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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로 말미암은 평안과 사랑 (겔 38:14~16, 몬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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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찬만한 용기도 없습니다. 어느 노 부부가 “당신 다리가 미끈하게 빠졌네요”. “영감 팔뚝에 아직도 근육이 살아 있네요” 하며 매일 서로를 격려합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밥상 차려놓고 할아버지를 찾았는데 보이질 않았습니다. 지하실에서 할아버지가 아령으로 운동을 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답니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 팔뚝에 젊은 청년 못지않은 근육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사람은 70세가 되어도 근육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아령 한번 시작하시지요?

  바울의 서신을 유심히 읽어보면 서두에 거의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바울의 칭찬에 상당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리더십입니다. 빌레몬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말한다고 합니다. 빌레몬의 장점을 찾아서 칭찬부터 합니다. 빌레몬이 볼 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겠습니까? 우리도 먼저 칭찬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4:8에는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칭찬 들을만한 삶이어야 합니다. 칭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이미지 전도’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이미지가 전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미지가 좋은 빌레몬을 통하여 사회가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빌레몬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칭찬 듣는 한 사람을 통하여 복음은 전파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 빌레몬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을 것입니다. 교회의 좋은 일군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그리스도인이 바울의 마음에 있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형제를 생각할 때마다 무엇을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바울은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평안을 얻고 사랑을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공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우리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습니다.

  바울은 먼저 말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었으니”. 많은 주위의 사람들, 성도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게 해야 합니다. 나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평안을 얻는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빌레몬의 자선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비애에 잠긴 성도들은 평안을 얻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때 마침 브루기아 지방의 지진으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이재민을 빌레몬이 구제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빌레몬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평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빌레몬은 평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0:5-6에는 말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선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이웃이 평화를 맛보게 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안정감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높이고 평화할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캐슬이란 분이 말했습니다. “가치를 인정받고 안정감을 느낀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려고 남을 깍아 내리지 않는다”. 칭찬은 평화를 이룹니다. 칭찬은 안정감을 줍니다. 칭찬은 자존감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안을 얻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안정됨으로, 화평케 하는 은혜로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안을 얻어야 평안을 공급합니다. 마태복음 5:9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안을 만들어내면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 즉 ‘peace maker’입니다.

  역사가 윌 듀란트는 “역사의 증언”이란 그의 저서에서 지난 역사 시대 3,4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시간은 268년밖에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1945년부터 2000년까지 주 단위로 계산하면 모두 2,872주가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지구상에 전쟁에 없었던 주는 3주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 중입니다. 우리나라도 준전시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보다 전쟁을, 갈등을, 폭력을 만들어내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일전에 있었던 런던의 테러를 보세요. 아마 2012년 올림픽이 파리로 선정되었다면 파리에서 터졌을지 모릅니다. 세계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을 질시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갈구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장 잘 만들어내는 것은 싸움이며 폭력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모습니다.

  로마서 12:18에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합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평화가 전달되어야 하며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평화하지 못하고 우리들끼리 싸우고, 나하고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편을 가르고, 미워합니다.

  지난 주간의 ‘목회서신’에도 썼지만 존 번연은 “이상하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니”라고 한탄했습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대적해야 할 상대가 아니고 함께 평화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 속에 평안 있으면 우리를 통하여 평안이 공급됩니다. 우리 안에 평화가 없으면 평화하지 못합니다. 자기와 싸우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싸웁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가 있기에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 때문에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때문에 이 땅이 평화하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군 전쟁 이후에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갈등이 증폭될 때에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노래했습니다.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심화된 민족에게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되려고 애쓰다 피살됩니다. 대만의 전설적인 추장 오봉은 사람을 잡아먹는 자기 부족에게 마지막으로 사람을 잡아먹고 다시는 그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자신이 부족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어 살인성인(殺身成仁)의 본을 보입니다. 이 모두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희생양으로, 화해자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왕노릇하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노릇한다고 로마서에는 말합니다. 한 사람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생동하고, 생명이 용솟음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고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굉장히 뜨거운 민족입니다. 차갑고 냉철한 성품보다 오히려 정이 많고 뜨거운 민족입니다. 뉴질랜드 로토루아라는 곳에 가면 야외 사우나가 있습니다. 온천지역인 이곳의 물을 이용하여 위쪽이 제일 뜨겁고, 그 다음이 조금 덜 뜨겁고, 아래쪽은 제일 덜 뜨거운데 대부분 관광객들은 아래쪽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제일 뜨거운 것에 풍덩 들어갑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한국 관광객들입니다.

