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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히키코모리 엘리야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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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여러분, 혹시 '히키코모리'라는 일본말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 전 KBS 2TV의 『추적 60분』에서 히키코모리 현상을 다룬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프로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를 읽다가 알았습니다.

'히키코모리'는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로 번역을 합니다.
히키코모리는 수 년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식사도 혼자 합니다.
가족들과 대화도 나누지 않고 밀폐된 방에서 오로지 자기만의 인생을 삽니다.

방송에서 소개된 한 20대 남자는 고교 졸업 후 4년 째 방안에서만 생활합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하고, 1년 이상 밥을 먹지 않고 라면과 과자만 먹고삽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7년 동안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는 장 모씨 비하면 낫습니다.
장씨의 방에는 먹다버린 쓰레기들이 가득하고 머리카락과 먼지가 이불솜처럼 떠다닙니다.

히키코모리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부모들의 애가 더 탑니다.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신은 버젓한 데 그저 방안에만 틀어 박혀 사는 것입니다.
히키코모리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 밤낮으로 컴퓨터만 껴안고 삽니다.
가족이 함께 살아도 대화도 별로 하지 않고 혼자 불규칙적으로 식사를 합니다.

히키코모리는 선천적인 유전병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데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가정불화, 학교에서의 왕따, 인터넷 중독, 등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도 일본 못지 않게 히키코모리 증세를 부채질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정폭력이나 가정불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학력지상주의나 입시 스트레스는 얼마나 높습니까?
더욱이 초고속 인터넷 보급망은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제가 볼 때 이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이 히키코모리의 주범(主犯)인 것 같습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의 약 2/3 정도가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데,
인터넷 하나만 있으면 방안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거뜬히 며칠을 지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 오늘 우리 자녀들이 히키코모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히키코모리는 어느 불량한 청소년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6개월 이상 집안에 틀어박혀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을 히키코모리로 간주합니다.
일본에는 현재 전체 인구의 1% 정도가 히키코모리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약 120만명 정도의 히키코모리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들 중에 대부분이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할 20대와 30대 남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본의 노동력 감소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히키코모리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10만명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아마 앞으로 우리 모두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할 경우 숫자는 더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히키코모리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정신 질환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다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히키코모리 엘리야'의 아픔과 재기>

① 누구나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세요.
저 위대한 엘리야가 히키코모리 증세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구약 시대에 가장 많은 기적이 일어난 때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니 비가 내렸습니다(왕상 17-19장, 약 5: 17-18).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밖에 가지지 않았던 사르밧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어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했습니다(왕상 17: 8-16).

무엇보다도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던 아합왕과 이세벨여왕과 싸운 선지자입니다. 
왕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 400명, 모두 850명의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승리했습니다. 

엘리야는 세상을 떠날 때도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자연적인 죽음을 직접 보지 않고 불말들이 모는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왕하 2: 11). 
에녹과 마찬가지로 죽지 않고 천국에 올라갔던 것이지요(창 5: 22-24 참고).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능력이 많았던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들 중에 대표격이었습니다.

마태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변형된 모습으로 대화하실 때 두 사람과 대화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니다.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의 대화 상대자로 나타났을까요?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였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을 동시에 완성하신 분임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위대한 엘리야가 지금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상상할 수 없는 말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엘리야는 인생에 지쳐버렸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burn-out,' 완전히 탈진(脫盡) 상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정신 없이 도주합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엘리야가 두려워 유다의 브엘세바로 도망쳤다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보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단은 북쪽 끄트머리요, 브엘세바는 남쪽 끝입니다.
그러므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라고 보면 됩니다.
엘리야는 사환 한 사람만 데리고 수 백km를 달려 최남단 끄트머리까지 갔습니다.

더욱이 4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 다같이 읽어볼까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남쪽 끄트머리까지 쫓겨 내려갔는데 거기서도 자기 시종만 남겨둔 채,
하루 종일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갔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완전히 히키코모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기로 했던 것이지요. 
그것도 부족해서 사막 한 가운데 서 있는 보잘것없는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 이제 이 만큼 살았으니 더 원이 없습니다.
이제 저를 죽여주세요. 더 이상 힘들게는 못살겠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히키코모리는 마음이 여리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명랑하고 적극적인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에 빠지면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와 같은 불세출의 위인도 차라리 히키코모리가 되어서
세상을 하직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자녀들 모두
히키코모리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렇게 위대한 선지자도 인생의 짐이 버거울 때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구나!"
위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힘들 때 히키코모리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법입니다.

② 왜 히키코모리가 될까요?
그렇다면, 여러분, 엘리야는 왜 히키코모리가 되려고 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외우내환(外憂內患)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밖으로 바알신을 섬기던 아합왕과 이세벨여왕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난리였습니다.
왕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 850명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들을 전멸시켰던 것이지요.

문제는 아합왕과 이세벨여왕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찾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본문 2절을 보세요.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가 믿는 우상신의 이름으로 복수를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로 이세벨의 복수의 칼을 피해서 정처 없이 도망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히키코모리가 됩니까?
주로 외적인 스트레스 때문이 아닙니까?
이 나라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너무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데도 명문대학에 보내려고 난리를 칩니다.
또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막상 직장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경쟁에서 살아남아 끝까지
정년 퇴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명예퇴직, 강제퇴출 등의 숨막히는 스트레스 속에 삽니다.

