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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눅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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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표현이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도 나옵니다.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만나게 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거지였습니다. 그가 주님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2000년 전 바디매오에게 질문하셨던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갖가지 인생의 문제 때문에 수고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찾아오셔서 동일한 마음, 동일한 사랑으로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원하시는 주님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수고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하늘의 쉼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건성으로 듣지 마시고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바디매오가 믿음을 가지고 아뢰었던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소원과 바람을 주님께 말씀드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1분간의 시간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시는 주님께,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1분간 묵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 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처럼 여러분들의 소원과 부르짖음을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제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을 여러분들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듣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혹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양해하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시간 저는 제 둘째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원래는 중학교 1학년이어야 하는데, 지금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또래에 비해 키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6학년에 다니고 있지만, 키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생후 9개월이 되었을 때 레미콘 차에 치이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후유증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장이 매우 더딥니다. 정신이나 머리는 아주 건강하고 뛰어난데, 키가 잘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1,2학년 때부터 “땅콩”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씩씩거리면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태권도 도장에 보내줘.” 왜 그러는지 물었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권도를 해서 나보고 땅콩이라고 놀리는 아이들 혼내주게.” 참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아직 어렸고, 때가 되면 크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요즘처럼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 둘째가 나이에 비해 심지가 견고하고 속이 깊어서인지 저희 부부를 힘들게 하지 않고 지금까지는 잘 참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큰 아픔과 진통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키 때문에 얼굴에 기쁨이 없고, 기가 죽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편하게 지내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부모로서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상할 수가 없습니다.

몇 주 전에 저희 가족이 동네 가까이에 있는 놀이동산에 놀러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원했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입장하자마자 가장 먼저 뛰어간 곳이 범프카를 타는 곳이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와서 타려고 했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번번이 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이제는 키가 컸기 때문에 충분히 범프카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둘 째 아들의 얼굴이 키를 재는 곳에 서는 순간 굳어졌습니다. 당황해 하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저희 부부를 보고는 이내 씩- 웃으며 다른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아프고 쓰렸습니다.

며칠 전에는 둘째와 셋째를 데리고 놀이터엘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교 3, 4학년 동생들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것을 보고는 이내 얼굴이 땅으로 향하고, 풀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밖으로는 모른 척 했지만,속가슴이 그렇게 미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속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둘째가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세상 모든 친구들이 땅콩이라고 놀리고 무시하고 멸시해도, 그것 때문에 결코 무시하지도, 놀리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모든 친구들이 왕따시켜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그 믿음으로 이 어렵고 힘든 환경을 극복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이 같은 아픔과 고통을 통해 자신보다 힘이 없고 연약한 이웃들과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사랑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을 갖게 하옵시고, 불쌍한 이웃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훈련의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인지를 철저히 깨달아 항상 겸손하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이 어린 시기에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동일한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한 동안 이 같은 기도내용을 가지고 제 둘째 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키가 작아서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보는 부모로서 가슴이 찢어질 만큼 마음이 아프지만, 그냥 단순히 성장시켜 달라고, 빨리 자라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아이가 더 이상 그 같은 문제 때문에 힘들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그 같은 환경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자신보다 더 약한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깨달아 더욱 겸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의 터가 더욱 굳어지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보았을 때, 그것이 제 둘째 아이에게는 더 큰 복이 된다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처럼, 당장에 필요한 것보다 보다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된 배경에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이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소원한 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거지였기 때문에, “보는 것”이외에 필요한 것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입을 것과 마실 것, 심지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러한 것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같은 것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는 것”을 원했습니다. 광명을 구했습니다. 밝은 빛을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이 더 중했다면, 아마 그는 그러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것들 대신에 “보는 것”을 구했습니다. 바디매오에겐 “보는 것”이 어떤 것보다 근원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바디매오의 대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것은 무엇인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소원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거칠고 험하고 좁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제대로 된 믿음의 생활을 꿈꾸며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보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절실한 것은 마땅히 보아야 할 대상을 놓치지 않고, 지나치지 않고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의 소원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안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을 제대로 볼 그때에야, 우리 모든 삶의 터전이 천국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우리 삶의 자리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바뀌며, 험하고 거친 세상에 살고,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사도행전 6-7장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을 범했다는 이유로 붙잡혀와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고소를 당하여 끌려와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났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아시는 것처럼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은 도저히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로 내리치기 위해 유대 율법에 따라 자기 머리통만한 크나큰 돌을 하나씩 들고 성난 군중들이 둘러써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절망의 자리입니다.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고통의 자리입니다. 한숨과 눈물의 자리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고,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없는 죽음이 자리입니다. 사색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은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스데반은 그 같은 자리에서도 조금도 절망의 빛, 죽음의 빛, 사색을 띄지 않고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하늘 영광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사랑의 주님, 그러나 결국에는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도 부활하신 소망의 주님을 그가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는 성난 군중의 얼굴을 보는 대신에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절망 대신에 소망을 보았습니다. 곧 그에게 던져질 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은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엄청난 고난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폭도들의 저주의 함성도 스데반을 두렵게 하거나 떨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엄청난 분노의 돌들도 스데반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조차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아주 재미있고 도전적으로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이라고 하는 책이다. 그 책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일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자신이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 눈물나는 환경, 절망적인 환경, 속상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지만,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얼마든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다. 두려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용기를 선택할 수 도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고, 생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스데반은 소망을 선택했습니다.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그 분을 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 같은 고통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주님을 선택하면 살아나게 될 줄 믿습니다. 슬픔이 바뀌어 찬양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양과 기도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마13:16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는 것은 복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그렇습니다. 보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히12:2)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두 번째 대상은 연약하고 불쌍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도움의 손길과, 따뜻한 위로와 격려,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고 있는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주목하여 바라보는데서 우리의 사랑은 출발하며, 거룩한 능력이 펼쳐지게 됩니다.

