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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 (마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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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용돈을 주면서 오락실에 가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서 오락실에 갔고 화가 난 어머니는 더 이상 용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자! 친구의 꼬임(유혹) 때문에 어머니와의 관계에 문제(결함)가 생겼고, 어머니와의 관계에 생긴 문제 때문에 용돈이 없어졌습니다(결핍). 진심으로 뉘우치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회복될 것입니다. 관계가 회복된 상태에서 필요한 용돈을 달라고 하면 다시 용돈을 주실까요? 주시겠지요. 그러나 주시면서 한 가지 다짐을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친구에 꼬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지요.

이 이야기를 아담과 하나님께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이 풍족한 에덴동산을 주시면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단의 꼬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를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자! 사단의 꼬임(유혹)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결함)가 생겼고, 이 결함으로 인해서 에덴을 박탈당했습니다(결핍).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가 채워지고 관계가 회복 된 후에도 한 가지 더 해결해야할 문제가 남았습니다. ‘유혹’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은 인간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세 가지로 핵심요약해서 그것의 해결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문제는 모두 중요하지만, 일용할 양식보다는 죄 사함이 그 보다는 유혹이 좀 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2절은 죄 사함을 간구하는 말씀이 있고, 14절은 용서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험은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상태, 곧 마음에 죄의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 회개치 않는 상태라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여 원망과 복수심이 그 마음에 남아 있다면 역시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야고보서 1:13절을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기분에 따라 가끔 해보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사람의 내면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똑 같은 조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이 됩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나 지식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죄악 된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큰 시험거리가 됩니다. 특정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도 권력과 돈과 명예와 지식은 복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식욕과 수면욕도 규모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절제력이 없고 게으름에 빠진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시험거리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유혹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내의 말에 약한 아담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먼저 하와를 유혹한 다음에 유혹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먼저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 한 번만 사단에게 절하면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정말 보호해주시나 안 주시나 시험해보도록 유혹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마음 자세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유혹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유혹합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으로, 정욕에 약한 사람은 정욕으로,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유혹합니다. 한 번만 눈감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속삭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유혹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늦둥이를 너무 사랑하고 집착할 때 그것이 그에게 시험이 되었습니다. 아담에게는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들었기 때문에 시험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너무 간교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잘 하는 사람도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한 순간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러했습니다(행 5:1-5). 때로는 동정심을 부추겨서 불쌍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느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망각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23절을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좋은 일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소명을 떠나게 한다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각종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도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 시간 있고 돈 있고 능력 있으면 반드시 타락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간 없고 돈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단이 참으로 교묘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시험들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 안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시험이 없을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기도하지 않게 만듭니다. 마치 자기는 시험에서 면제된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에 빠지게 합니다. 이처럼 시험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시험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시험이 없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하며 깨어있도록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 5:8절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아니’ 완성되었습니다. 재림하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시고 극치에 이르게 하시기까지는 사단의 통치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24시간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시험 문제에 있어서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시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낮잠을 즐긴 후 옥상에 올라갔다가 목욕하고 있는 우리아의 아내를 보고 시험에 들어 간음을 범하고 살인을 범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 조사를 실시해서 온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고 장담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닭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 시험에 빠졌었고, 예수님과 24시간 함께 있던 베드로가 시험에 빠졌다면 누가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됩니다. ‘시험이여 오라! 안 오면 내가 간다!’고 큰 소리 쳐서는 안 됩니다. 그 기백과 말은 멋있지만 가능한 시험은 당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시험에 빠져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험을 만나지도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이미 시험을 만났을 경우에 시험에 맞서서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빨리 그 상황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보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더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보디발 여사가 유혹했을 때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시험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창 39:10). 이처럼 우리는 기도하면서 시험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지 않고, 시험 당할 수 있는 환경에 처했다면 빨리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시험에 빠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며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잠시 사단의 통치를 받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승리할 것입니다. 이미 시험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한 후에 용서를 받았지만, 이 일로 인해서 평생 뼈아픈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은밀히 간음과 살인을 행하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백주 대낮에 간음하고 살인했습니다. 베드로도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평생 잊지 못할 뼈아픈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쯤 시험에 빠져도 좋은 경험 하는 셈 치는 것으로 만만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용할 양식은 오늘 하루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지난 시간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한 문제를 용서해주셔서 바른 관계가 회복되도록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유혹에 관한 간구는 앞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할 모든 요소들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결국 이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는 그 결과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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