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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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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거룩한 주님의 전에서 주님의 이름 부르며 예배드립니다. 죄인으로서 날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이 주님의 전에 나올 수 있음 자체가 놀라운 은혜인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십자가의 보혈로써 죄 용서하시고, 놀라운 축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귀한 말씀 주시옵소서.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모든 심령을 감찰하시고, 모든 상한 자를 고치시며, 슬퍼하는 심령을 위로하시는 주님, 오늘 예배를 주님 홀로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O Loving Father God. At your house, we worship you in calling your holy name. As sinners, we believe the fact we are here to meet you itself is an amazing grace. We thank you for calling us, forgiving us with the precious blood of the Cross, blessing us richly. We hope to get gracious Word today. Help us to live according to the Word. O Lord who understands all the souls, heals the sick, and comforts the troubled, be your name glorified in this worship. In Jesus' name, Amen.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Matthew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주님께서 또 다른 ‘은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지난주는 마태 5:13절을 통해 우리가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빛”입니다.

소금과 빛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영적으로는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설교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는 높은 ‘스탠드’(등경) 위에 둡니다. 따라서 빛 된 우리도 “사람들 앞에 우리의 행실을 드러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빛’은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빛’처럼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무도 빛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 행동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하는 행동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어쩔 수없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산 위에나, 등경 위에 같은 데 올라서는 빛처럼, 우리 자신이 보다 적극적인 “드러냄”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데 자리 잡은 등대가 제 구실 하는 것처럼, 우리는 높은 자리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높은 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성공’일까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듯, “성도는 세상에서 성공할 필요가 있다. 성공한 다음에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이 겸손해 봐야 누가 알아 주냐?”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은 소위 ‘성공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명령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성공”이 높은데 일 수 없습니다. 보다 다른 영적인 뜻이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되게 오랫동안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그 “높은 곳”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3:19)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또 “빛의 속성”을 분석할 이유가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계셨을까요?

빛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빛이신 것처럼, 너희도 빛이다”라는 뜻임을 알겠습니다.

우리 중 이런 질문을 품은 사람도 있겠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속성인 ‘빛’이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아무리 ‘착한 행실’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비교나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두 종류의 빛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빛은 아무래도 ‘차등’의 빛일 것이다. 이런 추측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아주 높습니다. 얼마나 높은가 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닿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8).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Matthew 5:48).

여기서 ‘온전’이라는 말은 ‘완전’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완전함. 이것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점도 흠도 없는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제직을 세울 때 제시된 ‘기준’을 살펴 봅시다.

1. 장로의 첫 번째 기준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디도서 1:6) 합니다.
2. 감독의 첫 번째 기준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디도서 1:7) 합니다.
3. 늙은 남자 그리스도인도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디도서 2:2) 합니다.
4. 늙은 여자 그리스도인도 ‘행실이 거룩해야’(디도서 2:3)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특별히 ‘제직’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요구하는 ‘기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완전’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점도 흠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에 닿도록 ‘온전’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죄인 아닙니까? 세상에 누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완전하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그런 불가능한 것을 왜 주님께서는 요구하셨을까요?

완전하지 않을 때, 인간은 바르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고사하고 지금 생활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배운 대로 하자면, “천국 갈 조건이 완전함이라면, 지금 생활에서도 완전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 생활에서도 천국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지 않을 때, 사람은 서로를 상처 주는 것입니다. 말로, 행동으로,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서로를 괴롭게 합니다. 서로를 찌르는 ‘가시’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참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고민이 여기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살기로 하자는데, 그렇게 살아서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함.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완전함이 필요합니다. 다 되었는데 1%가 모자란다. 그러면, 그 모자란 1% 때문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써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죽도록 노력해 보아야, 그건 정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100% 완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우리는 단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완전함에 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길”입니다.

두 손 높이 들고 주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다시 “빛” 문제로 돌아갑시다.

여기서 우리는 해와 달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해가 될 수 없다. 다만 달일 뿐이다.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의 역할이다.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빛’은 확실히 주님의 속성인 ‘빛’입니다.

우리를 ‘빛’으로 불러주신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소금’도 ‘빛’도 순도(純度)는 100%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으로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 착한 행실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일하기는 우리가 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말입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우리의 일을(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도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나 누구의 이름으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순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 아니면 순수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동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이것은 내 지혜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께 배웠을 뿐입니다.” 해야 합니다.

“나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시려거든 하나님께 하십시오.”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빛이 되어, 빛을 비추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 하신 것은, 우리가 그처럼 스스로 일어서서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는 인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사람을 원하실까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하나님-의존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빛을 품고, 그 빛을 발산하는 사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창작’해 낸 어떤 빛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그 빛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빛’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속성’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빛이 되라”는 말씀은 “빛을 담아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담고 살아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빛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이질적 존재’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태어나서 죄를 짓고 살아온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로 난다는 것은 “거듭남”을 말합니다. 두 번째 나야 합니다. 이 때는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빛으로 거듭나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우리 행실이 ‘착해야’ 하겠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선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로마서 12:2)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착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행실”입니다. 그런 행실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니지만, 자격도 없지만, 우리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1. 우리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오직 주 예수님의 이름을 내야 하겠습니다.
2.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입니다.
3. 끝까지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4. 거룩한 행실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5. 전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등대를 생각합니다. 등대는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등대는 그 자체로 아무런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등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빛을 품은 등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빛 자체”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등대”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완벽함을 요구하지 말라! 그런 excuse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등대이면서 동시에 등대가 품고 있는 빛 자체여야 합니다.

등대가 빛과 ‘괴리’가 있다면, 우리는 등대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빛 없는 등대가 어떤 ‘구실’을 한다면 모를까, 우리는 빛을 품은 등대로서 ‘빛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큰 바위얼굴을 기다리던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 자체가 되었습니다. 빛을 품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던 우리가 빛 자체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런 ‘완전함’에 이르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오늘도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빛이 소금과 같은 것은, 소진하면서 그 사명을 다한다는 데 있습니다.

빛이 소금과 다른 것은, 소금은 낮은 곳으로 자리 잡는데, 빛은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하는 일에 우리가 설 곳은 어디입니까?

모세를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도자로서 높은 곳에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어 세우려 하셨습니다. 입이 둔한 자라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어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 받을 때,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겸손’이라는 ‘가면’을 써서는 안 됩니다. 겸손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야 빛을 발하는 미덕입니다. 물론 여기서 ‘높은 자리’는 사회적 성공이 아닙니다. 영적인 높은 차원입니다.

나는 금문교회 성도 여러분이 영적으로 참 높은 차원에 올라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보는 사람들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참된 평안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이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2주일 후에 나는 이형호 집사님과 함께 콜로비아로 떠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높은 곳”은 콜롬비아가 되었습니다. 가서 무엇을 전할까? 숙제입니다. 두려움 대신 ‘기쁨’을 품고 갑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높은 데 올라가라고 해놓고 흔들지 마십시오. 대신 기도해 주십시오. 바른 빛을 제대로 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금문인 여러분은 여러분이 선 자리에서 빛입니다. 우리 모두는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음성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 주님께서 소금이셨듯, 오늘 우리가 소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빛이셨듯, 오늘 우리가 빛입니다.

우리의 죄가 부끄럽지만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세상의 빛”입니다.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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