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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 (삼상 13:1-15a, 롬 14:1-4, 요 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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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2년, 6.25한국 전쟁이 한창일 때 의정부 쪽으로 북한 피난민들이 내려오는데 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섞여 내려온다는 정보가 우리 군에 들어왔습니다. 북한군은 그렇게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 전선을 교란할 속셈이었습니다. 당시 작전권이 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포병대대 미국인 고문관은 잠입해 들어오는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피난민을 무차별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포병 대대장이었던 이기련 대령은 이 명령 앞에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상명하복은 생명 같은데 그 명령을 복종하느냐 아니면 동족 즉 피난민의 생명을 지키느냐 양자택일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동족의 생명을 지켜야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 고문관과 “하라”느니 “할 수 없다”느니 다투다가 이기련 대령은 오히려 미국인 고문관을 향하여 권총을 쏘았습니다. 물론 총알이 맞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군에서 쫓겨났습니다. 전시하(戰時下)라는 특수 상황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 6.25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당국의 눈을 피하여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러다 잡히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건 피난 행렬이었습니다. 그때 한 무리의 피난민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래서 바스락 소리라도 나게 되면 공산군에게 잡힐까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어린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합니다. 보통 낭패가 아니었습니다.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공산군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그 아이 때문에 모두 죽습니다. 이런 집단적인 불행을 막으려면 우는 아이를 처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그 어머니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우는 아이를 그냥 둔 채 기도하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도 살고 배에 탔던 수많은 피난민들도 모두 무사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숫자로 따져서 모두 살기 위해서 어린아이 하나쯤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아이는 물론 죽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위기상황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처신하고는 변명하기를 잘 합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몰려 온 사람들을 보고 칼을 빼서 말고라고 하는 사람의 귀를 배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고쳐주시고 나서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기 까지 왜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모든 것을 걸고 따르던 그 선생님을 체포해 가겠다고 온 사람들을 보고 열혈청년 베드로로서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열 번 백번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 일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은 사울 왕이 위기상황에 처해서 자기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사무엘에게 책망 받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사건 때문에 불행하게도 사울은 사무엘에게서 폐위 선언을 받게 됩니다. 14절에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요새 도로변에 보면 “넘지 못할 선(線)” 또는 “선을 지키자”고 하는 캠페인 플래카드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무엇입니까? 중앙선, 정지선을 말합니다. 흔히 “중앙선은 생명선”이라고 합니다. 자동차가 그 선을 넘게 되면 마주 오던 차와 충돌하게 될 것이요 그러면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선(線)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그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을 순종하고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또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그리하여 자행자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진노와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은 곧 생명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전과 승리를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2. 사울은 처음에 아주 성공적인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불행하게도 비참한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그어주신 선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 암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하여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그어주신 선을 무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왕의 역할과 선지자 제사장의 역할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백성을 통치하고 전쟁을 주도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었습니다.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선(線) 안에서 자기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이 할 일은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은 이 영적인 일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세가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속히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인도해 줘야하는데 약속된 7일을 넘기고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마저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사울로서는 초조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왕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이 전담하도록 되어있는 번제를 왕이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사울로서는 얼마든지 핑계할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폐위 선언을 당하게 됩니다.

시편 16:에 보면 “주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감당해야할 역할을 주셨습니다. 교역자가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장로님들의 역할, 집사님이나 권사님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교사나 찬양대원, 구역을 맡은 이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각기 달란트를 따라 교회와 세상에서 감당해야할 역할들이 있습니다. 이 역할이 바로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입니다. 이렇게 하시고 주님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두려워해야할 일은 우리도 사울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제쳐놓고 남의 영역을 자꾸 넘나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세우셨지 남을 간섭하는 감독관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너는 아무개를 잘 감시 감독했느냐?” 이렇게 묻지 않으십니다. “너는 내가 맡겨 준 지극히 작은 일에 얼마나 충성하였느냐?” 이렇게 물으십니다. 롬14:4에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직분자나 다른 사람의 영역을 건드릴 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을 넘은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직분을 감당해야할 줄 믿습니다.

3. 그러면 사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1) 끝까지 참고 인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싸워서 이길 때 그들의 군인의 수나, 전쟁 무기나, 그들의 전략이 훌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들은 모든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물리친 것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적군의 강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반(離反)현상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버렸습니다. 결국 월권을 했습니다. 왕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 제사장 고유의 직무를 자신이 행하고 말았습니다. 방법이야 어떠하든지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모든 잘못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적으로는 어리석게 보여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눈에 보이는 다급한 현실, 귀에 들리는 유혹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가장 선하게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울은 잘못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꼬이려고 하면 참으로 묘하게 돌아갑니다. 사무엘서 본문 10절에 보면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고 했습니다.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이런 치명적인 잘못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잠시 때문에 사울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요 연약한 한계를 지닌 인간이 잘못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죄나 허물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그 잘못을 지적했으면 다윗처럼 “내가 잘못했노라”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아니하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12절 마지막에 보면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기변명이요 자기 합리화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을 회개하는 일이 결코 체면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변명하다 에덴동산에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도 회개하여 용서받고 수사도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사람에게 천국문은 열려있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사울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말씀 중에 “만일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 촛대를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통절하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정말 그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지금 터키를 가보십시오. 그 나라가 기독교 초기에 계시록 7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가 있었던 성지 중의 성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는 유적만 남아있고 십자가가 아니라 이슬람교의 상징인 초생 달 표지가 마치 우리나라 동네마다 있는 교회 십자가만큼이나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또 여러분에게 가장 작은 일이라도 맡겨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 즉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작은 충성을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큰 것으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밥에 콩이 크게 보인다”고 했듯이 공연히 다른 사람의 영역을 기웃거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해야 할 일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 일, 그 직분, 그 달란트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겨자씨와 같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하는 그 신앙적인 충성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시고 태산 같은 것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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