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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의와 왜곡에 대하여 (삼하 10: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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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부터 장마가 시작이 된다는 일기예보입니다만 긴 장마와 더위 속에서도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자리가 강건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제안을 드렸습니다. 100년만의 더위가 올 것이라는 억측속에서 어떻게 이 더위를 피해 볼까? 즉 피서는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위를 이길 수 있을 까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더운 여름하면 저처럼 견디기 힘든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영하 10도의 추운 겨울이나 요즘처럼 영상 35도의 찌는 듯한 여름이나 제 의복에은 큰 변동이 없습니다. 있다면 입고있는 양복이 추동복에서 춘추복로 바뀌는 정도입니다. 여름이 무척 힘들고 길게 여겨지는 저입니다만 그렇다고 이 여름을 어떻게 피할까 고민하기 보다는, 이 여름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보내며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가을을 기대할 수 있을까를 간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마치 프로야구나 축구선수들이 봄 시즌을 끝내고 무더위와 싸우며 땀을 흘리는 양만큼 가을 시즌이 풍성한 기록으로 보답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평안의 성도들도 이 긴 여름을 승리하여 육적인 강건함 뿐 아니라 영적인 부분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의외로 오해 받거나 또 오해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듣는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해하여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대부분 다 겪어 보았을 것입니다. 오해 때문에 힘들어하고 심지어는 그것 때문에 갈라서기도 하는 일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목회자들이 설교를 하다보면 그 설교로 인하여 성도들 중에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 얘기는 꼭 나한테 하는 이야기 같은데,,, 우리 지역장이 언제 고자질했지...예배만 끝나봐라. 한 바탕 붙으리라.... 이런 식이라면 정말 힘든 상황이 연출되기 마련입니다. 예배 시간 내내 꽁하고 있으니 은혜는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제가 27년간 목회하면서 설교에 있어서 한가지 분명한 신념은 어떤 특정 성도나 개인을 들으라고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결코 그 설교자는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좋은 설교도 은혜로운 말씀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교회 부흥회를 가다보면, 가끔은 이런 저런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이 사정을 미리 이야기해 주려고 하는 때가 있읍니다만, 그럴때 저는 단호히 사양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마음껏 선포해야 할 제가 그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혹은 편견을 갖는다면, 저는 설교자로서 이미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기에 그날의 설교는 살아있는 말씀을 선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물질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물질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강사님, 이번 집회에 적어도 1억원 정도는 헌금이 나올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목사님 우리교회에 아무개 장로, 아무개 권사가 아주 속을 썩이는데, 이번에 좀 해결을 해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설교자도, 성도도 그리고 교회도 모두가 실패자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어쩌면 저 말씀은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인고,,, 그렇게 생각이 되는 시간이 온다면, 그 날은 은혜받는 날이요, 수지맞는 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가장 행복하고 은혜가 되는 시간이 언제인고 하면 "이 말씀이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일까? 몰래카메라로 나를 쫓아다니지 않고서야 저렇게 정확하게 나에 대해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하는 날인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는 시편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 될 때 은혜가 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나 예언자들이 고민한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바울사도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결국 그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빼앗길 수 없는 중요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선포하며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외에는 다른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그는 단언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동편지역에 있는 암몬의 왕이 죽었습니다. 왕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일입니다. 그 나라에게 있어서는 국장입니다. 이웃나라 왕의 입장에서 조문을 보내야 하겠는데, 다윗은 하눈이라고 하는 왕의 아들이 왕이 된 소식을 듣고서 그에게 소식을 보냈습니다. 내가 부친에 대해서 그가 나에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나도 정성을 다해서 조문을 했으면 좋겠다. 다윗은 신하들에게도 자기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암몬의 조문사절을 보내자.

