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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누구나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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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복 주셔서… 복된 날 주인공 되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살게 하신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무더위는 부채로도 견딜 수 있으나 불경기의 답답함은 기가 막힙니다.
싫은 사람과도 손을 잡고 인내할 수 있으나
저 한심한 정치지도자들을 믿고 살아가는데는 인내에 한계를 느낍니다.
대학에 가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가는 방법'을 가지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놀고 있는
교육 당국 때문에 분노합니다.
죽음이야 언젠가 맞을 것이라 예측하고 살지만
곳곳에 도사린 테러와 사고들은 여전히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하나님, 세상 살며 지친 이들이 여기 왔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이기려는 눈물을 잠시 감춘 이들이 앉았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 답답한 이들도 있습니다.
상한 심령들을 성령으로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발과 발목에 새 힘을 주셔서 일어나는 승리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간 부족한 종을 세우셨습니다.
말씀에 권세 있게 하시고 신유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은혜의 단비를 부어 주시옵소서.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는 성도들…  병상의 환자들…
긍휼히 여겨 주시기 원합니다. 평안의 소식이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국 각지 세계 곳곳에서 인터넷에 접속하여 예배에 동참하는 이들에게까지
은혜로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평안한 날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우시지요? 당연합니다. 여름은 원래 더운 것입니다.
그러니 덥다고 짜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괜히 성질만 나빠집니다.
<여름이구나…  더운거구나?… 그러려니… 받아들이세요.
옆의 분과 "웃으며 지내십시다. 감사하며 사십시다" 인사합니다. 
 
불로 응답받은 엘리야의 기도
 
주전 870년 경(2875년 전)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이 죽고(왕상16:23~28)
그 아들 아합이 왕이 되었을 때(왕상16:29)
북쪽 강대국 시돈은 이스라엘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아합왕은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을 하였습니다.(왕상16:29~31)
그런데 그 결혼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결혼에는 이스라엘 궁중과 곳곳에
이방신 바알을 위한 신당을 짓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강대국의 공주와 결혼을 한다는 것에 집착하여
다른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제단을 무너뜨리고, 여기저기에 바알 신당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이스라엘에 두게 되었습니다.(왕상18:19)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인지,
바알이 하나님인지 몰라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왕상18:21)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를 주지 않으셨고
사막인데 비가오지 않으니까 살기가 어렵게 되어 사방에서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숨겨주고 잘 받든 오바댜를 통해
백성들과 왕 그리고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갈멜산에 모아 놓고
참신과 거짓 신이 누군지 판단하는 대결을 벌였습니다.(왕상18:19, 22, 25~46)
그때 바알 선지자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제물로 잡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하고 빌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그들은 큰소리로 자기들의 신을 부르다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여 피가 흐르게까지 했지만(28절)
저녁때까지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왕과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하고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여(30절)
소를 잡아 올리고 물을 가져다 부어 도랑에 붓고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만일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으면
아합왕으로 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엘리야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도망친 엘리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 모여 있던 모든 바알선지자들을
산아래 기손 시내로 끌고 가 죽여 버렸습니다.(왕상18:40)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 전한 소식이 본문 1절입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 (왕상 19:1)
'내가 섬기는 신의 선지자들을 죽여 버린 너도
내일 이맘때에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을 끌어내리고
기손시내에서 850명의 바알선지자를 죽여 버린 엘리야가…
3절에 보니까 살기 위하여, 생명 때문에 도망을 쳤습니다.
오직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일만 생각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렇게 담대했던 엘리야, 그렇데 대단했던 엘리야였는데…
이세벨의 협박 앞에서 초라한 도망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죽음이 경고되었을 때 두려움에 도망친 것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은 모두 비슷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대부분 죽음의 위협 앞에서 공포에 질려 버립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자이며
천국백성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지면…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주의 일 하다가/이 세상 이별 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했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소원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병에 걸렸다면
'하나님, 드디어 이제 천국 갈 때가 되었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에 이상한 것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불안해하고 무서워 울기도… 합니다. 빨리 치료되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이긴 하지만 세상 발 딛고 사는 사람 대부분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삽니다.
 
그렇게 대단했지만 죽음의 메시지를 받은 엘리야를 보세요.
갈멜산에서 남쪽 브엘세바까지 도망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동행하던 사환(심부름하는 사람)은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혼자 사막으로 하룻길쯤 더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거기 앉아서 4절에 보니
"…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19:4)  했습니다.
죽을까봐 도망쳐 놓고 보니 자신도 한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도망쳐서 한다는 기도가 "날 데려가시옵소서"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 날 데려가세요. 차라리 죽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언제 합니까?
끝이라고 생각될 때… 희망이 없다고 보여질 때… 절망했을 때… 하는 소리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때가 없었습니까? 혹시 지금 이런 상황은 아닙니까?
아무리 도망쳐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형편은 아닌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나으니 하나님, 저를 데려가세요" 했던 엘리야처럼
낙담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예고 없이 절망의 시간, 절망의 밤을 만나게 됩니다.
강도가 좀 다르긴 하지만 희망 없다고 느끼는 절망을
그대로 품고 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맞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 중에도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의 절망이든
사람에게 닥친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기도하라는 신호입니다. 기도할 때라는, 더 기도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제게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으면서 은혜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전체에 6번이나 반복되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입니다.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보통 사람들의 하루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밤까지입니다.
그렇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간 개념은
밤 시간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부터 하루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유대인들)은 해질 때부터 해질 때까지로 계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부터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저녁'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어두움은 무질서와 혼돈의 시간입니다. 분별이 잘 안됩니다.
어두움은 분별을 방해하고 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실제의 어두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상징적인 어두움>입니다.
밤은 고통과 괴로움, 수고와 슬픔, 풍랑과 좌절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 중에도 밤(어두움)이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같이 어려운 때, 정말 캄캄한 삶의 어두움에 부딪혀서
눈물짓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생활도, 자녀 교육도, 사업도, 취업도,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한숨만 나오는 어두움에 잠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육체적인 질병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세요.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 중에
눈물나며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앙생활에도 밤(어두움)이 있습니다.
 
