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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등과 분열의 치유와 회복 (엡 4: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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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다보면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인간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경험할 수도 있고
분열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다 가지게 되는 경험인데
왜 이렇게 모든 인간이 상처를 주고 받고 갈등과 분열에 대한 경험을 가지게 되는가 하면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예외없이 다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뿐 아니라 또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할찌라도
그 다음!! 이 갈등과 분열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이냐?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하는 것이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이 갈등과 분열의 현주소는 인간의 내면 즉 마음입니다.
이 인간의 마음이란 아주 복잡한 곳이어서
밖으로 표출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움직임이 있는 곳이 마음입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Sigmund Freud)도 그렇게 말했지만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이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전도서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 죽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인데
유네스코 헌장(Constitution of the UNESCO)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말이
맨 첫줄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 속이다. 

이걸 보면 갈등이나 전쟁, 분열이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이것이 관건인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2-24절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새 사람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마음이... 새 사람..답게 새로워져야 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말씀은 24절에서 말씀하는 “지으심을 받은”이라는 말씀인데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하면
“지으심을 받을” 이라는 미래형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이루었다는 표현인 “지으심을 받은” 이라는 과거형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씀드리면
우리가 과거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이방인으로 살던 그 때는
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아니라!!
보혈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일뿐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었기에!!
새 사람..답게 새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아니기에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새 사람이 되었으니 새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본디 하나님은 의와 진리와 거룩 그 자체이시기에
이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된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회복된 새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새 사람..답고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원초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4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25-29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 25-29절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이웃이란 그리스도인인 이웃
즉 성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또 지체가 지체를 향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곧 몸을 거스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지체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머리를 중심으로 한 몸에 붙은 눈이 귀에게 거짓말을 해서 되겠습니까?
손이 발에게 거짓말을 하고 눈이 귀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어찌 그 지체들이 한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 할 수 있으며
그 몸이 제대로 된 몸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 의식을 가진 성도라면
서로 거짓말을 하며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서로 서로가 지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분을 내며 살다가 죄를 짓게 되면
마귀가 틈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마귀로 하여금 틈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분은 낼 수 있는 것이며
또 죄를 짓지 않는 분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보면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진노하신 적이 있고(신명기 9:8,20 시편 2:12)
예수님도 진노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복음 21:12-13).

이것을 의분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또 예수님을 따라 의분을 낸다면
그것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는 대부분의 분은
이러한 의분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불을 내뿜듯 표출하는 감정분인데
이렇게 감정에 따라 분을 내는 것은 대부분 죄로 연결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 때로 의분을 낸다 할찌라도
죄와 악에 대한 분노가 죄로 변질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고 주의해야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분을 품은 채 오래 있다 보면 그 분이 변질될 우려도 있고
무엇보다 마귀로 틈타게 할 여지도 다분히 있기 때문에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이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셋째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다시는 도적질하지 말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 남의 것을 도적질 하며 살았던 사람이 다시는 도적질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삶이 여기서 머무르지 아니하고 좀더 나아가
열심히 벌어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을 새롭게 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기 위해서 주어진 삶의 현실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살아야 하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말이라는 것은 새 사람의 특성이 아니라 옛 사람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말버릇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농담이나 더러운 농담하는 것도 고쳐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이나 오해 살만한 말을 하는 것도 반드시 고쳐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대로 선한 말을 하며 살아야 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더러운 말 중에 특히 남을 욕하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몸된 지체에게 “이 놈, 저 놈, 미련한 놈” 하면서 마구 욕을 해대는 말이나...
아니면 사람의 얼굴이 직접 눈에 안보인다고 전화 통에다가 대고 함부로 욕하는 말...
이런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특히 조심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실수로 욕을 했다든지 아니면 너무나 화가 나서 의도적으로 욕을 한 적이 있다면
나중에 반드시 회개하고 또 철저히 회개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철저히 욕한 말에 대하여 나중에 회개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 욕이라는 주제에 대하여는 3번씩이나 반복 말씀하신 것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형제 자매에게 입술로 욕한 사람이 앞으로 받게 될 형벌은
보통 형벌이 아니라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중한 벌이기 때문에
어물쩡 넘어가서는 안되고 반드시 회개하고 또 철저히 회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새 사람..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새 마음 가지고 살고 새 말 하면서 살라 하시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하셨지만 
진실을 말하기 보다는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하셨지만
죄 짓는 분을 낼 때도 많았을 뿐 아니라
한번 분을 품으면 몇날 며칠 동안이나 품고 산 적도 한두번이 아니며...
무릇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며 살라 하셨지만
덕 세우고 은혜 끼치는 말 하며 살기 보다는 주님 영광 가리우는 말 하며 산 적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믿는다 하면서도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갈등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그 결과 분열을 경험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마음이 나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후유증이 오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이러면서
여러 파로 나뉘어진 가운데 교회 공동체 혹에서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고
예루살렘교회 같은 경우는 구제하는 일이 분명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심이 지나치거나 아니면 봉사하는 방법이 달라 서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이 구제를 위하여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시간까지 빼앗겨 가며
열심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느라 애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결과는 불평과 불만, 갈등과 분열이었습니다.