그러니까 당연히 조문사절단도 격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만약에 미국의 대통령이 죽었다면 한국에서 조문사절을 보낼 때 아마 미국 대통령 정도라면 우리나라 대통령이 직접 갈 것입니다. 일본의 수상이 죽었다고 해도 현직수상이라면 당연히 대통령이 직접 갈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일본이나 미국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외교의 최고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저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나라에 왕이나 대통령이 죽었다고 하면 아마 외교통상부 장관이나 그 지역의 대사를 특사로 보내는 정도 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어느 정도 관계는 있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문을 보낼 때 다윗왕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조문사절,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 왕의 마음을 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조문사절단이 암몬이라고 하는 이웃나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암몬의 방백들이 하눈이라고 하는 새로운 왕에게 조언을 하기를 왕이여, 지금 이웃나라 이스라엘왕의 사절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다윗이 왕의 부친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절단을 보냈다고 왕은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기는 다윗이 그 심복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엿보고 탐지하려고 보낸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전이해가 중요합니다. 선입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우리 성도 한 사람을 만나려고 할 때 처음 만나려고 할 때 누군가 저에게 조언을 해 줍니다. ‘목사님 지금 누구를 만나려고 하지요?’ ‘예, 제가 몇 시에 만나려고 약속을 했습니다.’ ‘목사님 사전에 조금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무슨 이야긴가요?’ ‘그 사람 이런 이런 사람입니다.’ 쭉 이야기 해 주고 그런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불순한 사람입니다. 미리 알고 만나십시오. 그런 정보를 주었다면 내가 그 사람을 만날 때에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을 만나면서 그 선입견이 작용을 할 거예요.

그 사람은 조금 불순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는데, 이 사람은 조금 그렇다는데 선입견을 가지고 그를 대한다고 하면 좋은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왕이 암몬의 왕에 조문에 대해서 마음과 뜻을 다해서 정성껏 조문을 했는데 그 암몬의 신하들이 악의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악의적인 조언에 대해서 왕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왕은 다윗의 조문사절단들을 잡았다고 그랬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체포했다는 이야기지요,

신하로써 이웃나라의 사절로써 정중히 대접을 한 것이 아니라 포로처럼 잡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수염의 절반을 깎아버렸다고 그랬습니다. 수염을 기르던 나라는 우리나라, 중국, 중동지역입니다. 수염이라고 하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 수염의 절반을 깎을 때 보기 좋게 깎았겠습니까? 그냥 험하게 막 깎아버렸을 거예요.

마치 교회 나가는 아내가 미워서 아내가 잠자는 사이에 남편이 가위를 가지고 머리를 싹둑싹둑 잘라 놓은 거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 2- 30년만 해도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아내들이 많았어요. 자고나서 보면 머리가 없어요. 머리가 휭해서 거울을 보면 머리를 보면 가위로 막 잘려져 있어요. 난도질 당한 거예요. 그래도 수건을 쓰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집사님들, 권사님들 중에도 있었어요. 대단한 일이지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신앙이 중요하다고 하면 그런 것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군인들이 군 부대 안에서 이발을 하는 것은 서로가 깎아주는 것입니다. 기술도 없는 친구들이 서로 깎아주다 보니까 부대 안에서야 너나 나나 비슷한 모습이니까 넘어가지만 휴가를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발소에 가서 다시 이발하는 거예요.

친구를 만나기 전에 이발소를 가는 거예요. 이발소 가기 전에 친구 안 만납니다. 너 가서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이발소 갔다와서요. 사회 나와서는 벌써 이발부터 다시 합니다. 그러니 머리를 해 놓았는데 그 머리로 수건 쓰고 교회에 나온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머리 잘린 다음에 머리 다시 자라서 다시 펌 한 다음에 다시 교회가겠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일인데, 수건을 쓰고 교회에 나오는 그 신앙에 선조들의 모습들을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수염을 절반이나 짤라버렸는데 성경에 보니까 의복에 중동볼기까지 잘라버렸다고 그랬습니다. 중동지역은 우리가 입는 의복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주로 홑옷을 입었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통으로 된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 중동지역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식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게 더운 나라에서 시원하고 전신을 태양열에서 가리워주기 때문에 두가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과거에는 그들이 이 통으로된 옷을 입으면서 속옷을 입지 않았어요.