또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은 얼마나 많습니까?
사소한 문제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겨서 차라리 세상만사 다 잊고
히키코모리가 되고 싶은 유혹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지가지 외부의 압박과 스트레스가 우리를 히키코모리로 몰아갑니다!
특히나 인터넷은 우리를 안방에 고립시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를 히키코모리 증세로 몰아간 내적인 원인도 있었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 여왕의 핍박은 그런 대로 다 이겨낼 수 있는데,
자기의 동족이요 하나님이 뽑아 세워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것은 정말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무지 엘리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도무지 감동도 없고 회개도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외롭게 우상잡신과 싸우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엘리야를 격려하지 않습니다.
그 업적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관심과 단절, 이것이 히키코모리를 만듭니다.
히키코모리의 주원인 중에 하나가 가족들과 대화의 단절입니다.
부모들이 세상일에 바쁘다 보니 자녀들과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인 것은 분명한데 하숙생같이 살가운 대화가 없습니다.
가족간에 정이 없고 자꾸만 소외되고 단절됩니다!

엘리야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관심과 왕따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절규하고 있습니다.

히키코모리는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고 관계가 단절될 때 찾아오는 병입니다.
사람 사이의 오고가는 정을 차가운 기계, 인터넷이 대신하며 찾아오는 질환이지요!

③ 히키코모리를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밖에서는 환란과 핍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안으로는 동족으로부터 왕따를 당한 엘리야는 사막으로 도망쳤습니다.
히키코모리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챙기셨습니다.
히키코모리에서부터 탈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며 울부짖다가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 잠이 들었습니다.
히키코모리 증세 중 하나가 잠을 자는 것입니다.
세상도 싫고 사람도 싫고 온통 싫은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잠에 취해버리는 것입니다.
태아로 어머니 뱃속에서 잠을 잤듯이 히키코모리에게 잠이 유일한 위안이 됩니다.

잠든 엘리야를 깨운 것은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마시게 했습니다.
한 번이 아닌 두 번씩이나 떡을 먹고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먹고 마시게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일어나서 먹으라"고 타일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싫어 대인 기피증에 빠지고 방안에 홀로 틀어 박혀있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 3-4)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세상에서 받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기력을 회복하고 재기하도록 도우십니다!

엘리야는 히키코모리가 되어 세상을 등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시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히키코모리의 유혹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정하게 어루만지셔서 위로하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히키코모리 상태에서 책임과 사명의 길로 이끌어내십니다!

엘리야는 순간적으로 히키코모리가 될 뻔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있기에 이렇게 대인 기피증에 빠져 히키코모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명의 사람은 히키코모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실 일이 있기에 우리는 방안에 틀어 박혀 고립될 수 없습니다.
할 일 많은 세상 속에 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떡과 물을 마신 엘리야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낮 40일 동안을 걸어서 하나님의 산인 호렙에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히키코모리가 아니라 힘찬 사명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산에 들어간 것이지요.

여러분, 호렙산이 어딥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소가 아닙니까?(출 3: 1, 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던 장소도 호렙입니다(19: 3). 
그러므로 호렙산은 오늘의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싫다고 해서 히키코모리가 되어서 안 됩니다.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음침한 독방에 갇혀 외부와 차단되어 사는 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속에 나가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 나가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히키코모리가 적극적인 사명자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 나가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안팎의 적들과 싸워 이기려면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 동굴에서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복잡하고 분주하게 살았는데 고요히 침묵하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엘리야는 이 음성을 듣고 히키코모리 증세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남은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고 비겁하게 도망쳐 나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아합왕을 폐하고 예후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의 본거지였던 아람나라의 왕을 폐하고
하사엘을 아람의 새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선택하여 기름 부었습니다. 
히키코모리 증세를 완전히 극복하고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인간은 다시 시작한다>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대인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은 독개스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위젤은 다른 수용소 네 곳에 끌려 다니다가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불란서의 고아원에서 몇 년간 생활하다가 기자가 되었지만,
과거의 쓰라린 경험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고 히키코모리 증세를 보였습니다.
나치도 싫었고 세상도 싫어서 세상과 담을 쌓은 채 고립되어 살려고 했습니다.

위젤의 인생을 바꾼 사람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프랑수아 모리악(Francois Moriac, 1885-1970)이었습니다.
모리악은 위젤에게 과거의 아픈 경험을 되살려 글을 쓰라고 격려했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동료 유대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인류사에 다시 똑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소설을 쓰라고 권했습니다.
결국 위젤은 『밤』(Night)이라는 소설을 비롯하여 40여권의 명작을 썼습니다.

나중에 위젤은 미국의 유대인 학살 기념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핵전쟁 방지, 인종차별 폐지, 세계평화 운동 등에 신명을 바쳤습니다.
결국 1986년 위젤의 눈부신 사회활동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위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히키코모리가 되어서 폐인이 될 뻔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세상과 담을 쌓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놀라운 문필가, 사회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히키코모리의 유혹을 이기고 찬란한 노벨상 수상자까지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들』(The Messengers of God)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창조는 인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비밀을 주셨는데, 그 비밀은 어떻게 시작할까 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였다.
시작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의 특권이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인간이 죽음을 거부하며 생명을 택할 때마다 항상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모든 이니셔티브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시작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히키코모리의 유혹을 받고 계십니까?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도우십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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