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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 우리의 양식 (마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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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은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쓴 ‘젊은날의 빵’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일조량이 적기 때문에 여름이면 지중해 연안으로 휴가를 갑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1 년 동안 일하면서 돈을 모으는 이유가 휴가비 마련에 있습니다. 그렇게 어떤 독일 사람이 스페인에 관광을 갔습니다. 그는 행복하게 아름다운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그러다 한 어부가 테가 큰 모자를 눌러쓰고 배위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관광객은 배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그리고 뱃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고기는 많이 잡았소?”
“많이 잡았습니다.”

“얼마나 잡았소?”
“대 여섯 마리 잡았소.”

“열시도 안 되었는데 그렇게 많이 잡았소?”
“그렇소.”

“아 그렇게 잘 잡히면 더 잡지 않고 왜 이렇게 쉬고 있소?”
“더 잡아서 뭐하게요?”

“종일 잡으면 서너 배는 잡을 것 아니요? 그러면 돈을 많이 벌것이고, 아마 훈제공장까지 차릴 수 있을거요.” “공장까지 차려서 뭐하게요?”

“아 그러면 돈을 많이 벌어서 직원들에게 맡기고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나처럼 즐길 수 있지 않소!”

그러니까 이 어부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며 이렇게 답을 했답니다.

“아 이보시오.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질 않소?”

이 이야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이러니입니다.

사람들은 꿈을 좇아 살고 있지만 달리다보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잊게 됩니다.

가끔 공중에 나는 새를 보기도하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라 일을 하면서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이 점점 물질화 되어갑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이 복 주셨다고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은 언제나 물질입니다. 물질 우상주의를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맘몬은 영어 ‘머니’와 어원이 같습니다. 돈은 바로 우리 앞에서 행복과 자유를 보장해 줍니다.

그러나 돈은 우리의 삶을 속박합니다. 돈이 많을수록 죽음과 공포가 더 많아집니다. 불의, 원한, 복수 등이 연속되어 악순환하게 됩니다.

천국과 이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풍부와 결핍의 차이입니다. 천국은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지만, 이 세상은 부족한 것 투성입니다. 천국을 이야기할 때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잔치입니다. 잔치는 풍요로움과 배부름을 상징합니다. 기쁘게 서로 나누고 권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반면 이 세상은 아픔과 슬픔이 있습니다. 한쪽은 늘 부족해서 욕구 불만이 있습니다. 사랑 대신이 아귀다툼이 있습니다. 제한된 자원을 서로 먼저 많이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결핍으로 찌든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을 나라를 세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한 가장 큰 실험이 공산주의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내적 자원을 동원해서 능력껏 일해서 나누면 지상 낙원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80 년 동안 실험하다가 대재앙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 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기도문의 우리 청원 첫 번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청원의 첫 번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말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서는 ‘날마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눅 11:3>

그래서 이 단어를 번역하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루에 필요한 양식이란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는 삶에 필요한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는 오는 날을 위한 즉 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최근의 주석가들은 세 번째의 의미로 많이 해석합니다.

이 기도를 아침에 한다면 이제 시작하는 하루를 위한 양식의 기도가 됩니다. 저녁에 드린다면 내일 다가오는 하루를 위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이 세 번째 견해가 유력한 이유는 이 청원이 출애굽기 16 장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4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약속하십니다. 만나를 그날에 필요한 만큼 날마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4>

이 본문에는 ‘일용할 것을 날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만나를 날마다 주셨습니다.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그 만나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이른 아침에 주셨습니다. 아침에 주신 것은 시작되는 하루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 외에 또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 메추라기는 저녁에 주셨습니다. 저녁에 양식을 받은 것은 그 다음 날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오늘날’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날을 위한 양식을 달라는 청원입니다. 양식은 생명 연결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달라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신기한 음식이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많이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은 그 다음날 벌레가 생기고 부패해서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둬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날그날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는 법을 배우도록 훈련한 것입니다.

광야는 결핍의 대명사입니다. 광야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집도 짓지 못하고 천막에서 생활합니다. 물이 부족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농사는 커녕 마실 물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세수할 물도 아껴야 합니다. 목욕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모든 자원이 부족해서 공산품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광야에서 40 년이나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굶지 않았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먹던 고기반찬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로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끼라도 굶도록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추워 떨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막아 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진을 덥혀 주셨습니다.

40 년 동안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끊어졌다면 그들은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광야 40 년을 체험한 후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 29:5>

하나님께 양식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함께 누리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듭니다. 본래 농사를 지으면 양식을 구하는 일은 일 년에 한번이면 됩니다. 곡식을 거두면 일 년 먹고 살 것은 생깁니다.

추수를 끝내고 곳간에 먹을 것이 가득하면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어도 일 년 동안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어떻게 될까요?

사실 이런 사람은 주변에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아쉬운 마음에 하나님을 찾지요. 문제가 해결되면 또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합니다. 참으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미련한 일입니다.

농사를 평생 한 번 짓습니까? 알곡을 맺게 하시고 풍년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 양식을 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다음 이어지는 가르침과 부딪칩니다. 같은 마태복음 6 장에서 예수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6:31 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이런 것들은 주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2>

그러니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서는 염려도 하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는 양식을 구하라고 하시고, 또 바로 다음에 양식을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성경에 이렇게 모순되는 가르침이 있다면 진리를 가리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주기도문에서 구하는 기도는 영적인 양식을 말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의 양식이라면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기도가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까? 그러나 영의 양식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기도가 공동체의 청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개인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을 양식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먹을 양식입니다.

내가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은 필요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놓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 양식을 구하는 것은 이웃의 먹을 것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굶고 있는 이웃의 실존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나누어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거둘 때 한 사람 분이 한 오멜씩이었습니다. 한 오멜은 2.2리터입니다. 그런데 각자 진밖에 나가서 자기 양식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만나를 거둘 때는 그 장막에 있는 사람들의 몫을 거둬 주었습니다.

어린이나 노인들의 몫은 누군가 대신 거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나는 항상 공동체의 몫으로 거뒀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함께 거두고 나누어 먹는 양식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은 어떻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극빈 국가는 20 개 정도 됩니다. 세계 60 억 인구 가운데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12 억 명이나 됩니다. 그 중에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은 주로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세계 어린이 가운데 24 %의 어린이들이 절대 빈곤에 처해 있습니다. 아직도 굶어죽는 어린이가 1 초에 3-4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 해 음식 쓰레기로만 8 조원이 넘게 버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도 한 해 410 만 톤의 음식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식아동은 16 만 명이나 됩니다.

한 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살을 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끼니를 거르며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양식을 베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가 손을 펴서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배가 부르니까 남 배고픈 사정을 모릅니다. 자신의 안녕과 행복만 확보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양식을 기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양식에 욕심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양식을 구하는 이 청원 기도는 역시 청원이 아니라 다시 서약이 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그러면 혼자 잘 먹고 돼지처럼 살만 찌지 않겠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맛있게 나누어 먹겠습니다.” 이런 서약을 담은 고백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부자의 슬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던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원한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고민하던 청년은 하나님과 재물의 갈림길에서 맘몬을 택하고 맙니다.

천국을 풍자하는 이야기 가운데 천국 밥상과 지옥밥상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숟가락이 모두 길어서 끝을 잡으면 입에 넣을 수가 없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흘리면서도 먹지를 못해 굶고 있는데, 천국에서는 서로 먹여주기를 하면서 모두 배불리 먹는답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양식을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면, 이 사회는 변할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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