속옷을 입는 그룹은 딱 한 그룹 있었는데 제사장 그룹만 속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시원하기는 하지만 통으로 된 옷을 입었는데 엉덩이가 나올 정도로 옷을 잘라버렸으니까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얼마나 모욕적인 일입니까?

수염을 자르고 엉덩이가 보이도록 그 엉덩이 중동볼기를 옷을 잘라 놓았으니 그것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왕이 신임해서 보낸 최고의 관리들을 그렇게 해 놓았으니 얼마나 모욕적인 일입니까?

그들이 국경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윗왕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이 보낸 조문사절들이 수염이 절반이나 깎이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라진 상태에서 모욕을 당하고,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었습니다. 옷이야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 바꾸어 입으면 되지만, 그 잘라진 수염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윗왕이 국경지역에 있는 여리고라고 하는 성에서 수염이 자라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지 말고 거기서 체면을 세울 때까지 거기서 지내라고 했습니다. 다윗왕이 신하에 대해서 배려하는 깊은 마음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그런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왕의 선의와 암몬왕의 신하들의 그 잘못된 조언을 듣고 행동하는 암몬의 하눈왕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때때로 우리의 선의가 이렇게 악의적으로 해석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악의적 왜곡에 대해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악의적 왜곡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했던 창세기 3장 1절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고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먼저 창조해 주시고, 사람을 제일 나중에 지으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땅에 모든 것은 아담과 하와의 축복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바라보는 것마다 대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생각하면 찬송이요, 하나님만 생각하면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단 1%도 그들은 왜곡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선물로 일구어 놓은 것이다. 단 한가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들은 주님의 말씀, 제안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수용했습니다. 단 한 번도 그 말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장 1절에 보니까 뱀이 어느날 하와에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약의 상징으로써 그것은 손을 대지 말라고 했고 내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영어성경에 보면 You must die. 단 1%도 죽는 일에 예외가 없음을 말하는 100%를 말하는 거지요. 그들은 그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가졌습니다.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면서도 그들은 행복했고, 그 말씀을 지키면서도 그들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뱀이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먹지 말라고 그러시더냐?라고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 질문 속에는 이미 함정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지요.

제가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옛날에는 LG, 삼성, 대우전자 대리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70년대 이야기입니다. 리어카에 선풍기, 작은 텔레비전, 작은 세탁기, 조잡한 단계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가정에 필요한 전자제품들이었습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이런 것들을 리어카에 싣고, 그리고 그 귀 따거운 마이크를 가지고 다니면서 동네동네 들어와서 라디오 사라고, 텔레비전 사라고, 전기밥솥 사라고 광고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모여들어서 그 리어카 뺑 둘러서서 만져 보면서 그 아궁이에서 연기내면서 밥하던 사람들이 이것은 전기만 꽂으면 밥이 저절로 된다고 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황홀합니까? 야, 우리도 전기밥솥 하나만 사면...옛날엔 전기밥솥 하나만 사더라도 1- 2년씩 서로가 계를 해 가지고 곗돈 부어서 라디오 사고, 텔레비전 사는 시대였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어서 이것저것 만지고 들어오는데 리어카 주인이 집으로 말하면 대리점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 분이 딱 사람을 보고서 몇 사람을 골라 잡습니다. ‘아줌마는 가요!’ 그러면은 그 사람은 깜짝 놀랍니다. ‘사지 않을 사람은 가!’ ‘내가 왜 안 사는데?’ 그러면서 화를 냅니다. ‘안 살 거면 만지지도 마라.’ 그러면 자존심이 생겨서는 결국은 하나 사지요.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 탁월한 상술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살 생각도 없고, 살 능력도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마니까 오기로 사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그 때 학생 시절이었지만 그 사람을 보면서 대단한 심리학의 전문가다. 제가 심리학을 나중에 배우고 보니까 그 사람은 심리학의 전문가더라구요. 자존심을 건드려 가지고 사게 하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존심이 있어요. 그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도 감히 하나님이 다 먹지 말래. 고 한 가지만 먹지 않아도 행복했고, 다 풍성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 그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그 한가지 그것도 먹지 말래?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에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가 대답합니다. 내가 그걸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 영어성경을 보면 You will die. will이라고 하는 것은 50%입니다.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간사한 질문 하나에 하와가 넘어가 버렸어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살았는데 50%는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대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무섭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탄의 도구들이 우리를 처음부터 넘어뜨리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의 사이에 의심의 쐐기를 박고 조용하게 들어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이단들이 여러분들에게 우리는 이단입니다라고 간판 붙이고 들어오는 것 보셨습니까? 조용조용 비밀비밀 당신만 아세요. 집사님만 아세요. 권사님만 와 보세요. 그러면서 그들은 모임을 확장해 나갑니다.