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을 준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앉은뱅이에게 궁극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었던 중요한 단서가 사도행전 3: 4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베드로는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앉은뱅이 앞을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사랑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 같이 주목하여 보았기에 베드로는 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고, 진정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같이 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며, 앉은뱅이의 손을 힘차게 잡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IMF보다도 더 힘든 시대라고 말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는 갖가지 인생의 문제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눈물과 한숨,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그들의 슬픔을 우리의 슬픔으로 느낄 수 있는 심장이 필요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할 때, 제 둘째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주 신이 나서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친구 생일잔치에 초대받아가지고 지금 이곳에서 파티하고 있어” 기쁨에 겨워서 신나게 자랑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기뻤는지 모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들을 초정하여 제 아들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닦아 준 그 아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둘째 아이 생일이 되면, 그 아이 불러서 근사하게 대접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다가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때, 주님은 너무나 기뻐서 그 같은 삶을 사는 우리의 삶을 살피시고 더욱 큰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굳이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들먹이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보고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중요한 이유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목하여 보지 않을 때, 바른 신앙생활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을 깊게 만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자만이 전지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크나큰 죄인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깊고 큰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그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최근에 Passion of Christ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영화를 보고 애인을 살해한 사람이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애인을 살해하고 숨어 지냈는데, 그 영화에 나오는 주님의 고난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의 죄를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자가 자신의 흠과 티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적 용어가 “믿음”, 혹은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단어들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믿음생활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만약 제게 그 같은 질문이 주어진다면, 간단히 “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환경을 보지 않고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과 그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을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살피는 것이 믿음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지 않거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그들의 아픔을 보지 않거나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살피지 않고 함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보고, 이웃을 보고,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이웃의 아픔을 주목하여 보지 않고, 자기 손에 묻어 있는 피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않는 사람은 살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주목하여 보지 않으며,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와 손에 묻어있는 피를 보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을 만난 후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니라.”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같은 모습을 사울의 중간과정, 혹은 제3의 실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은 눈을 뜨고 보기는 했으나,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엉뚱한 것, 잘못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박해자가 되었고, 복음의 훼방꾼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아나니아를 만나 그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과 같은 것이 벗어지고 다시 보게 된 후, 그는 보아야 할 대상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생명과 진리, 복음을 보았습니다. 진리를 몰라 방황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을 정확히 살피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사도가 되어 힘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기뻐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힘 있게 외쳤습니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핍박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복음 전도자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저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바로 이 어정쩡한 상태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저를 포함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눈은 떴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눈은 떴는데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은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읽는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하는 데, 우리의 이웃을 주목하여 보지 못합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합니다. 예배에는 꼬박 꼬박 참여하는 데,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수많은 종교적 행위가 있고, 그곳에 빠짐없이 참여하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신 예언의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움이라.”(사6:9-10) 주님도 마13:1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처럼,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진단할 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절박한 문제는 “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게 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처럼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내가 보고 싶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너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한 주만을 바라보고 승리하며 사는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내 백성들의 눈물과 아픔을 주목하여 보고 그들의 아픔과 한을 내 심장을 가지고 쓰다듬어 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너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죄 많은 인생인지 정확히 살피고 깨달아, 끊임없이 너희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싶다.”

이 같은 주님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고난주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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