 들어 줄 사람, 내가 어려움에 빠지면 정말 나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 줄 사람,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리고 손가락질 할 때 오직 나를 믿고 끝까지 함께 있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바르고 건강한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그런 관계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한 가족입니다. 가족적인 분위기를 흉내 내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한 가족입니다. 내가 없으면 네가 못살고 네가 없으면 내가 못사는 그런 관계로 모여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정과 교회 둘 밖에는 어디에도 그런 공동체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만드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해산의 고통으로 낳아 주셨습니다.

한번 받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는 살아있는 주님의 몸이 있고 건강한 교회에는 영적 가족이 있다. 여러분은 만 명 교회에서 고아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열 명이라도 한 가족처럼 지내는 그런 교회를 원하십니까? 유명한 목사님 교회에 교인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아프고 외로울 때 찾아와 주는 사람이 없고, 내가 힘들 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여러분은 쓰러지고 넘어질 때 여러분을 붙들어 줄 주님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적 가족 속에 들어가 있습니까?

다시 삼손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과 은사를 받았지만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 관계를 맺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삼손이 한 짓은 돈 주고 사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구멍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진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지고 보고 느끼게 하셨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목사님들이 무서운 죄에 빠져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목사님들이라면 누구보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며 사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돈이나 명예, 이성에 빠져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도 만드셨고, 나와 똑같은 사람을 통해 채울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목사님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대신할 수 있는 친구나 선후배, 어떤 사람이 없다면 삼손처럼 결국은 들릴라를 찾게 되는 입니다.

여러분 한 그룹 안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고통이나 문제가 생긴다면 누군가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있는 누구도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굳이 책임져야 할 한 사람을 찾자면 그의 이름은 <나쁜 사람> 입니다. 여기서 󰡐나쁜 사람’ 은 <나뿐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면서도 옆 사람과 하늘처럼 높은 벽을 쌓고 나 혼자만의 안위를 위해 사는 <밀실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이 정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 󰡐나뿐 사람󰡑들은 아닙니까? 아무도 못 들어오게 높은 담을 세우고 누가 죽든 말든 보지도 듣지도 않고 살면서 그래도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문명화된 사람들일 수록 프라이버시를 강조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 받기를 싫어합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로 인해 자신의 사생활이 깨어지고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 사생활이라는 것이, <private 하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private, 사적이라는 말을 고급스런 의미로 가르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 바로 private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사생활이, 프라이버시가 없습니다.
private 이 많은 사람일수록 관계를 깊게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비밀이 많고 무언가 계속 감추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밀이 많은 사람과는 피상적인 관계밖에 맺지 못합니다. 깊이 들어가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도망가 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 약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상처받고 기쁨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몸을 가진 사람을 위로하고 치료하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똑같이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병에서 고침 받고 일어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의 약이 되어준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을 잃어본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자기처럼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가 그의 약이 되어줍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 사람들을 <상처 입은 치유자> 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오셔서 태중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하게 될 모든 고통을 하나도 생략하지 않고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상처 입은 치유자>로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분이 주는 위로는 세상의 위로와 같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분처럼 우리를 만져준 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난 사람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져준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지나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 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 밖에 없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인사해 봅시다.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보약입니다.”
이제부터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약으로 알고 잡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온갖 약들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이 힘이 듭니까? 여러분의 약을 찾으세요. 형제자매와 관계를 맺으세요. 영적 아비를 찾으시고 영적 가족을 만드세요.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은 무슨 약일까요? <신약>입니다.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달려가서 악수하고 끌어안고 다정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러면 신약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이 많은 교회는 항상 생기가 돌고 힘이 솟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다른 교회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일까요? <약발이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예수를 오래 믿어서 믿음이 섰어, 나는 기도를 많이 해”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혼자 떠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삼손처럼 망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는 똑 같습니다. 안과 밖입니다. 원인과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려면 그 사람이 사람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친한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를 아무리 나누어도 감정을 나누지 못하면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어 놓게 됩니다.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깊이 있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사람과도 깊은 감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분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죄로 인해 관계가 끊어지고 그 결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이 공동체의 증거는 사랑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에도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9: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기록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계명은 매우 평범하며 또 한계를 지닌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기준은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선에서 남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이 사랑은 끝이 납니다. 왜냐하면 먼저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도 똑같이 수고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 이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형제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 사랑입니다. 물론 이것조차도 대단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장 이런 이웃 사랑만 실천한다고 해도 교회 안에 대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에게는 이미 십계명이 있는데 또 무슨 계명을 주신다는 거지?”
제자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똑 같은 계명이지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자신의 몸만큼만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다. 자기 몸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랑에서는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이 사랑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사랑은 한쪽 빰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쪽 빰을 돌려대는 것이며,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밥을 반만 나누어 주는 사랑이 아니라, 내 밥을 통째로 주는 사랑이며, 밥뿐 아니라 내 자신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와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수준입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의 수준을 뛰어 넘는 형제 사랑, 가족 사랑의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과연 가능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새 계명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친히 그 몸으로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중요한 것은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그 때 믿음으로 죄인인 나 자신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예수 믿기 전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지을 주인공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늘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죽은 송장들입니다.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의 십자가를 믿을 때, 예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할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는 없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대신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내 몸과 같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안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예수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사랑으로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누가 새 계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가면 “아, 저사람, 지금 죽으려 가는 구나.”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그림을 그대로 가지고 오셔서,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은 사람처럼 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런 각오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언제라도 십자가를 그곳에 꽂고 거기에 달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런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새 계명을 준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나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남에게 내어 주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아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나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태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의 기반이 되었던 <나 중심>의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구조, 즉 <그리스도 중심>, <너 중심>의 구조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창문에 커튼을 다른 색으로 바꾸고, 도배를 하고, 가구를 새로 들여 놓았다고 새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의 구조가 그대로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붙여도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집의 구조가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커튼이나 장판이나 가구는 아직 그대로라 하더라도 근본 구조는 바뀌어 저야 앞으로 언젠가는 그 구조에 맞추어 집을 다듬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여전히 옛 구조인 나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불렀다. 비록 그들이 각종 희한한 은사를 받았고 성경의 지식이 뛰어나고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구조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구조가 바뀌지 않는 성도들의 공통점은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 중심의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인정해 주지 못합니다. 100명이면 100명 전체가 다 자기가 살아서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나누고 쪼개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 바쁩니다, 하루에 8시간 일을 해야죠, 마치고 나서는 영어 학원에도 가야 합니다.” “목사님, 지금 제 코가 석잡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돌볼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솔직하게 대답하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나 중심>의 옛 구조가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냅니다. 시간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달려있습니다. 앞에서 그렇게 말한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달라집니다. 그 바쁜 중에도 여자 친구 집을 하루에 세 번 네 번 씩 방문할 시간을 만들어 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달라졌을까요? 뻔한 대답이 아닙니까?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 속에 자신의 이기심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죽어야만 자신에게 쏟았던 시간을 비로소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시간과 능력, 모든 자원을 사심이나 사욕으로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항상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 짐이 벗겨지는 것 뿐 아니라 <나 구조>가 무너져 내리는 핵 폭발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흉내만 낼 뿐입니다. 나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 너 중심 구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 공동체를 세우시기 위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위에 세워진 집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한분 성령님을 호흡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버지도 한분이고, 구원자이신 주님도 한분이고, 생명도 하나입니다. 똑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로 만들어 진 공동체입니다. 하나 되려고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 됨을 지키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용서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공동체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에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계명에 순종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껏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이 공동체를 보면서 “아, 저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라. 저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구나, 예수쟁이들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3000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라면 한 번에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가장 작은 모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입니다. 순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번에 3000명을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지렛대만 있으면 지구라도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3000명 교회도 한 가족이 되고 한 몸이 되는 것도 작은 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을 실천하는 출발점이은 내가 속해있는 순입니다.

