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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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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한국교회 미래리포트”라는 통계조사를 근거로 한 책자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을 잘 분석하여 통계를 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조사에서 종교현황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국인의 신앙의식,한국개신교인의 교회생활,현출석교회 평가에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통계를 내었습니다. 2004년 2월에 시작하여 2004년 12월까지를 근거로 하여 2005년 1월에 이런 통계를 내었앗습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를 통해서 믿음 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난 통계를 보았습니다.

과거에 교회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나서 현재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로 소개되는 6가지가 이렇습니다. 1위 생활이 바빠서 2위 믿음의 확신이 없어서 3위 다니기 귀찮아서 4위 필요없어서 5위 헌금을 강요해서 6위 생활에 도움이 안되어서 이유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생활이 바쁜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교회를 잘 다니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38% 1위가 생활이 바빠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못해서 이유였습니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부분이 아닙니다.
혼자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해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종종 믿음 생활을 하다가 낙오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생활이 바빠서 라고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지만 저는 꼭 그렇게만은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낙오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다가 오병이어의 기적 이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예수님 곁을 떠나 버립니다.남자 장정만 5천명이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5천명중 주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그들이 왜 주님을 떠나고 있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날도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개인마다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유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굉장히 아팠을 것입니다. 떠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와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함께 믿음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가슴아픈 때는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교회를 다니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열심을 내던 분들이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보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믿음 생활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갈 수록 더욱 믿음에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1. 믿음이 있어야 떠나지 않습니다.

60-61절에 보십시오.여기 주님 앞에 선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60절“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가 어렵다고 합니다. 누가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느냐 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어렵고 성경이 어렵습니까? 물론 말씀에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어렵고 주님이 어려운 이유는 어려운 것이 주 문제가 아닙니다.그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접근하면 모든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해를 하지 못해서 어려운 부분보다도 우리가 삶에서 대부분 지키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쉽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은 넘어갑니다. 믿음이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가서 처음 입학하여 배우는 학문이 헬라어였습니다. 저는 일반대학교 출신이라 이런 글자를 난생 처음 보고 배웠습니다. 한달간 기숙사에 합숙하여 이 글자를 배우는데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피하지 않고 열심히 하게 되니까 어려운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목사가 되지 않고 주님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공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불신자인 어떤 분은 제가 목사라고 신분을 밝히니까  아유 그렇게 힘든 길을 어떻게 가십니까? 하면서 동정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저는 목회는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길이기에 믿음으로 가니까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면서 어떤 분들에게는 어려운 길일 수 있습니다.
관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육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은 영으로 접근하면 쉽습니다. 그러나 육으로 영을 접근하면 영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3절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있으나 영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땅의 법칙으로 땅의 빵을 구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어렵습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를 위하여 포기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육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영적인 관심을 갖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땅에 것들에 대하여 기대를 걸고,육신의 빵을 구하는 것에 기대가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매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결론적으로  64절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롯유다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이 선택한 12명의 제자중 한사람이었습니다.
3년씩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제자들과 함께 하다가 결국 주님과 제자들을 떠났습니다. 오늘 우리 식으로 말씀하면 3년동안 교회에서 장로와 같은 지도자로 사역을 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왜 세상을 갔습니까? 결론은 육적인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는 세상욕심 때문에 지금 마음을 갈등하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욕심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십니다.욕심이 개인을 망칩니다. 욕심이 가정을 망칩니다. 욕심이 교회를 망치고 사회를 망치고 국가를 망칩니다. 지금도 이 세상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가는 수많은 가롯유다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는 가정이 없습니다. 모두가 물질의 부족 때문에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이 없으면 정말 우리는 많은 고통과 수고를 겪어야 합니다. 돈이 있으면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다. 돈이 있으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돈의 힘 앞에 무릎끓고 돈 때문에 주님까지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돈을 소유한 순간어떻습니까?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불안합니다.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잘못 사용하면 욕을 얻어먹습니다.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계가망가지고 살인이 일어나기도 합니다.저는 돈 때문에 부자지간의 의가 끊어지는 가정도 보았고 형제지간에 소송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돈이 우리의 믿음이 될 수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는 오직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예수님이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장래 심판주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따라가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구할 때 떠나지 않습니다.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여기 주님께서 떠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습니까? 기적과 이적때문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적과 기적 뒤에 주님이 말씀하시자 그들은 주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적과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합니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오직 말씀을 구하는 신앙이 끝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갖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에게 기적과 기적을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특히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당시의 4복음서시기에도 많은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상황은 아직 믿음이 없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은 은혜의 체험을 하고 난 뒤가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이적과 기적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이가 어려서 가장 먼저 다니는 유치원입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닙니다.이때에 그 나이 수준에 맞게 가르치는 학습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재미있는 학습법입니다. 그 학습법중에서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놀이를 체험하면서 재미있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공부에 대하여 준비하게 하고 흥미와 동기유발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직접 책을 대면하여 공부합니다. 