오늘 악의적인 왜곡을 통해서 하와는 뱀의 악의적 왜곡에 그냥 넘어가버린 격이 되었습니다. 회의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왜곡에 대해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안죽을 수도 있겠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뱀이 거기에다가 확신을 줍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 이제는 뱀의 말이 굉장히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졌어요. 목사의 말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져야 하는데, 목사의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단의 말이 우리를 왜곡하고, 잘 못된 길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말이 굉장히 비중이 커지기 시작을 했어요.

그 때는 목사가 권면해도 듣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이것이 과정과정 보면 천천히 보입니다. 뱀이 말합니다. 결코 죽지 않아. 이제는 엄청난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비중 있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악을 알게하는 동산 중앙의 나무를 쳐다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지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비중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뱀의 이야기가 그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무섭지 않아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냥 믿음으로 신앙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살도록 놓아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기도하려고 하면 더 말씀으로 살려고 하면, 더 신앙으로 살려고 하면 사탄마귀는 극성을 부립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에서 멀어져 보세요. 사탄 마귀는 쳐다도 안 봅니다. 왜? 가만 놔둬도 죽을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사탄 마귀는 긴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러한 악의적 왜곡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런 악의적 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도전과 유혹에서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25살 젊은 나이에 중국 내지 선교의 평생을 헌신했던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지금 중국으로 보면 동해안 벨트는 저 위에 북경, 청도로부터 상하이, 광주, 홍콩까지 세계 어느 도시에도 못지 않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면 너무나도 어렵고, 문화시설이 주어지지 않은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생을 선교사로 보내면서도 늘 기쁨과 감사가 그의 삶 속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늘 그를 보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일생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악회에서 연주자가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하듯이, 연주자가 음악회가 끝난 다음에 조율도 하지 않은 악기 가지고 연주 하다가 ‘어, 이거 음이 안 맞네’ 그리
고 음악회가 끝난 다음에 조율을 한다면 그 연주자는 지혜롭지 못한 연주자일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에 조율을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 지기 마련입니다. 평생을 중국 내지 선교사로, 평생을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도 평생을 선교사로, 평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지요.

니콜라스 헤르만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는 날마다 조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조율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짜증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각에 조율해 주지 않는다고, 맞춰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냅니다. 자기의 계획을 만들어 놓고 그 계획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분명한 조율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맞추어 가는 것이 정확한 조율인 줄 믿습니다. 바이올린을 조율할 때 기준이 무엇인가요? 피아노가 기준이라면 피아노의 원음을 두드리면서 바이올린의 현에 음을 맞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피아노를 조준하는 분을 보니까 피리를 하나 가지고 다니더라구요. 피리를 불면서 피아노의 음을 맞춰놓고 나머지 음들을 정리하더라구요.

그 기준, 그 음의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 조율해야 할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그 기준이 여러분의 생각입니까? 여러분의 방법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잘 못된 것이지요.
허드슨 테일러에 조율은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생을 사명을 감당하고, 평생을 감사로 살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나를 조율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왜곡된, 악의적인 왜곡된 도전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뜻에 조율된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빗나가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있다면 어떤 우리의 유혹과 어떤 인간적 도움을 위한 악의적 유혹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이 어떤 왜곡을 도전으로 다가오더라도 때때로 손해가 되는 오해와 왜곡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감당할 수 잇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왜곡과 편견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그 고백처럼 날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뜻에 조율할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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