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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보하는 사람이 더 잘 됩니다. (창 2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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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해 수확이 예년보다 100배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재산이 점점 불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소와 양, 많은 종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생전에 파놓은 우물을 모조리 흙으로 메워 버렸습니다. 한편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너는 우리보다도 훨씬 강해졌으니 여기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일군 땅, 모든 것을 두고 떠났습니다. 거기 있어 봐야 득이 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랄 골짜기에 갔습니다. 거기서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이 우물은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버렸던 우물입니다. 그런데 우물을 파자 물이 콸콸 솟는 샘 줄기를 찾았습니다. 그랄에 살던 사람들이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벌떼처럼 달려듭니다.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 이 샘이 자기네들 것이라고 우깁니다. 이삭은 이 우물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우물을 팠습니다. 물맛도 좋고 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우물이 탐이 나서 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또 양보했습니다. 이삭은 자리를 옮겨 우물을 또 하나 팠습니다. 이번에는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우리 앞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도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블레셋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불이익을 당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삭도 그 인격이 고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입니다. 아마 그는 투쟁적인 사람이 아닌 선비형입니다. 그는 그들과 힘을 겨루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손해 보며 살았습니다.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은 전쟁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잘 살아보려고 하는 몸부림입니다. 죽음은 공포입니다. 종교의 역할은 죽음과 공포와 연결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온통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서로 빼앗고 서로 싸우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짓밟고 죽이고 합니다. 세상은 강한자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지켜줘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덜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아는 자는 모르는 사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래야 사회는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여러 번 토박이들에게 행패를 당했습니다. 힘으로 소중한 재산인 우물을 빼앗겼습니다. 또 산으로 쫓겨 가기도 했습니다. 힘들여 판 우물을 돌과 흙으로 메워 버렸습니다. 이런 건달들에게 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억울하지요.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삭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인격자인가를 이 성경을 통해 짐작이 가능합니다. 이삭은 거부였습니다. 요즈음 말로 재벌이었습니다. 땅도 많았습니다. 짐승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해코지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삭은 농사 짓는 기술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해 수확이 100배가 되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심 때문입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점점 재산이 불어났습니다. 마침내 거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과학자 황우석 박사를 잘 아시지요? 그의 줄기 세포 연구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윤리 논란을 겪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배아는 생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줄기 세포 연구가 결국은 인간 복제로 가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디서라도 반드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만을 바라보고 있는 난치병 환자들의 희망을 어떻게 관리 하느냐도 고민거리입니다. 불치병, 파킨슨병, 그 외 불치병도 줄기 세포를 이용해서 치료법을 개발하는데... 이들에게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빛이 스미는데 그 불을 끈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은 남이 잘 되는 것 싫어합니다.

이삭이 거부가 되었습니다. 축하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배가 아픈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지요. 우리는 남이 잘 되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 봅니다. 남의 행복이 눈꼴 사나워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어이 재를 뿌려야 속이 시원한 것이 인간의 마음일까요? 이삭은 100배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이삭은 농사 기술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다 부자이고 싶습니다. 다 1등 하고 싶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도 이삭처럼 살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힘들게 판 우물을 모조리 흙으로 메워 버렸습니다. 또 왕은 너는 우리보다 훨씬 부자이니 여기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갔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성도에게 많습니다. 괜히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사 인쇄공장을 불 지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인터넷 문화가 대단히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욕설, 비방의 글이 막 올라 옵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인의 문화수준인가 하고 걱정합니다. 대통령, 장관, 감사원장, 국회의원 등에 대해서 마구잡이로 욕하는 세상입니다. 전에 방송국 앵커였던 현직 국회의원이 “기자만 없으면 국회의원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기자였을 때 방송에서 마구잡이로 비판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왕세자비도 결국 파파라치 때문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종교, 전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비판 문화는 육성되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괴롭힘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격이 아쉽습니다. 어느 교수님은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가 대학원에서 문학평론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자네는 문학평론가가 되지 말게. 자네의 성격이나 모든 면에서 적절치 않다.”고 충고 했답니다. 문학평론, 음악평론, 정치평론, 영화평론, 미술평론, 다 좋은 것입니다. 발전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기 쉽습니다. 대부분 좋은 쪽 이야기 보다 덜 좋거나 안 좋은 쪽을 건드립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사회가 좀 따뜻한 체온을 느꼈으면 합니다. 이삭은 죄 없이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단 그가 잘 산다는 이유 뿐이었습니다. 눈꼴이 사납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부자들을 고깝지 않는 시각으로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회사는 노동자의 땀 값을 착취한 것도 있겠지요. 정권과 손 잡은 기업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후진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이 나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무조건 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이삭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남 잘되는 것 칭찬하고 성공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황우석 교수님은 줄기 세포 연구가 반환점을 돌았다고 했습니다. 대문 4개를 열었고 사리문 몇 개가 남았다고 합니다. 세계가 부러워 합니다. 윤리적 문제에 걸림돌 없이 이 분야가 빨리 성공했으면 합니다. 노벨상도 받았으면 합니다. 장애물이 많습니다.