만약에 고등학생이 되엇는데 어렷을적 추억을 잊지 못하고 매일 재미있는 놀이만을 구한다면 문제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때에 처음은 재미있습니다. 처음이기도 하지만 많은 은혜를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도 잘 하여 주십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것이 처음이니까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초보의 신앙에서 장성한 성인으로 어른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더죽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먼저 집중하면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말씀중심이 되어야 합니다.우리의 교회는 먼저 말씀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생명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한 은혜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옛날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던 신앙의 어린시절에는 자꾸 직접 내가 말씀을 듣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들은 말씀에 기대어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내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보면 직접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QT를 많이 강조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면서 잘 묵상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받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직접 일대일로 이 말씀을 받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벅차고 힘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남이 받은 말씀,남이 깨달은 말씀을 내가 받는 것도 좋지만 직접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좋아집니다.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더욱 잘 순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많은 분들이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을 먼저 구별하여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나도 우리는 바쁘기 때문에 시간을 먼저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먼저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할 때 여러분 우리의 가는 길이 하나님 중심이 됩니다.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다음에는 교회생활 중에서 예배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셔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모든 것을 드립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시간에 받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듣고 깨달은 말씀을 사람이 주는 말씀으로 듣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가 나에게 적용할 때 나의 믿음이 자라고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바로 세워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가 주님을 더욱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깨서 어떻게 나에게 역사하시는지 그 놀라운 사랑과 인도하심과 능력을 경험해보아야 합니다.
성경고후13:5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여 보라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비록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먼저 말씀을 먼저 무기로 삼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오직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3. 마귀의 미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갈때에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방해꾼 우리의 길을 엉뚱한 곳으로 유혹하는 훼방꾼이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70절에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나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가롯유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롯유다 자체가 마귀는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롯유다를 통해서 역사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정답을 말씀하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시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하면서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어서 주님깨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주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복음16장 23절에 ‘사탄아 내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마귀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제일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믿음도 흔들립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인생도 흔드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조심할 것은 생활에 염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염려하면 마귀가 돈의 유혹으로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여 믿음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며 기도하는 것이 염려의 마귀로부터 이기는 길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조심할 것은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움의 마음이 우리 속에 있으면 마귀가 우리 속에 분노하게 만들고 혈기를부리게 합니다. 그래서 살인하게 합니다. 미움을 이기는 길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함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도 사단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길에서 떠나도록 넘어지도록 미혹하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고 바로 이 공중의 권세잡은 악한 영 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6장에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5장 8절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직접 공격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미혹하고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조심할 것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롯유다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때 만남의 복이 필요합니다.
구약에 다윗이 요나단이라고 하는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서 생명을 건짐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대가인 바울이 바나바라고 하는 좋은 신앙의 친구를 만남으로 그가 교회 속의 좋을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디모데가 바울을 만남으로 그의 약점이 극복되고 교회의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마귀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만남으로 다함께 멸망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누구입니까?
삼손이 들릴라를 만난 경우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고 많은 은사를 소유한 삼손입니까? 그러나 마귀의 도구인 들리라의 만남을 통해서 유혹을 받고 결국 믿음도 잃고 은사도 잃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경우 둘중에 한 사람이 바른 믿음이 있어서 바르게 권면하엿다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다 결국 잘못된 만남을 통해서 다함께 하나님과 성령님을 거역하다가 죽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만남을 잘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많은 목사님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목회에 유익을 주는 분이 있고 목회에 손해를 끼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목사님들이라면 모두가 목회를 하는 분이기 때문에 목회에 유익을 주는 것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장에서 만남을 갖다보면 그렇지 않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의 나타나는 특징을 보면 매사에 부정적이고 진리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분들과 같이 자꾸 만남을 갖게 되면 나도 전염을 당합니다. 반대로 목회를 건전하게 잘 하시고 그 삶에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순종의 길을 가시는 분들을 만나면 내가 살고 내가 더욱 그 믿음의 길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환경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믿음의 길을 갈 때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마귀가 자꾸 우리를 낙오하도록 환경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미혹하고 있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주님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유행이 한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대중들이 많이 선택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이 길을 갈 때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과 결단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좋은게 좋은 것으로 이것도 저것도 다 취하여 가돌고 유혹을 합니다. 특별히 요즘같은 세상에서 적어도 직장생활을 하려고 하면 적당히 세상 사람들과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여야 할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때 내 육을 따라 행하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서서 한번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더 주님을 생각하시지 바랍니다. ‘만약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가는 말 ))))))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많은 약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 곁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곱 번 넘어지더라도 여덟 번 일어나서 오직 한길 믿음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중심으로 악한 영의 미혹을 경계하면서 믿음의 좁은 길을 날마다 걸어가시어서 모두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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