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27~31)

  • 잡초 잡초
  • 268
  • 0

첨부 1


누구나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숱한 우여곡절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전자는 자기의 힘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야 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난관을 이겨나간다는 점이 다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고아와 같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살핌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인생길에서 어려움을 만나 간구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숨어린 호소가 나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를 만나서 하나님께 열심히 부르짖어 간구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아니 들으셨는지 감감무소식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무관심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처럼 생각이 들 때 가장 피곤을 느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심령은 적막함에 떨어집니다.

다윗도 한 때 이와 같은 심정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편 13편 1절에서 그는 부르짖기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는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윗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곤란에 직면해 있는 분들은 없으십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제목으로 인생의 곤란한 시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다가오는 이유는 크게 둘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고난을 일컬어 연단이라고 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신 베드로전서 1장 7절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열 한 번째였습니다. 그는 야곱이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첫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야곱은 여러 아들보다 요셉을 깊이 사랑해서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형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요셉을 붙잡아서 이스마엘 상인에게 은 20을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형제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애굽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성실한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시기도 잠시였고,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보낸 13년은  요셉으로 하여금 큰일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는 연단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요셉은 여러 가지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냄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때가 되매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죄수의 신분에서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을 연단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귀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불같은 시험으로 연단하십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고백한 대로 고난을 이기고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지레 겁을 먹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시려고 이 같은 어려움을 주시는구나 생각하고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징계로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설교를 통해서 권면하시고, 신앙 양심에 가책을 주셔서 잘못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또는 생활 가운데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깨닫고 잘못을 회개하고 바로 서면 그처럼 다행스런 일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께서 매를 들어 때리십니다.

요나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셨으나 적국 니느웨가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했습니다. 그가 배의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잠을 청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일로 양심에 찔림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서 양심의 가책을 잊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니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심상치 않은 폭풍이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이 배에 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뽑혔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고 자기를 들어 바다 속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를 지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캄캄하고, 열기와 악취로 숨이 턱턱 막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사흘 동안이나 견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고기의 밥이 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냈습니다. 이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적국의 왕도인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요나가 당한 고난은 연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징계는 심판과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심판은 죄에 대한 형벌을 말하지만, 징계는 잘못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로서 고난이 다가올 때 겸비한 마음으로 감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2장 5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믿음으로 바로 서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앙과 우상숭배로 인해 바벨론에 멸망당하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고 하셨습니다. 비록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반역해서 죄 값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지만, 이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여전히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평안을 주고 소망 찬 내일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과 같이,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뿐인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술을 합니다. 수술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의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술을 시도합니다. 이 경우에 의사의 행위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선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 자기의 장기를 하나 떼어 주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의사는 대가를 받고 환자를 치료하지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조금도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외에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삶에 좋은 일이 생길 때만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좋지 못한 일이 생길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불변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그를 팔아먹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창 50:20)고 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그런가하면, 다윗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간증했습니다. 그는 시편 23편에서 노래하기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6)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도 그와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시편 34편 8절에서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실족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일이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만, 역경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면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려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재미작가 김은국 씨의 소설 순교자를 읽어보면, 북한 공산치하에서 12명의 목사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합니다. 사람들은 처형당한 목사들을 순교자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12명 모두 처형장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저주하면서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12명의 목사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의 관점으로는 초대 교회 당시에 기꺼이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던 성도들의 행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진실한 성도는 내가 병들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업에 실패해서 빈털터리가 되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죽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 없이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은 하나같이 이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언제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나아가심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앙망할 때 고난을 이기고도 남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이룩한 업적은 놀랄 정도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높이가 500미터가 넘는 초고층 빌딩을 건설하는가 하면, 달이나 화성에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우주정거장을 건설합니다. 암과 같은 불치병의 치료법을 개발해 내고, 유전자 정보를 해독하고, 생명체를 복제해 내기도 합니다. 또한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다리를 놓고, 그 위로 시속 300킬로 이상으로 열차가 달립니다. 작은 메모리 칩 안에 수십 권의 책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올는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원자력을 이용해서 전기를 생산하지만 그로 인한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은 물과 공기와 토양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오염시켰습니다. 의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여전히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수명이 늘어나서 한국인들의 평균 수명이 76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더구나 물질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정신적인 수준은 과거보다 퇴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감각적인 삶을 추구하며, 인생과 진리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우울증을 비롯해서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기준을 잃어버리고 각자가 제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인간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고난 앞에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사랑에 목말라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이 같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마음에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으스대는 인간들을 볼 때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과학 기술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죄책감을 없애주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 몇 분 후의 일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괜히 교만을 떨며 강한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한 척 한다고 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짓된 생각으로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이를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의 병들고 지친 영혼을 치료하고 쉼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분도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고 현실에 낙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대의 쾌락문화는 결국 내일에 대한 소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소망 없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의기소침해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들이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자포자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강하고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떠한 역경을 만나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이겨내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울한 모습이 아니라 밝고 맑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의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이사야서 40장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27)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소년이라고, 또는 장년이라고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언제나 힘차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년도 낙심하고, 지치고, 쓰러지며, 장년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총수가 자살한 사건을 보면서 ‘그토록 강하고 지혜롭고 수완이 좋아보였던 사람이 저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마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자랑하던 천하장사 항우도 한신에게 패하자 오강(烏江) 가에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항우 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만 드릴라의 꾐에 빠져 머리카락을 밀리자 힘을 잃고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히는 수욕을 당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느라 어찌나 지쳤든지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라고 호소했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광야로 피신하였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기를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삼손이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용장들도 피곤에 지쳐서 쓰러진 적이 있다면 하물며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어 큰일을 감당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믿음의 위인들이 이룩한 위업은 하나같이 그들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힘으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낙심할만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까운 때이다”라고 하였고,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속히 응답해 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간절히 원하도록 하시려는 까닭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부르짖을 때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십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민족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며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뜻이 없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잊어버리시는 일이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불꽃같으신 눈으로 성도들을 보살피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는 우리를 구원하실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십니다. 인간은 많은 일을 하면 피곤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피곤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홍해를 가르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만나를 내리는 일이나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는 일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는 그같은 일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니 이처럼 놀라운 은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도와주시는 이유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을 앙망할 때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해 주셔서 당면한 문제와 시련을 능히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 능력 있는 자가 다 지쳐서 넘어지고 자빠질지라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성도님들은 새 힘을 얻어 독수리가 날개치며 창공을 날아오르듯이 힘찬 인생을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입니다. 가장 높이 날 수 있는 새가 독수리입니다. 가장 높이 날기 위해서는 그 날개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닭이나 오리처럼 땅을 쳐다보면서 살면 안 됩니다. 높은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차원 높은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살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앙에 사로잡히지 말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담대하게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를 앙망하심으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피곤하지 않고 좌절을 모르는 능력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