Ⅱ. 양보해도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이삭은 빼앗겼습니다. 싸우지 않았습니다. 양보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바리새인과 싸웠습니까? 사두개인과 다투었습니까? 장로들과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왜 저러시지?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너무 약했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너무 작아보였습니다. 그렇겠지요.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내가 바로 너희들이 찾는 예수”라 하셨습니다. 때리면 맞았습니다. 욕 해도 대꾸 한 마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실패자 같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승리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악한 세력이 오래 가는 것 없습니다. 한 때는 불 일 듯이 일어나는 것 같지요. 그것은 곧 없어지고 맙니다. 선(善)은 무척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은 망합니다. 선이 승리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쫓기고 짓밟히는 이삭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물론 이렇게 살면 바보 취급 받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비웃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우리가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게” 하십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다 그런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의리의 칼을 뺀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내가 한 번 명령하면 하늘의 군대가 열두 사단이 동원된다.”고 하셨습니다. 힘이 있어도 참는 것이 용기입니다. 힘이 없어 달아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긍휼, 자비가 있습니다. 우리 양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립니다. 때리면 맞습니다. 욕해도 대꾸 마십시오. 그게 우리의 처세 방법입니다. 모으려 할 때는 반드시 흩는 법이요, 약하게 만들려 할 때는 반드시 세게 만드는 법이요, 무너뜨리려 할 때는 반드시 일으키는 법이요, 주려고 할 때는 반드시 뺏는 법이니, 이것을 이른바 숨은 밝음이다.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나니... 여기서 마음을 억제하고 정욕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하면 부러집니다. 깨집니다. 물건이나 일은 힘의 표현입니다. 힘은 강하지만 강하기 때문에 약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것이 될 수 있어도 저것은 될 수 없습니다. 빛이 곱습니다. 그러나 향기가 될 수 없습니다. 향기가 취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향기가 맛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있음은 곧 “나다 I am”입니다. 자기주장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악이 있습니다. 또 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이 선을 짓밟고 있습니다. 선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잘난 척 합니다.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누구나 짓밟을 수 있는 것이 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도 억울하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비참하게 당하신 것입니다. 항상 그는 지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변함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이삭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들은 이삭의 재산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들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깡패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100배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성경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박이들의 시기와 질투가 심했습니다. 이삭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당시엔 우물이 곧 생명의 젖줄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여러 번 빼앗았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물을 돌과 흙으로 메워 버렸습니다. 상상해 봅시다. 물이 없으면 당장 위험이 옵니다. 그리고 왕은 노골적으로 이삭에게 여기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다 두고 그랄 지방 산골짜기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푸대접을 받았으면서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보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많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늘 양보하고 손해 보는 사람입니다. 이삭은 결국 승리했습니다. 항상 불신 세력과도 늘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가 늘 양보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이기는 법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이 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습니다. 주 안에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7.10 -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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