주일 성수 잘하고, 십일조 생활 철저히 하고
이름 없이 빛 없이 봉사하며 정말 칭찬 받을 만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도
어두움이 있고, 고통을 당합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도 있고, 장로님들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어두움이, 고통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봐도 알 수 있고 우리의 삶을 통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밤'이 있다는 것은 그 다음 세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밤은 어두움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곧 새벽이 오고 낮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밝은 세상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요 준비의 장소입니다.
잘 들으세요.
우리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새 날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어둠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에 빠져 로뎀나무 아래에 앉은 엘리야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드리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에 보세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한 천사가 찾아와
    "…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왕상19:5) 했습니다.
영문성경에 보니 <어루만지며>라는 뜻은 '… angel touched him~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또 한번 천사가 찾아와 어루만지며(touched him)
  "…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왕상19:7)  했습니다.
 
사람이 낙심하여 절망감에 사로잡혀 한숨을 쉬고 앉아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눈길을 떼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힘든 때, 힘든 일… 많을 것입니다.
주일이면 지난 주간에 입원환자, 이런 저런 성도들의 형편에 대해 보고서가 올라옵니다.
저는 교역자들의 보고서를 보면서 너무 기가막혀 눈물을 머금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은 모두 기둥교회에 나오나'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어려운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장관들이 "경제가 괜찮다"고 할 때 애들 말로 정말 열 받습니다.
도대체 그분은 누구의 보고를 듣고 그렇게 말하는지…
무엇을 보고 그러는 지…  답답합니다.
세상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고 살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낙담하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자식을 포기하지 마세요. 남들보다 공부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어떤 자격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을 포기합니까?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 포기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입니다.
 
멕시코에는 <지져스 가르시아>라는 조각가가 만든 조각상이 있습니다.
가르시아가 그 조각상을 만들다가 실수로 오른손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완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조각하는 기술을 다시 익혔고 결국은 그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불굴의 용기와 열정에 큰 감동을 받고
그 조각상의 이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못하겠다며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승리자와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실패와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극한 시련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해도…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향내 풍기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무 너무 감동해서 인생의 길을 갑니다.
하나는 내 발자국,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 같이 가는데
자기 인생 중에 가장 힘들고 어렵고 눈물나고 기가 막힌 절망에 빠졌던
그 기간이 있었는데, 그 기간 중에 발자국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화가 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내가 저 때 가장 힘들었었는데 주님은 도대체 어디 가셨습니까?"
그때 주님이 답합니다.
"얘야, 네가 너무나도 힘들어하고 너무 고통스러워 하고 네가 걸을 수도 없었어.
그래서 내가 지친 너를 안고 걸어간 내 발자국이야. 저때 너는 내 품에 있었어"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입니까?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아닙니까?
공포에 질려서 나무 아래서 잠들었던 엘리야와 같은 상황 아닙니까?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 품 안에 안겨 걸어가고 있는 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아래서 낙담과 절망,
포기의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를 채찍질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같으면 "야, 일어나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책망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엘리야 혼자 나무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함께 계셨습니다.
죽지 않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40 주야를 행하여(320km 정도 되는 사막을 가로질러)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분 자신, 가정, 일터, 신앙의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밤을 만나셨습니까? 어둠 속에 계십니까? 절망입니까?
그럴 때 보통 사람은 … 누구나 낙망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말의 사슬로 자신을 얽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말로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주만 바라볼지라"라는 노래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 주만 바라보십니까?
이것저것 다 보다가  "주도 바라볼지라"는 아닙니까?
돈, 재미, 사람, 방법도 바라보다가 <이제 주님도 바라봅니다>는 아닙니까?
이 약도, 저 약도, 이 의사, 저 의사… 바라보다가
이제 주님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까?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해 구원의 길을 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두움에 밝은 빛 주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처량 맞게 하나님을 찾았던 엘리야도 찾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일어나십시다.
다시 한번 주먹 쥐고 일해 보십시다.
힘들어도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십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감당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주만 바라볼지라 ♬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힘이 들고 어려워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 바라보고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낙망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하여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찾으셨던 하나님!
주여 우리를 만져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와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새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며 힘들고 어렵지만 얻은 소득 구별하여 드립니다.
하나님, 연약한 저들의 삶의 현장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5년  7월 10일 주일낮설교> 
(고신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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