어떤 순장님들은 순원들에게 모이라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모이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먼저 순원에 대한 사랑이 생겨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미모의 아가씨를 소개 받자말자 대뜸 하는 말이,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 우리 집에 가서 결혼하지요.”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먼저 사랑에 빠져야 한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순장은 먼저 순원들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주일에 겨우 한번 지나가다 만나서는 “안녕하세요. 한 주간 별 일 없으셨지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면 상대방은 그 인사가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벌써 압니다. 누가 그런 질문을 받고, “그런데 제가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제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지난주일 제 아들놈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일 년 동안 주일마다 똑같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더 이상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주일 날 만나서, “잘 지냈어? 그동안 별 일 없었지, 아 벌써 헤어질 시간이네, 다음 주일 만나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사랑한다면 만날 때마다 더 가까워지고 헤어지면 또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순 모임의 비법입니다. 아직 순모임을 시작하지 못했다면 먼저 모임부터 시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선 관계를 만들고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 기도이며 섬김입니다. 일주일 이주일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우리 순에서 아무개 집사를 사랑하겠습니다. 그 가정을 섬기겠습니다.” 하루에 한번 그 집 앞을 지나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사랑이 끊어 오르면 그때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순장이 찾아오는 것을 부담으로 생각하고 오해했던 처음의 마음이 점점 변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원을 집 안방까지 초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원들과 사랑에 빠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은 어떤 일에도 실패하지 않는 불패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 무기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또한 사랑으로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순장님은 “목사님, 아무리 사랑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네요.” 라고 말합니다. 이분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허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라는 것은 선택이나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여기에 대한 응답은 순종과 불순종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라는 것은 명령이었습니다. 요단강물이 언덕에 까지 차올라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 백성은 믿음으로 물을 밟았습니다. 그 때 요단강은 갈라졌습니다. 여러분이 순종하겠다고 작정하고 사랑하려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참된 교회를 경험하려고 여기에 찾아 왔습니다. 참된 교회는 사랑이 공동체입니다. 영적 가족입니다. 관계를 피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관계를 맺는 일에 뛰어드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 영적 가족, 순 교회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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