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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의 신앙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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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는 네 번의 “그러므로”가 등장합니다. 25절의 “그러므로”는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고자 하는 사람이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분명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므로, 그리고 오직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염려는 근심하고 걱정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이 있다고 말합니다(고후 7:10). 바울은 날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염려 속에서 살았는데(고후 11:28-29), 이런 근심은 좀 더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숙시킵니다(고후 7:11).  예수님께서 금하신 것은 이런 근심이 아니라 ‘세상 근심’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을 잘 구별하지 못하면,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염려하고, 염려해야 할 것을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네 번의 “그러므로”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인 것과 염려가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별해주며,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될 분명한 근거를 제공해주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25절부터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목숨과 몸을 그것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목숨을 상실하게 되었고 몸은 썩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처지가 되었어도 하나님은 그 목숨과 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해서 죄책과 오염 속에 살아가는 그들에게 다시금 영원한 목숨,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중적으로 우리 목숨과 몸의 주인이신 셈입니다. 창조하신 주인, 구원하신 주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의 목숨과 몸을 소중히 여기셨기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도 당연히 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만 하시고, 그 후로는 알아서 살도록 무관심과 무책임 속에 버려두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창조’하신 후에도 관심과 책임을 가지고 그 생명을 ‘보존’하시는 분입니다.

새들은 날아다니려면 가능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먹고 몸에 저장해둘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작은 새들은 반나절만 먹이를 먹지 못해도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새장에 키우는 새는 주인의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굶어 죽는 일이 있지만, 자연을 날아다니는 새 중에서 굶어 죽는 새는 없습니다. 저는 먹이를 혹시라도 못 구할까봐 한숨 쉬며 염려하는 새를 본적이 없고, 굶어 죽은 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둥지에 가만히 있는 새의 입에 먹이를 배달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새들은 먹이를 찾아서 부지런히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새들의 먹이를 예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새들을 볼 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11)고 했습니다. 일관되게 게으른 자를 책망합니다(잠 26:13-15).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백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만나를 거두러 가야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수고 없이 그냥 놀고먹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먹을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26절에서 “너희”란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들도 사랑하신다면 “천부”께서 자녀인 너희는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새 먹이는 매일 챙겨 주면서 사랑하는 자식을 굶기는 부모는 이 땅에도 없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셨던 아버지께서 새들만 먹이시고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오늘도 아빠, 엄마가 밥을 주실 지 염려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것 역시 전혀 쓸데없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7) 염려한다고 생명을 좀 더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설령 날마다 염려해서 좀 더 풍족하고 좀 더 맛있게 먹는다고 해서 더 오래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염려는 백해무익합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8-29) 만약 우리가 백합화를 현미경으로 관찰해본다면, 이 세상의 어떤 멋진 옷도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그 조직이 섬세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살이 들풀이라고 대충 만들어놓지 않으셨습니다. 섬세한 관심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루하루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더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여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염려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고, 얼마나 섬세하게 인도하셨으며, 얼마나 온전하게 보호하셨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때, 각종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섬세하게 인도하신 사랑과 필요를 적절하게 공급하시는 그 놀라운 방법과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그 능력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여 보지 않으면 믿음이 떨어집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 적은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불충분하고 약한 믿음을 말합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확신하지만 일상생활 문제와 관련해서는 불안해하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 확신하지만 이 땅에서는 왠지 좋은 것을 아껴놓으실 것처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상황이 조금만 달라지면 이전에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적용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통제하기보다, 환경이 자기 생각을 지배하도록 버려둡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생활이란 녀석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와서 우리의 머리를 내리치면 우리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좌절당하여 생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책망의 말씀을 접하고 나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데, 또 다시 믿음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한숨 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자신이나 환경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해야 할 사람입니다.  새보다 우리를 더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들풀보다 더 섬세한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3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공급되어야 하는지, 가장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 다 아십니다.

염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마음을 헤아려보면, ‘아무도 내 마음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모르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내게는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 ‘하나님은 아시고 내게 관심도 있으시지만, 채워주실 능력이 없으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실생활에서 나타내 보이는 반응도 불신자와는 다른 생각과 다른 태도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불신자들은 최우선순위는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서 예수님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최우선순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우선순위입니다.

어떤 면에서 33절은 주기도문 전체를 요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먼저 구할 때,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는 것들이 더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생활 문제로 염려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불신자와는 구별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감으로써 사람이 떡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것임을 나타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염려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신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벧전 5:6-7).

우리는 염려하지 않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이나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 것도 구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막연히 긍정적인 생각, 혹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염려는 사람을 사로잡는 강한 세력입니다. 그것은 온갖 것을 상상해가며 염려하게 합니다. 또한 ‘염려’는 ‘신뢰’와는 대척적인 관계여서 염려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 멀어지고,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염려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34) 매일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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