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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4) 복음의 회복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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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간에 소설가 공지영씨가 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소설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인공은 사촌 오빠에게 강간을 당하여 수차례 자살을 기도하였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여인입니다. 딸이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어머니는 가문의 명예 때문에 쉬쉬 하였고, 도리어 딸을 책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인공이 더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어머니가 몹시 싫어졌고, 어머니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사형수를 만나면서 그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사형수를 돕는 사역을 하는 수녀 고모를 통하여 윤수라는 사형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관심없는 사형수, 뭇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죽어 마땅한 사형수이지만 그를 한 인간으로 사랑하는 수녀 고모, 그녀의 사랑으로 그렇게 포악한 사형수 윤수가 마음을 열게 됩니다. 윤수는 어려서부터 매일 술마시고 어머니를 폭행하는 알콜 중독 아버지, 그 아버지의 폭행을 이기지 못해 윤수와 동생을 놔두고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이런 기구한 세상에서 살다가 아버지도 죽고 고아원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을 저주하며 극악한 살인을 저질러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한 번도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교화위원인 주인공과 주인공의 고모 수녀를 만나 비로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부터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역시 사형수 윤수를 만나면서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기는 윤수가 자기와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와 윤수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윤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주인공 역시 윤수처럼 한 번도 가족의 사랑이나 연인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형수 윤수를 통하여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고 비로소 “사랑한다” 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 사랑이 사람을 바꿉니다. 사랑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입니다.
세상에 사랑만 있으면 해결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이해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회복되지 않을 관계도 없습니다. 누구와 관계가 서먹서먹하고, 불편하다면, 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내 안에 그를 향한 사랑이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배의식,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등 회의 이전에 사랑입니다. 교회의 정치 구조나 교육 시스템 이전에 사랑입니다. 봉사나 선교 이전에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회의, 사랑이 없는 시스템, 사랑이 없는 봉사나 선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기도, 사랑이 없는 은사, 사랑이 없는 능력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13)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복된 소식이 뭐냐 하면,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3;16)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 영원한 멸망, 지옥의 멸망에 던져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의 형벌 곧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6)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죄를 다 용서받고,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산다는 것입니다.

3. 이렇게 보면,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죽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가 기독교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퇴색해갔습니다. 교회가 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 등으로 위계질서를 갖추고, 체계를 갖추며, 제도화되면서 복음의 역동적인 능력이 서서히 힘을 잃어갔습니다. 교회는 형식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권력투쟁에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통관의례가 기독교예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태어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되는 100% 기독교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이 빛을 잃기 시작하였고, 형식과 의식, 전통과 관습, 기존 질서 유지가 곧 기독교인 것처럼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틴 루터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이런 슬로건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전통과 관습과 정치체제, 의식과 예배 이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삶의 규범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잃어버린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래 예수를 믿으면서, 혹 중세시대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 예수를 믿으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복음의 본질을.
죽어야 산다. 죽어야 산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죽는 것, 그래서 그가 사는 것,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요 복음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한 그 순간, 나는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은 예수 믿기 전의 나, 자기중심적인 나, 이기적인 나,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한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내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자존심이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존심을 다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다는 말은 내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잘못을 따질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합니다.
내 소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안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하면, 내 안에 욕심투성이인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살기 시작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권리를 포기하고, 내 자존심을 포기하면, 그 때부터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 작은 예수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 곧 내가 죽음으로,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이끄시는대로 따라 사는 믿음안에서 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따라,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며 사는 것보다 내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훨씬 잘 되고, 형통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누릴 권리를 포기합니다. 다시 말하여, 더 큰 축복을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권리를 포기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지금부터 4,000여년 전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로 간다는 것은 오늘날 이민가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하고 불안한 모험입니다. 생사를 걸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갔습니다. 단순하게 이 정도만 보면, 아브라함이 바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떠나라고 할 때에는 떠날 때 받게 되는 더 큰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나를 떠받쳐주는 사회적인 안정감을 포기하면,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안정망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떠받쳐주십니다. 나를 안전하게 떠받쳐주는 사회적 지위, 돈, 권력, 지식, 부모, 자식 등- 이런 것들만 붙잡고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생명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붙잡아 오던 것을 놓아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축복의 길로, 형통의 길로, 성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나은 축복을 받기 위해, 여러분의 권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내려놓으시지 않으렵니까?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욕구 때문에 혹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외롭고 불안하고, 화가 나지는 않습니까?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으십시오. 포기하십시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훨씬 행복할 것입니다.

4. 죽고 사는 것, 내가 죽어야 다른 사람이 사는 것-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16:24) 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네가 죽으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남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 그것은 곧 마땅한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비판하고 험담할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충분히 따질 수 있어도 따질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불평불만 할 수 있지만, 그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가족에게, 성도에게, 동료에게 간섭할 권리를 포기하십시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왕을 복수할 기회가 왔지만,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복수할 권리조차 포기하십시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복음적인 삶입니다.

5.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죽는 연습을 합니다. 아니 정말로 죽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죽는 삶을 살 때,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죽으면, 모든 권리는 사라집니다. 동산, 부동산의 모든 권리를 잃게 됩니다. 남편, 아내, 부모로서의 권리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후회합니다. 그동안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일생 투자해온 삶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지 깨닫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헤쳐 모여 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집니다. 돈, 명예, 권력, 이것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죽음을 앞두고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본질을 회복합시다.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야 다른 사람들이 산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하고, 내 자존심을 포기하고, 내 욕심을 버리고 죽는 것, 그런 산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사는 것이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가장 행복한 삶이요 축복된 삶입니다.
여러분, 죽으십시오. 분노를 죽이고, 화를 죽이고, 성질을 죽이고, 판단을 죽이고, 욕심을 죽이십시오. 그렇게 매일 살아가는 것이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이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오 재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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