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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용서 (마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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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문화는 죄라는 말을 끝없이 사용합니다. 실제적으로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죄인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평생토록 불안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죄책감이 적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속에는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소리를 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양심의 법 앞에는 꼼짝 못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우리가 근본적으로 살펴볼 때 몇 가지 뜻과 의미가 있는데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헬라어로 ‘하말티아’라는 말로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이 죄의 근본정신은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양궁 선수들이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데 그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빚나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과녁대로 살지 않고 옆으로 빗나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났다. 그것이 죄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채무를 졌다는 말입니다. 빚을 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빚을 진 자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죄인스럽습니다. 무엇이든지 빚은 큰 죄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화는 선진국일수록 빚을 많이 질 수밖에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사든지 집을 사든지 모든 은행에 융자를 내서 빚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문화를 말하고, 국가는 빚을 많이 국민들에게 줌으로써 들어오는 이자로 국가 재정을 운영하는 재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선진국일수록 이런 시스템이 더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빚을 졌으면 그것을 다 갚기 전에는 항상 죄인같이 살아갑니다. 죄 값을 가혹하게 받을 때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유학 와서 공부하는 학생 한 명이 저를 찾아와서 “학교에다 융자 신청을 해야 되는데 학교가 저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누구든지 저를 보증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사인을 해야만  융자를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절대 손해를 안 끼칠 테니까 보증을 서주시면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자고 기도하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교에서 내 사인은 믿을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퇴짜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 항의를 했습니다. “제가 한번도 재정 관계에 그런 부당한 일은 안 하고 신용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인데 왜 제 사인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까?” 따졌더니 “당신은 빚이 너무 많아서 갚을 능력이 의심이 갑니다.”고 그러는 겁니다. “아니, 무슨 빚이 그렇게 많다는 겁니까?” “당신은 지금 몇 백만 달러의 빚이 지금 있는데 이 학생이 만약에 등록비를 못 내면 당신이 어떻게 그 융자를 갚겠다고 사인을 했습니까? 당신 월급에 비해서 당신 빚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진 적이 없는데…. 따져보니까 교회 건축할 때 융자 얻은 게 있습니다. 수백만 달러 얻었잖아요? 그것을 제가 다 책임자로 사인을 했단 말입니다. 그 빚이 내게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이 땅에서 이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사인 한번 한 것이 이렇게 나에게 큰 짐이 되는구나!’ 그 후로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이 빚을 다 갚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주  신용이 나빠져 어디 가서도 살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빚을, 800만 달러 이상 되는 빚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기다려서 다 끝나는 날 헌당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 주일날 제가 고별 설교를 하고 이곳으로 와버렸습니다. 어떻게 제가 속이 시원한지 모르겠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죄를 없애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죄를 없애는 것이 구원입니다. 먼저 구약을 봅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죄를 알려주셨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 죄를 알려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종교성이 있고 하나는 윤리성입니다. 성경의 죄는 종교성이 훨씬 더 강조되는 말입니다. 한번 실례를 들어보면, 우리 주위에 훌륭한 시민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 집 옆에 누가 사는데 그분은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법을 준수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고 시민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한 노력을 하는 모범적 인간이요, 훌륭한 남편이요, 멋있는 아버지요, 존경받는 유지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분 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 앞에 가서 여러분이 “여보시오!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큰 죄인이오. 왜 그렇게 사십니까?” 이런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정신 나갔나? 당신 누구요?” 그런 반응을 보일 겁니다. 아마 제가 계속 해서 그렇게 말한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저를 정신병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틀린 말을 했는가? 아니오. 정확한 말을 한 겁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제일 큰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죄가 제일 큽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제일 큰 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런 죄를 짓고 사는가? 죄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선 이 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무엇이 죄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만 주시고 그 해결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모두 저주나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해결책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제사법입니다. 죄가 있을 때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의 방법으로 아주 세밀하게 가르쳐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은총, 구원의 길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신약 시대에 와서는 구약 시대의 그 번거로운 제사법은 다 사라졌습니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모든 제사를 드려줌으로 그 사실을 믿는 자는 다른 제사가 필요 없이 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백성이 되는 방법을 하나님이 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는 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세상 사람은 모릅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보면 인간의 삶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빚진 자로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빚이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양육의 빚을 졌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빚을 졌습니다. 