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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1] : 네 가지 땅 (눅 8: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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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오늘부터 13주 동안 주일 낮에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4복음서에 골고루 나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별히 누가복음에 나온 비유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보에도 나온 것처럼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 연구>라는 부제가 붙어있고,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아니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씨 뿌려진 땅의 비유’를 다룰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비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비유’라는 것은 영어로 parable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 ‘파라볼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파라볼레’라는 헬라어는 두 개의 낱말이 합쳐져 생긴 말인데 바로 ‘나란히’라는 뜻의 전치사 ‘파라’와 ‘던지다’라는 뜻의 ‘발로’가 합성된 것입니다. 두 말을 합치면 ‘옆에 나란히 두고 말한다(가르친다)’는 뜻이 되지요.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두 대상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는 것을 비유라고 합니다. 학교 다닐 때 국어공부 열심히 하신 분들은 아마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비유법에는 직유법과 은유법이 있는데 ‘쟁반 같이 둥근 달’ 하는 식으로 직접 두 개의 사물을 비교하는 방법을 직유법이라고 하고,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식으로 사물의 본뜻을 숨기고 표현하려는 대상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비유법을 은유법이라고 합니다. 맞지요? 이게 바로 비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직유법 은유법 등의 비유법을 가장 즐겨 사용하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34절에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할 정도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칠 때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탁월한 설교가요 교사였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되 듣는 사람이 너무나 알아듣기 쉽게 사용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드실 때 주로 당시 사람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일들, 혹은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들을 먹이고 입히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무엇을 비유로 드십니까? 바로 새와 백합화의 비유인데 “공중의 새를 보라!”(마 6:26) 하실 때 사람들은 공중을 보았고 실제로 거기 나는 새들을 볼 수 있었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마 6:28) 하실 때 주변을 보면 실제로 들에 핀 백합화를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실감 나는 시청각교육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주로 종사하던 농업이나 어업을 비유로 사용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직업에 관계된 것이다 보니 사람들이 이해하기 너무 쉬웠던 것입니다. 저도 군목일 때 군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주로 부대 이야기, 혹은 애인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의 눈이 커지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졸려서 쉬려고 교회 온 병사들이 많은데 그들 앞에서 철학이나 남의 나라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탁월한 설교가요 교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부터 누가복음에 나온 비유들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했는지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비유의 제목

그러면 이제 오늘의 비유인 누가복음 8장 4~15절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우선 오늘 비유는 예수님의 그 어떤 비유보다 우리에게 친숙한 비유입니다. 교회를 몇 년 이상 다닌 분들이라면 누구나 이 비유를 여러 번 듣고 설교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나는 이 비유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곳에 늘 함정이 있습니다. 내가 잘 아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오히려 너무나 잘못 알아온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이 비유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우선 제목부터 잘못 알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에 보면 비유의 제목이 붙어있는 성경이 있을 텐데 뭐라고 붙어 있습니까? 대부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까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었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제목부터가 내용의 핵심과 거리가 멉니다. 여러분도 남이 붙여준 제목부터 보지 말고 내 눈으로 직접 이 비유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과연 이 비유의 핵심이 ‘씨를 뿌리는 자’입니까? 아니면 ‘뿌려진 씨’가 핵심입니까? 여러분 이미 다 아시지요? 여기서 ‘씨’란 무엇을 뜻합니까? 본문 11절에서 주님이 직접 설명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주님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니까 예수님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핵심은 씨나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주님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 이 비유를 드신 것입니까? 뿌려진 씨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씨를 뿌리는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씨’입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씨도 똑같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뭐가 다릅니까? 바로 씨가 뿌려진 땅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길 가,’ ‘바위 위에 얇게 덮인 흙 땅,’ ‘가시떨기가 있는 땅,’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씨도 똑같고 그 씨를 뿌리는 사람도 똑같은데 땅의 종류가, 흙의 상태가 네 가지로 다른 것입니다. 그 땅의 상태에 따라 결실을 못 할 수도 있고, 또 백배의 결실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비유의 핵심은 땅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제목을 뭐라고 붙여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아니고 ‘뿌려진 씨의 비유’도 아닌 ‘씨 뿌려진 땅의 비유’인 것입니다. 제목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네 가지 땅