  현대인은 냉방이 잘 된 집에서 나와서 에어컨이 설치된 자동차를 타고 냉방시설이 잘 된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나와서 불가마와 찜질방에서 땀을 흘립니다. 본성적으로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본성적으로 사랑이 많고 인정이 많은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인정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골로새서 1:8에는 에바브라 라는 신실한 일꾼을 소개합니다.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한 자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알게 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1:9에는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우리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사랑이 풍성해야 사랑을 공급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사랑은 영원하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네 사랑의 한계를 인정하며 우리의 욕구를 억제한다면 오히려 자유로워져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면 영원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 사랑이 전해져야 합니다.

  중국 성도에는 무후사(武候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위인들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거기에는 혜능이라는 유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조조는 자신의 묘를 만들 때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을 파헤칠까봐 100개의 비슷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조의 무덤을 찾기 위하여 100개의 무덤을 전부 파헤쳤다고 합니다. 반면에 유비의 무덤은 화려하지 않고 하나만 있습니다. 전체 둘레가 120미터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무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무덤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집니다. 얻고자 하면 잃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사랑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조품이 아니라 진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짜를 내놓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품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흠도 점도 없는 순수한 사랑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주는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고린도후서 8:24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교회에, 사회에 우리의 사랑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사랑이 충만한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하고 있지요”라고 바꿔 부르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사랑은 받는 것보다 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사랑을 만드는 사람,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이방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라도 사랑해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든 미움의 대상이 나의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운 사람이 아예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 놀라운 외경심을 품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고 외쳤던 1세기로부터 불행하고 먼 길을 거쳐 21세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전 세계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보라”고 하면서 우리 경멸하고 있습니다. 어떤 크리스천 작가의 말입니다. 요즘 갈등 속에 있는 어느 교회의 이야기가 세간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왔습니다. 이런 일을 보고 불신자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엄청난 선교의 손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이 전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세 나무 이야기’(The Tale of Three Trees)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올리브나무와 떡갈나무와 소나무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자신이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되어 온갖 보석을 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꾼이 자신을 베어 냄새나는 짐승의 구유로 만들었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꿈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떡갈나무는 위대한 왕을 태우는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이 자신을 베어 조그마한 낚싯배를 만들고 있음을 알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나무의 유일한 꿈은 언제까지나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번개가 치더니 자신을 넘어뜨리면서 그 꿈을 빼앗아 갔습니다. 얼마 후에 나무꾼은 쓰러진 소나무를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 세 나무는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를 낳을 곳을 찾지 못해 마굿간에 있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구유에 누였습니다. 이 구유는 바로 그 올리브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되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후수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크고 멋진 배가 아닌 작고 초라한 배를 타셨습니다. 이 배는 그 떡갈나무로 만든 배였습니다. 만왕의 왕인 예수님을 태우게 된 것입니다. 오랜 후에 로마의 군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나무를 찾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한 나무를 찾아내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리게 했습니다. 이 소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나무들이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는 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평화와 사랑을 전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지상 최고의 일입니다.

  우리가 무슨 평화가 있을 수 있습니까? 무슨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가장 귀한 평화의 도구로, 사랑의 사도로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사랑이 나로 말미암아 세상에 번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있는 곳에 평화가, 내가 있는 곳에 사랑이 충만한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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