이것은 갚을 길이 없는 빚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뭐냐? 아기를 낳아서 훌륭하게 잘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없으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양육의 빚을 진 자입니다. 그 다음에는 교육의 빚을 졌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 유치원 시대부터 대학교까지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위해서 수고해 주셨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신앙의 빚을 졌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이 이만큼 되기까지 주일학교 때부터 얼마나 많은 신앙 지도자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했고 나를 위해서 말씀을 전해주셨는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것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육의 빚, 교육의 빚, 신앙의 빚 등 수없이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사는가? 우리가 살고자 하면 모든  것에 조건이 필요합니다. 공기가 필요하고, 물이 필요하고, 태양 빛과 열이 필요하고 평생 동안 사용하는 모든 생명 근원적 요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갚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 자체는 빚 덩어리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빚을 지고 사는 존재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정확한 생각입니다. 바울 선생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빚진 자로다. 하나님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갚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 몸을 던져 불살라서 평생 받은 은혜를 열심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끼치고자 하는 은혜 속에서 살겠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선교사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빚을 진 겁니다. 내가 선교사가 되지 않는 한 영원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큰 빚과 죄 가운데 내가 있으니 어떻게 해야 이 죄와 빚을 없어지는가? 사실 인간에게 최대의 선물과 축복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며 늘 선언해 주셨습니다. “네 병이 나았느니라.” 그러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몸에 있던 질병이 치유를 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입니다. “네가 병이 나아서 건강해졌지만 마지막에 또 병이 나서 죽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은혜다. 너는 오늘 나를 만나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방법을 오늘 주기도문에서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라!” 회개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함을 달라고 하라 그리하면 사함을 주시리라.” 이 약속을 주님이 하셨잖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계속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험악한 세상도 평화스러워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티모시 맥베이’라는 청년 한 명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범으로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한 청년이 잘못 생각한 결과로 168명의 생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이 장애인이 생겼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6년 동안 들어간 경비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수백 명의 유가족들은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밝혀져 마지막에 할 수 없이 그를 사형시키는데 그날 미국의 모든 언론들의 첫머리 글자는 뭐라고 보도했느냐 하면 “그는 참회 없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자기의 죄를 참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가서 그 죄를 용서받으라고 기도를 해주려고 해도 참회 없이 그냥 죽었다는 겁니다. 모든 언론의 첫머리가 그 말로 보도를 했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용서조차도 성령님의 인도 없이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내 잘못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셔야 잘못을 알 수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그 자세는 지금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하지 못하는 무능이 있다고 신학자들이 말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용서해달라고 비는 자를 용서 안 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열심히 합니다.

여기 카톨릭 신자들도 더러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 모든 죄를 다 고백할 때 그 신부의 마지막 선언이 언제나 똑같습니다. “형제여, 당신의 모든 죄는 사하여졌습니다.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평생 죄를 짓는데 평생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죄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살아야 되지만 그래도 인간은 죄 속에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 사함을, 회개라고 하는 축복의 길로 열어주심으로 우리는 사함을 받는 거란 말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됩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 이 말은 무한대의 용서의 의미를 포함한 내용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짓는 죄는 남기지 말고 그때그때 즉시 회개 기도를 통해서 사함을 얻고 평안히 살라!” 주님이 그 방법을 지금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면 다 용서하여 주십니다. 살인한 강도도 십자가 매달려 주님을 향해 회개하는 말 한마디를 했더니 주님은 “그 자리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죄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도 회개로 다 용서함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구약같이 제사장의 중보기도 없이 나와 하나님이 직접 만나서 해결될 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가깝게 잘 표현한 예수님의 설교는 탕자 비유 설교입니다. 거기에 보면 아버지의 무한대의 자비의 마음이 조명되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과거에 자기가 아들 때문에 겪었던 그 모든 고통을 아들을 만나는 순간 모두 용서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로 그 설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탕자에게도 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탕자의 의가 무엇인가? 회개하였다는 겁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회개를 합니다. 이것이 탕자의 의입니다. “이제는 품꾼의 하나로 나를 써 주옵소서.” 의가 인정을 받는다고 예수님이 직접 예화 설교하신 겁니다. 만약 그때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말하기를 “당연한 내 몫을 가지고 내가 썼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더 주시오!” 그랬다면 그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일으켰을까? 