그러면 이제 제목은 이 정도로 하고 그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제가 이 시간 이 비유의 내용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들어온 이야기일 테니까 다 아는 내용을 제가 이야기하면 얼마나 식상하겠습니까?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밭을 갈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씨를 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 제일 먼저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뿌려진 씨는 흙이 단단해서 길 가에 방치되고 발에 밟히다가 결국 새가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주님이 친히 해주신 설명에 의하면 이 새는 마귀입니다. 길 가란 농토의 한 부분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자꾸 밟힘으로 단단해진 땅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 길 가처럼 단단할 때 말씀을 마귀에게 빼앗기게 되는데, 12절에 보면 이렇게 완고한 사람도 말씀을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씨가 흙에 묻히지 않아 노출됨으로 마귀(새)가 와서 빼앗은 것입니다. 주님이 12절에 ‘마음에서 빼앗았다’고 하시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듣기는 해도 그 말씀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해서 빼앗기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 또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집니다. 바위 위에는 얇은 흙이 덮여 있으므로 씨가 자랄 수는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바위가 햇볕을 받아 따뜻하게 덥혀지기 때문에 씨가 더 빨리 싹이 트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쉽게 발아한 씨가 수분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곧 말라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마태나 마가복음의 표현처럼 뿌리가 없어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 받을 수 없으므로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 세 번째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입니다. 씨가 뿌려져 잘 자랐고 잡초인 가시떨기조차 잘 자랐다고 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좋은 땅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도 싹이 터서 잘 자라지만 문제는 그 가시떨기 역시 함께 잘 자라서 결국 그 가시떨기가 씨가 자라는 것을 막게 된 것입니다. 가시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떨기 같은 잡초가 훨씬 더 성장력이 강하기 때문에 결국 이 가시떨기에 양분을 빼앗겨(=질식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경우를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배반하는 자’라고 설명하십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세상적인 염려나 재물의 욕심이나 향락이 빠져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요.

󰊴 네 번째 땅은 ‘좋은 땅’입니다. 이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주님이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신앙이 열매를 듣기 위해서는 우선 말씀을 듣고 ➛ 그 다음에 말씀 그대로 지키고(실천) ➛ 열매를 맺을 때까지 잘 참고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상의 네 가지 땅에 대해 살펴보니 우리는 주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신 내용만 봐도 얼마든지 이 비유의 의미를 깨달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도면 이 비유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봅시다. 과연 우리는 이 비유의 깊은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흙은 같은 흙이로되

