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 (마 6:1-4)

  • 잡초 잡초
  • 492
  • 0

첨부 1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1.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주의해야 할 세 가지의 기본적인 태도가 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서 그의 신분과 인격을 짐작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등의 외적인 표현들 속에 그의 신분과 인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태도에 맞추어 그를 알아주고, 그를 상대합니다. 한 사람의 태도 속에는 공동체 속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의 인격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의 신분적인 요소들입니다. 그 공동체에서의 인격적인 지위를 나타냅니다.

한 사람의 태도 속에는 첫째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 속에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둘째로 그 공동체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존재와 관계된 그의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공동체의 최고의 가치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나타납니다. 셋째로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다스리는 인격이 나타납니다.

결국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과 같은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인격을 알리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평소에 이러한 부분을 특별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인격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그 인격의 평가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아는 신분과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조작적인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조작하여 나타냅니다. 공동체의 최고의 가치가 되는 존재와의 관계성을 조작하여 나타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다스리는 모습을 조작하여 나타냅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조작적인 신분과 인격을 나타냅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요구되는 모습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습이 법으로 제도화 되어 강제로 요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생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서 움직이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생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즐거워하는 그 자신의 자아 중심의 인생입니다. 그의 삶 속에는 진정으로 이웃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최고의 가치가 되는 존재도 없습니다. 그의 개인적 유익도 없습니다. 타락한 개인적인 자아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없는 태도라고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 5:3-12에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신앙인격을 설명하시고, 마 5:13-16에서 그 인격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야 할 기본 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마 5:17-48에서 그 태도를 가로막았던 율법을 향한 바른 관점을 세워주신 후에, 마 6:1-18에서 이웃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의 이웃을 향한 태도는 세상의 태도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자아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태도를 나타내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태도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6:1-4에서 이웃을 향한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만 나타나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 6:5-15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향한 태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마 6:16-18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조작된 말과 행동들의 태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인격이 나타나기를 거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태도를 기대하십니다. 이웃을 향한 태도와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절제하는 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 드러나는 성도의 신분과 인격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하나님과 자신을 향한 태도는 성도가 늘 주의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2. 가난한 이웃을 향해 나팔을 부는 외식하는 자의 구제는 상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 5:13-16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마 6:1에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어려운 과제입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야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이웃이나 하나님이나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사람 앞에 선 자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조작된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조작된 태도에 대해서는 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는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그 상을 받을 뿐 하나님께는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행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마 6:1의 헬라어 원문은 첫 단어를 “주의하라(프로세케테)”라는 단어로 강조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께 상도 받지 못하고 실족하게 될 만큼 예민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도 자칫하면 교묘하게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없는 순수한 의를 나타내도록 요구하십니다.

그중 첫 번째로 주의해야 할 것이 “구제”로 나타나는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구제를 통해 이웃 사랑을 표현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구제하는 모습을 보며 이웃을 향한 그의 신분과 인격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제하는 의”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드러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구제하는 의를 통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 역할을 통해 교묘하게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그들 앞에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타난 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 6:2에서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경고하시며, 주의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란 단어의 직역은 “맡겨진 인물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실제 인물과 배우의 차이점은 목적의 차이입니다. 실제 인물의 신분이나 인격은 그가 어떤 인생의 목적을 향해 살아갈 때 형성된 부산물입니다. 그러나 배우란 이미 형성된 신분과 인격을 조작적으로 나타내는 무대 연기자입니다.

배우는 무대에서 어떤 인물의 신분이나 인격을 그려내기 위해 조작적인 연기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인물이 아닙니다. 만일 배우가 상을 받는다면 그의 연기력으로 인한 것이지, 그가 표현한 어떤 인물의 신분과 인격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웃을 향한 구제의 태도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 마치 배우들이 행하듯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조작적인 방법으로 구제 행위를 합니다. 이러한 신분과 인격은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는 회당의 자발적인 구제 기금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회당이나 가난한 자들의 거리에 공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를 “나팔을 부는 행위”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하는 자들의 구제 행위가 외형적으로는 이웃을 향해 사랑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로부터 자신의 인격과 명성을 얻고자 했던 외식하는 자들의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교묘하게 이웃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팔을 붑니다. 구제하기 전에도, 구제한 후에도 나팔을 불며, 평생 동안 잊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팔을 붑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라고 주의를 주신 이유는 이웃을 향한 구제와 사랑의 태도를 미리 선전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제할 때도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제한 이후에도 구제한 결과를 나타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 구제를 통해 칭찬받고자 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 5:7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자로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웃을 향한 구제의 긍휼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태도일 뿐입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감사의 표현이 아니며, 상을 받기 위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님의 상은 없습니다.

3. 가난한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는 자신도 모르는 은밀함에 있다.

예수님은 마 6:3-4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라고 하시며 구제를 통해 이웃을 향해 나가는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구제를 통해 성도 자신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자신의 구제하는 모습”이 은밀하게 감취어지고, 그 구제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이 드러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은밀한 방법은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은 곧 자신이 행하는 구제의 행위를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구제가 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구제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구제라는 인식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역할이어서 자신의 생각과 기억에도 남지 않는 형태의 구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이루어질 뿐입니다.

사람의 경우, 육체적인 구조상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대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각각 반대편에 있는 몸의 지각과 운동을 담당합니다. 즉, 좌뇌는 몸의 오른쪽을, 우뇌는 몸의 왼쪽을 맡고 있습니다. 좌뇌는 언어뇌로써 언어중추가 자리 잡고 있어서 언어 구사 능력, 문자나 숫자, 기호의 이해, 조리에 맞는 사고 등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능력을 담당합니다. 우뇌는 이미지뇌로써 그림, 음악 감상, 스포츠 활동 등 감각적인 분야를 담당합니다.

이렇게 좌뇌와 우뇌가 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지만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공동 작업을 합니다. 즉 오른 손이 일을 한다면 이미 왼손은 오른손으로 인한 반사적인 감각을 지니게 됩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분리되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다년간의 연습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만일 오른손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동시에 왼손으로 삼각형을 그린다면, 좀처럼 쉽게 그 둘을 동시에 그릴 수 없습니다. 다년간의 숙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만큼 은밀한 구제는 쉽지 않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거울삼아 부단히 연습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 나팔을 불고자 하는 부패한 마음이 나타날 때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라는 보상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그로인한 세상의 평가나 세상의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을 포기할 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은밀한 구제로 이웃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조작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드러낼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은밀한 구제로 이웃에게 나갈 수 있습니다.

아직 옛 성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마음, 타락한 성품, 죄악에 사로잡힌 욕심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드러내며, 세상 앞에서 자신의 우월성이나 정당성이나 존귀성을 드러내려는 교묘한 술수들이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서 이러한 부끄러움들이 사라지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의 이웃을 향한 긍휼함의 태도가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구제 명령”을 통해 우리의 온전함을 검증하십니다. 이웃을 향한 나의 태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태도인지 검증하십니다. 세상에 나타난 나의 신분과 인격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온전한 모습인지 검증하십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나팔을 불어대며 구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있지 않은지 검증하십니다. 내 마음의 부패한 욕심이 재갈 물리지 못한 혀를 통해 세상에 구제의 나팔을 불 때 그 말들은 나의 인생을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예수님은 눅 12:33에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구제는 하늘나라에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롬 15:1-2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상만을 기다리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축복의 주머니를 만드는 태도입니다. 공동체 속의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당연한 활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성품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에게 긍휼의 마음을 전하는 성도들의 무의식적인 태도입니다. (김종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