누군 주고 누군 안주느냐...
누구는 자기 편이라 주고... 누구는 자기 편이 아니라서 안주는 것이냐...

편가르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유대인이었고 어려움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문제가 생기니 헬라파 유대인 히브리파 유대인 하면서 편이 나눠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기편 사람 챙기기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지각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나섭니다.
그리고 교회를 바로 잡게 됩니다.

그래서 취한 결정이 집사를 세우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는
사도들에겐 오직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토록 정리합니다.

저는 이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가 참으로 지혜롭게 잘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성경적으로 잘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공동체 속에서나 일반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가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될 때
갈등과 분열 속에 있는 당사자들은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에
눈도 귀도 다 마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으려 하면서
공격적이 되고나 방어적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교회공동체 내의 갈등이나 분열이 발생하게 되면
이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좋지 못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론 갈등이나 분열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설령 그러한 갈등이나 분열이 일어난다 할찌라도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천사들만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기에 갈등과 분열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사탄 마귀의 주된 공격 목표가 교회 공동체이며
교회 공동체의 파괴나 와해에 주 목적을 두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극복하느냐가 과제입니다.

서로 인사도 안하고 악수도 안하고 전화도 안하며 같이 일하는 것도 꺼리며
적대적인 감정은 계속 가지고 한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며 신앙생활을 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 문제를 어떻게든지 신앙적으로 또 성경적으로 잘풀고 해결하고 나가갈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보면 여기에 대하여 중요한 원리의 말씀이 나옵니다(마태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열의 문제를 다루시는 예수님의 말씀인데
한 교회 안에서 늘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봉사 생활을 하는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은채 예배만 드리고 있지 말고
먼저 형제와 화목을 시도하여 화목한 후
그 다음에 예배도 드리고 예물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 중 중요한 대목은
“생각나거든” 이라는 말씀과 “먼저 가서” 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먼저 갈등과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해야 하는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난 사람이 먼저 시도해야 하고
그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는 일.. 발을 떼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발을 떼고 먼저 가는 일을 하면서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갔고... 서로 화해하려고 만났으면서도
분을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더 죄를 짓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풀러신학교의 윤리학 교수이며 유명한 책 『용서의 예술』(The art of Forgiving)
이라는 책을 펴낸 루이스 스머디즈 교수는 용서와 화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용서에는 3가지가 반드시 내포되어야 한다.

첫째는 내가 분명히 잘했고 그가 분명히 잘못했기에
그동안 받았던 상처에 대하여 나는 그에게 마땅히 복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이 생각 마저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이다.

둘째는 그가 나에게 용서를 빌어왔건 용서를 빌어오지 않았건 간에
내가 그의 죄와 잘못을 용서해 주기로 마음 먹은 다음에는
그의 인간성을 재발견하는데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새롭게 바라보고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를 새롭게 바라보아 그의 인간성을 재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가 비록 나에게 죄를 지었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임에는 틀림 없지만
내가 그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 먹었고 또 실제로 그의 지난 날의 모든 잘못을 용서했다면
그가 앞으로 살아 가는 길에 주의 은총이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복도 빌어주며
그가 바르게 살아가고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랄 수 있을 때
그 용서가 진정한 용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루이스 스머디즈 교수의 글을 읽고 참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으며
“과연 용서는 예술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잠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간에는 좀 특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선교위원회에서는 일년에 두번
동산병원 의대 간호대 부활절 예배와 추수감사절 예배를 선교적 차원에서 인도하며
그들의 예배에 참석하는데
그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병원 원목실에서 의대생 간호대생들에게
“자, 따라합시다” 하면서 한목소리로 제창하게 하는 언어훈련이 참 마음에 들어
저도 이 시간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잠시 실습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제가 선창하는 구호에 맞춰 큰 소리로 따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미안합니다 / 잘했습니다 / 그땐 뭘 모르고 그랬는데 용서해주세요 / 
  그동안 기도해신 것 감사합니다 / 우리 다시 화해하고 옛날처럼 지냅시다 /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시길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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