우선 우리가 이 비유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만 우리는 흔히 이 비유에 나오는 땅이 네 가지의 각각 다른 흙인 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의 각각 다른 흙이 어떤 종류냐에 따라 결실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 번 본문을 보십시오. 흙은 다르지 않습니다. 흙은 다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울 것입니다. 지금 씨 뿌리는 사람이 각각 다른 밭에 가서 씨를 뿌린 것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효자동 사는 농부 박 씨라고 생각하고 그 씨를 뿌린 장소가, 그 밭이 그 박 씨네 밭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박 씨가 뿌린 씨가 여기 저기 뿌려지다보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씨를 뿌릴 때 사람이 손으로 뿌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씨앗을 넣은 자루에 작은 구멍을 내서 사람이 가지고 다니거나 짐승이 싣고 여기저기 다니며 씨를 뿌렸습니다.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장소를 가려가며 뿌린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며 되는대로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박 씨가 반드시 옥토에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러는 엉뚱한 데 떨어지기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씨는 이 씨네 밭 중에서 사람들이 농로로 사용하면서 오다가다 밟아서 단단해진 농로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씨는 돌이 들어있는 안 좋은 땅에, 또 어떤 씨는 가시떨기가 자란 곳에 떨어지기도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 같은 밭이므로 분명히 흙은 다 같은 좋은 흙입니다. 그런데 뭐가 다릅니까? 그 흙의 상태와 자세가 다른 것입니다. 첫 번째 땅은 어떻습니까? 비록 좋은 흙이지만 자꾸 사람들이 밟아서 단단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땅 속으로 뿌리가 내리지도 못합니다. 두 번째 땅도 비록 좋은 흙이지만 그 밑에 큰 돌이 들어있어 뿌리가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세 번째 땅도 참 좋은데 가시떨기가 함께 자란 바람에 결실하지 못한 것이지요. 즉, 하나님이 우리 마음 밭의 성분을 그렇게 완전히 다르게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조금 더 착하고 선한 사람이 있고 조금 더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타고난 기질이 못된 사람도 있고, 고집 센 사람도 있고, 온유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만큼 그렇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기 앉아있는 우리나 저 감옥에 갇힌 흉악범이나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사람이 선해봐야 얼마나 선할 것이며 악해 봐야 얼마나 악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흙으로 만든 존재입니다. 같은 흙을 재료로 만들어졌기에 다 고만고만하고 그리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를 만든 흙은 다 비슷하되 그 흙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 단단해진 마음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입니다. 아예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처음부터 이렇게 완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던 사람인데 점차 고집과 자기주장이 강해지면서 그야말로 씨알도 안 먹히는 완고한 사람으로 변해 간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입니다. 착하게 살 것 같고 잘 믿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단단한, 길 가의 흙보다 몇 배나 더 단단한 바위가 들어 있습니다. 그 좋은 흙은 그 완고한 바위 위에 살짝 덮여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본질은 그 살짝 덮인 흙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바위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남들보다 더 빨리 은혜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심령 속에 자리 잡은 육중한 바위를 들어내기 전에는 절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잠시 확 피었다가 꺼지는 신앙이 되거나, 평생을 뿌리도 못 내리고 고만고만하게 예수 믿다가 가거나, 주님 말씀대로 조금만 시험을 받으면 시들고 마는 신앙인입니다.

󰊳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정말 무럭무럭 자랍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가시떨기입니다. 가시떨기가 씨앗보다 나중에 난 것이 아니라 이미 씨가 뿌려지기 전부터 그에게는 가시떨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타고난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모난 마음, 남을 찌르고 상처 줄 수 있는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또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잡다한 생각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일에 대한 온갖 염려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육신의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습니다. 정말 옥토와 같은 사람이라면 나중에 뿌려진 복음의 씨가 더 잘 자라 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가시 같은 마음과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가시떨기가 더 잘 자라 씨앗을 누르고 기운을 막아 결국 복음의 씨앗은 열매를 못 맺고 시들어 버립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주변에 이런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내 마음속에 본디부터 있는 모난 마음, 잡다한 생각들이 기 싸움을 하는데 그만 후자가 기가 더 세서 복음이 눌리고 질식되고 마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정말 좋은 땅입니다. 흙이 좋아서 뿌려진 씨는 정상적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흙도 좋아야 하지만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깨끗해야 씨는 아무 방해 없이 잘 자라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의 심령이나 마음 상태가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는 그 어떠한 방해거리도 없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완악해지거나 완고해서도 안 되지만 나아가 아무도 모르게, 때로는 나 자신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완고함이나 완악함이 숨어있어도 안 됩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와 나의 뿌리 내림과 결실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마음을 혼란하게 하거나 뿌리 내림을 방해할 어떤 잡다한 생각이나 가시도 없어야 합니다.

진정 좋은 마음 밭은 물론 타고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단단해진 마음 밭을 갈고 골라서 좋은 상태로 기경할 수도 있습니다. 또 내 마음속 깊숙이 들어있는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파냄으로(참 어려운 일이지만)도 가능합니다. 내 마음을 가리고 방해하는 가시덤불을 걷어냄으로도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이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적인 결실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완고함이나 완악함, 혹은 내 속에 잠재한 쓴 뿌리들, 가시와 같이 찌르는 자세들, 내 마음을 흩어놓고 가리우는 잡다하고 세상적인 생각들, 이 모든 것을 제하지 아니하고는, 나 자신을 이런 것들로부터 깨끗케 하지 않고는(“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 2:21) 주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마음 밭을 잘 개간함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열매들을 많이 맺고 백배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주님의 땅이 되어 봅시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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