분명한 것은 아들을 용서해줄 수 있는 기회마저도 그 아버지는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탕자는 나쁜 생활을 했지만 그러나 한 가지 의는 잡았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갈 것이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품꾼의 하나로 나를 써 주옵소서.” 이것이 죄인이 가지고 있는 의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가르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탕자들이여! 다 그 의를 붙잡고 아버지께로 오라!” 우리가 자신의 약점이나 허물, 죄를 인정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죄인이 지니고 있는 의이며, 희망이요, 구원의 빛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못하는 겁니다. 잘못하고도 잘못한 줄 모릅니다. 미친 사람이 자기가 미쳤다는 것을 알면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정을 안 하니까 못 고치는 겁니다. 회개하면 모두 다 사함을 주시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이 기독교를 은혜와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 주님은 한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이 조건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것이 조건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너도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내가 지금 큰 죄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큰 죄를 내가 용서하면 내 죄는 자연히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역학 관계의 진리입니다. 내 죄가 작다고 합시다. 다른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하면 내 죄도 없어집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비유 설교를 보면, 어떤 사람이 임금님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달러로 한번 계산해 보니까 이천만 달러 이상이 되는 그런 큰 빚을 졌습니다. 갚을 길이 없어 임금님에게 울면서 애원을 합니다. 임금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이 갚을 길이 없는 사람을 두들겨 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나!’ 탕감해 주었습니다. “가거라!” 그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어 임금님 앞을 떠났습니다. 너무나도 기뻐하며 가다가 보니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형제를 한 명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얼마인가?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시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 그러니까 하루 한 데나리온은 건강한 사람의 하루 임금이 됩니다. 백 데나리온은 그 정도의 돈입니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이 사람은 멱살을 붙잡고 “왜 빚을 안 갚느냐?”라고 합니다. “갚겠습니다.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라고 사정을 합니다. 용서하지 아니하고 “네 처자를 다 팔아서라도 갚으라!” 아주 심하게 했습니다. 임금님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놈을 다시 데리고 와라! 내가 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백 데나리온의 빚도 탕감해 주지 못하느냐? 이 놈을 큰 벌에 처하라!” 그런 예화 설교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큰 죄를 항상 용서받기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는 절대 용서하지 아니하는 그런 마음 밭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다.” 이것이 조건입니다. 탕감 받을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 좀 섭섭한 일을 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거기 있으리라는 예화 설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용서하는 자만이 용서받는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일본 사람들과 우리가 감정이 좀 안 좋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하고 미국하고 감정이 더 안 좋아야 합니다. 두 나라는 운명이 달린 심각한 전쟁을 했습니다. 만약 그때 미국이 패했다면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그런 입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미국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 2세들이 미국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모든 인종의 우수성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겁니다. “흑인들은 이 땅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 체육과 재즈 음악에 공헌했다. 이태리 사람들은 가구 문화에 있어서 미국에 공헌한 민족이다.” 인종마다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땅에서 미국을 위해서 생명을 바쳤다”는 평가를 합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미국에 사는 일본 청년들이 군에 입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 일에 일본 청년들이 앞장섰습니다. ‘이노우애’라고 하는 일본 사람은 그렇게 전쟁에 나가서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상위용사로서 제대를 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하와이에서 해마다 상원의원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수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미국 사람들이 그를 상원의원으로 뽑아주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당신의 그 떨어져나간 팔은 미국을 위해서 싸워준 것이기 때문에”라는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왜 일본인들이 원수의 나라였던 미국에 충성을 약속하고 나섰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이 있는데 미국의 위대한 철학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침범했던 일본을 용서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일본의 재건을 위해서 가장 많은 노력을 해준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에 있는 모든 일본인에게 가장 훌륭한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우정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다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는데 절대적 보호를 받고 살 수 있는 길을 이 나라가 열어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원수였던 두 나라가 가장 우방입니다. 미국의 말을 제일 잘 듣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오늘 주님은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인 죄의 문제를 두 가지로 해결하라 하셨습니다.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 회개하라.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인정하라. 그리고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 그리하면 어떤 죄도 네가 다 사함을 얻을 것이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이 교회 문을 나가실 때 여러분 영혼에 가득히 들리는 주님의 음성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음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죄와 용서, 회개를 통해서 사함을 얻으라!” 우리는 날마다 죄짓고 삽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것만이 죄인의 의가 되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고 훌륭한 삶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영적 능력의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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