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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거룩한 식탁에로의 초대 (마 26: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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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년에 3번은 반드시 지키라 명하신
3대 절기 가운데 한 절기인 맥추절(麥秋節)을 지키는 주일로서...
이 말은 그만큼 맥추감사주일이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출애굽기 23:14-17).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너는 무교병(無酵餠)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맥추절(麥秋節)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收藏節)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과거 모든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던 농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첫 수확인 밀과 보리를 거두고 나서 하나님앞에 제단을 쌓았는데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옛날처럼 농사 짓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첫 수확인 밀과 보리를 거두고 감사한 마음으로 제단 쌓는 그러한 본래적 의미와 함께
한해의 절반을 인도하시고 함께하시며 섭리하여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단 쌓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도시에서는 더욱 그러한 정신으로 이 절기를 지키는 주일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년 전반기를 돌아볼 때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참으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좋았던 사건들... 좋지 않았던 사건들...
우리는 그 많은 사건들 속에서 우리의 죄인됨과 연약함만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으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7월 첫주,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한해의 절반을 보내고 이제 또다시 절반을 시작하려는 마당에
우리는 성찬 예식을 가지려합니다.

우리가 다시 후반기를 시작하는 초입(初入)에 성찬 예식을 가지려 하는 이유는
내 힘으로 2005년 후반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힘으로 후반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성찬 예식을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1982년 남미 페루의 리마(Lima)에서 전세계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채택, 발표한
세례(Baptism) 성찬(Eucharist) 및 교회직무(Ministry)에 관한 문헌을 가리켜
페루 리마에서 결의했다고 해서 『리마문서』(Lima Document)라 하기도 하고
토의된 주제인 세례(Baptism) 성찬(Eucharist) 교회직무(Ministry) 이 세개의 첫 글자를 따
『BEM 문서』라 하기도 하는데
이 『리마문서』에는 세례에 관한 항목이 21개
성찬에 관한 항목이 33개
교회직무에 관한 항목이 54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성찬에 관한 항목 33개를 대별해 보면 다시 5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찬
둘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찬
셋째는 성령의 “초대”로서의 성찬
넷째는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찬
다섯째는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찬...
이렇게 크게 5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첫번째 것인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찬이란
그리스도의 사건을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구원 역사에 대한 “감사”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다음 두번째 것인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찬이란
그리스도의 사건을 단순한 과거적 구원 사건으로 회상하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념할 때에 놀라우신 구원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구원 역사에 대한 “기념”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며...

다음 세번째 것인 성령의 초대로서의 성찬이란
그리스도의 사건을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러한 새하늘 새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되고
모든 분쟁과 분열 나누임이 화해와 일치 하나됨으로 나아가게 되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구원 역사에 대한 “초대”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다음 네번째 것인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찬이란
그동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구원 역사에 대한 수직적인 의미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구원 역사에 대한 수평적인 의미를 다루는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통해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서로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각자가 받은 다양한 은혜와 은사들을 주님의 몸을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하게 하기에
진정한 성도의 교제란 성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교제”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마지막 다섯번째 것인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찬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하나님 나라를 성찬을 통해 미리 경험하게 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찬이라고 하는 거룩한 식탁에 통참한다는 “식사”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성찬이란 거룩한 식탁이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구원 역사에 대한
감사와 기념과 초대와 교제와 식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찬이란 참으로 거룩한 식탁 일 뿐 아니라... 신비스러운 식탁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거룩한 식탁이나 신비스러운 식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식탁과는 차원이 다른 식탁을 소개합니다.

