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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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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삶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그 일을 위하여 진력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가장 먼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헤아려 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얼마나 많은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하는지 모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밤낮으로 부르짖었습니다(욘 2:1-10).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받고도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고 하였습니다(갈 1:17-18). 그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생활을 했던 때를 회고하면서 그 때를 가시채로 뒷발질하는 고통이라고 말했습니다(행 26:14). 사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다음 문제는 쉽게 풀리는 것을 체험합니다. 오히려 여간한 고난이 와도 그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고 확신만 하게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골 1:24).

그런데 여기 본문 말씀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면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러줍니다. 정말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편하고 쉽게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도 귀찮아하거나 짜증낼 일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거부할 이유가 없는 그야말로 행복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쉽게 찾아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I.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내리시는 축복의 명령입니다.
만약 항상 슬퍼하라고 하였거나 죽는 날까지 짜증만 내라고 하였다면 이는 저주스러운 명령일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라는 복된 분부를 하셨는데도 우리는 그 뜻을 못 받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기보다 슬퍼하는 일을 자초하고 있을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참으로 쉽고 좋을 것 같으나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거스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여겨집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명령은 코미디언들이 만들어내는 의도적인 기쁨이거나 억지로 꾸며서 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자연스럽고 평범한 삶속에서 나타나는 기쁨을 뜻합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짜증날 일만 있고 만나는 사람들이나 주어진 환경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10에 보면 그리스도의 탄생하시던 그 시간 크리스마스의 새벽 송을 하던 천사는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아이에게는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도 얼굴에 기쁨이 없지만 엄마 옆에서 놀로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마냥 기쁨과 웃음이 있습니다. 고달프고 슬픈 일이 많은 세상에서도 기쁨의 원인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에게는 임마누엘의 기쁨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2) 언제나 기뻐하는 삶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말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어떤 경우에든지 기쁨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4:4에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억지로라도 기뻐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 기뻐하는 것이야 쉽지만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기뻐한다는 것은 용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은 하루 이틀 기뻐한다거나 젊은 시절, 또는 행복한 시기와 같이 일정한 기간만의 기쁨이 아니고 평생 동안 기쁨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솔로몬 왕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 7:14). 보통 사람들 같으면 형통한 날에 기뻐하다가 곤고한 날에는 슬퍼하거나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곤고한 날에 잠시 생각의 여유를 가지면서 곧 형통한 날로 바뀌게 될 것을 기대하며 기쁨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30:4-5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 헌신자의 삶을 통한 기쁨

항상 기뻐하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삶의 소유자입니다. 삶의 목표가 건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생활 가운데서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시편 84:10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누리게 되는 특권을 거절하고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11:26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기쁨과 행복은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편하고 호화롭게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값지고 유용하게 봉사하는 것으로써 그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빌 2:17-18).

II.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기도가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곧 기쁨과 감사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옥중에서 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그 때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간수가 회개하고 구라파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행 16:25-31).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신앙의 호흡을 이어가는 일입니다. 경건한 성도는 쉬지 않는 기도로 영적 생명이 유지 되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빌립보서 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개성이 강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인 것처럼 고집하며 그것만 관철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사야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유대주의적 사상과 전통에 깊이 젖어 있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속되고 부정하다고 거부했던 음식을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하게 하였으니 먹으라고 하시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방인 군대장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행 10:19-29).

(2) 기도의 응답을 체험합니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약 1:5). 그는 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약 4:2-3).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고 하였습니다(약 1:6). 다만 그 이루어지는 시간이나 방법, 또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내가 원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배려하시고 더 좋게 이루어 주십니다(마 7:11).

옛날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일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밧세바가 나은 아이를 치셨으므로 그 아이가 일주일 동안 앓고 있었는데 그 때 다윗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식음을 전폐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그 아이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며 하나님의 결정에 승복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삼하 12:20). 그 상황만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거부한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훌륭한 아들 솔로몬을 주셨습니다(삼하 12:24). 솔로몬이 왕이 된 후 다윗이 못다 이룬 성전건축을 완성하였고, 이스라엘 역사에 황금시대를 열게 하였습니다.

(3)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솔로몬 왕은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상 3:12에 보면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지혜와 순발력을 주십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그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 3:13-17). 기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 하나님께로부터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도 주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내력도 주시고, 담대함과 용기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며 무엇보다도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엡 1:17-19). 정말 은혜로운 기도 자는 항상 마음속에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령한 눈이 열리고 입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기쁨의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III.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어느 때나 무슨 일이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뜻합니다. 특히 은혜롭고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역경가운데서 감사하는 것은 힘이 드는 일입니다. 이때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구원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과 더 나아가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의미 있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요나 2:8-9에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고 하였습니다.

(1) 마음을 비울 때 감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강론하신 팔복 중 제일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마 5:3). 마음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감사로 이어집니다. 욕심이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받고도 감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2:16-17).

선지자 하박국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불만과 욕심을 다 비우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

(2) 진정한 예배를 통해서 감사를 실천합니다.

감사도 입으로 하는 고백과 찬송으로 표현되지만 결국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져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감사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실천됩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 116:12-17).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는 성도들은 평생 동안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 예배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하므로 복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3) 감사의 재생산입니다.

우리말에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고 감사는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의 삶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더욱 풍성하게 되고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 감사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의 손에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께 바쳐지고 그것을 손에든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었을 때 오천 명이 넘는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던 사실을 상기 할 수 있습니다(요 6:9-1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가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감사의 조건을 삼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 곧 사단의 사자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머문다고 하여 감사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 우리는 지금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기쁨과 감사로 행복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만하면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셔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마 6:33).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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