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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핍과 결함 (마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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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개인의 심령에 이루어지면, 그 마음에 의와 화평과 희락이 생깁니다. 마음에 쌓인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밖으로도 점차 나타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점차 확대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속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주님은 세 가지 기도를 명하셨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일차적으로는 생존에 필수적인 음식물을 위한 기도지만, 물리적 세계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품들을 간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욕심으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핍된 양식들을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두 번째 기도는 오늘 배우게 될 죄 사함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 번째 기도는 다음 주에 배우게 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3가지의 기도는 접속사 ‘그리고’(카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절실한 것처럼, 죄 사함을 위한 기도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는 기도 역시 긴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는 일용할 양식이 채워지는 문제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들지 않는 일이 모두 중요합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죄 사함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도 먹고 자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은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결핍’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에 있어서도 아무런 ‘결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은 온갖 결핍과 결함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땀 흘리고 수고해야 겨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삐걱거리는 많은 결함들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결핍’과 ‘결함’ 문제로 인해 그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갈구한다면 결핍의 문제뿐만 아니라 결함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 현실을 보면, 결핍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감하지만 결함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예를 들어 신체적 건강이 결핍되어 있으면 어찌하든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능력이 되는 한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봅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에서의 결함이 있는 것은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회복을 위해 절실하게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깊이 생각하여 기도하지 않고,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위주로만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결핍’ 문제가 해소 되어도 ‘결함’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서는 그 마음에 하나님 통치로 인한 결과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말이 조금 어려워졌습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을 절실하게 간구하는 것처럼 죄 사함도 절실하게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죄’라는 단어의 어원이 ‘과녁에서 벗어나다’라고 풀이하여 하나님 마음에서 빗나간 것이 죄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옳은 설명입니다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죄’는 법을 위반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금지’하신 법과 ‘명령’하신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금지 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 죄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금지하신 법이든 명령하신 법이든 행치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죄가 됩니다. ‘죄’라고 할 때는 이처럼 두 가지 경우 모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법을 어기는 것만 죄가 아니라, 힘이 부족해서 명령하신 것을 미처 다 감당하지 못했어도 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 가지 모두 다 죄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죄를 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 대해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셨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미 ‘의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실은 여전히 하나님 자녀답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힘이 부족해서 미처 행하지 못한 것은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적질하지말지니라”(출 20:13-15) 하신 것은 금지의 법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죄라고 쉽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는 말씀들은 명령의 법인데, 이런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12절에서 ‘죄’라는 헬라어 단어의 원래 뜻은 ‘빚’입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빚으로 여겼습니다. 사실 죄는 빚과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것을 다른 것에 드리면 하나님께 빚진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믿고 의지한다면 빚을 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몸 된 교회를 잘 세우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를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했다면 하나님과 교회에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할 청지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지 못하고, 허비하거나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했다면 역시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을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빚졌다는 의식은 전혀 없고, 갚으려는 생각도 아예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술 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제사 지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기만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바로 그러한 것을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누룩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인양 당당하기만 하던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며, 인도자이며, 후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며, 인도자이며, 후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분이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 되심을 실감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간구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결코 재판관의 정죄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된 행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믿음을 새롭게 하기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는 풀리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사랑하는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 3:19절을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 징계는 죄인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려는 사랑의 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자녀가 회개하기까지 아버지로서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사람도 계속해서 죄 사함을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조건을 근거로 해서 우리 죄의 용서를 간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 역시 죄입니다. 그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죄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죄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고, 이 기도를 할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불신자용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죄 사함을 위한 기도는 범죄자가 재판관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마땅히 행해야 함에도 행하지 못했던 우리의 모든 죄 된 빚을 하나님께서 사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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