구약 사무엘하 9장을 보면 다윗이 왕이 된 후 어느 날 신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그때 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이렇게 사울의 집에 남은 유족을 찾으려는 이유는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10년 동안이나 자기를 괴롭혔기 때문에
끝까지 찾아 복수하려고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친구인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절뚝발이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부릅니다.
그러나 이 므비보셋은 영문도 모른채 두려워 떨며 다윗 왕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아마 므비모셋은 다윗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선하게 대하는 척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

그러나 다윗 왕은 그를 진심으로 안심시킵니다.
그리고는 죽은 사울 왕의 종 시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과 그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다윗 왕은 친구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이처럼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에게 속하였던 땅도 므비보셋에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또 사울 왕의 종 시바도 재산 관리자로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무비보셋을 항상 왕궁으로 초대하여 왕의 식탁에서 먹게 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화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실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의 식탁은 어떤 의미의 식탁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 식탁은 보통 이상의 식탁, 특별한 의미의 식탁,
특별한 배려의 식탁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이런 식탁도 있습니다.

식탁은 평범한 식탁입니다.
식탁에 차려 놓은 것도 평범합니다.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도 평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식탁에 아주 특별하신 분이 초대받아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그 식탁은 보통 식탁이 아니라 특별한 식탁이 되었고
거룩한 식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식탁이 무슨 식탁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이어 세관에 앉은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아마 이 세리 마태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자기 집에 친구들도 초대하고
또 예수님도 초대하여 함께 식탁에 앉게 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마태복음 9:10-11).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 식탁이 세리와 죄인들이 앉아있기에 더러운 식탁이라 보였지만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예수님이 앉아 계셨기에
더러운 식탁이 아니라 거룩한 식탁이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식탁이든지 그 식탁에 예수님이 계시느냐 안계시느냐 이것이 문제이고
예수님의 정신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 식탁에 있으냐 없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으면 그 식탁은 거룩한 식탁이고
이것이 없으면 그 식탁은 보편적 식탁이며
이것과 반대면 그 식탁은 더러운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맨 마지막장인 21장에 보면 이런 식탁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디베랴 바닷가 백사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아주 특별한 식탁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가정 집도 아니고 빈들도 아닌 백사장에서의 식탁이어서 특별한 식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식탁이 특별한 식탁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한 식탁이어서 특별한 식탁이라는 것이며
예수님이 초대한 식탁이어서 특별한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대한 식탁은 특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이기에 특별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식사를 할 수 있기에 특별하며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 배려를 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에 특별한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이 식탁이 바로 그런 식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한 식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한 식탁이었습니다.

오늘의 설교 본문 조금 앞쪽인 17-19절 말씀입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이 말씀을 보면 그 식탁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마련한 식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식탁, 그 특별한 식탁에 제자들이 초대 받습니다.

이 식탁이 특별하다는 것은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마련하신
뭔가 특별한 말씀을 하시려고 마련하신 식탁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특별한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문을 여십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3년 동안 같이 제자로 활동했던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팔 자가 있다는 말에
그들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가 근심에 쌓였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그때 가룟 유다가 말합니다. 25절입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상황은 숨막히게 돌아갔습니다.
본문은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때 가룟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라도 상황이 이쯤되면 그 식탁에 그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나가자
예수님은 그 식탁에서 떡을 들고 축복 기도를 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눈으로 보면 분명히 떡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내 몸이라 하시면서 그 떡을 나눠 주십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 식탁은 정말 이상한 식탁이었고 특별한 식탁이었으며 거룩한 식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떡을 나눠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특별하고 이상하고 거룩한 식탁에서
예수님으로 부터 자신의 몸이라 말씀하시는 떡을 받아 먹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먹기는 떡을 먹는데.. 그 떡이 주님의 몸이라 말씀하시면서 주신 그 떡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 갔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있으니... 이번에는 잔을 가지시고 축복 기도를 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상한 식탁 특별한 식탁 거룩한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어 자신의 생명이 그들 속에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도 초대 하십니다(요한복음 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거룩한 식탁에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거룩한 식탁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로 거룩한 식탁에 참여해야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식탁은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식탁이 아니며 또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무한히 흘러 나오는 영광의 식탁
    은총의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회개하는 마음과 자세로 거룩한 식탁에 참여해야만 하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셋째는 헌신하는 마음과 자세로 거룩한 식탁에 참여해야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때
    이 식탁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식탁 거룩한 식탁이 될 줄 믿습니다.
(임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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