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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는 신앙생활(4) - 고난 (롬 8: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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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17살 나이에 노예로 팔리고 말았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아버지를 속였다. 야곱은 그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고 울었다. 요셉을 잃은 것은 평생에 그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한동안 형들에 대한 배신감과 노예 신분으로 인한 수치심 그리고 타국생활로 인한 극심한 고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인에게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할 즈음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그가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셨던 꿈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39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는 문구가 반복되고 있다. 그가 고난의 세월을 잘 이겨냈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약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그에게 안겨 주셨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하지 않고서도 잘 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다. 물론 야곱은 고의로 아들 요셉을 고난의 길로 보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 요셉은 이 시련의 순간들을 믿음으로 잘 이겨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꿈을 이룬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단지 천덕꾸러기 같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후사 곧 상속자가 되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사는 권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이 현실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 간 고난의 세월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이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그 고난은 독특한 것이다. 그 고난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1.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받는 고난이 있다(17절).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야곱은 130년의 세월이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회고한다. 시편기자는 70년 80년 수를 누린 것이 수고와 슬픔뿐이라 했다. 노인이 되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진다. 인생의 훈장이다. 지나온 삶의 여정이 고달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이 고달픈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비신자들에게는 없는 고난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다.

만약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선지자다.” 이렇게 말했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추앙받는 모세나 다윗 이상 가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집요하게 공격과 모함을 받고 결국은 십자가의 처참한 종말을 맞게 된것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예수를 향하여 이렇게 조롱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에서 내려 오라.”

예수님께서 이미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면제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말씀은 그렇지가 않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은 과거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한 고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소망이 없는 고난은 삶의 의욕을 빼앗아 버린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고난은 고난을 이길 힘도 함께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벧전4:13-14,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에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다. 예수 믿는다고 시부모에게 남편에게 형제들에게 시달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앙 때문에 눈치보면서 기죽어 사는 주부들이 많다. 주일성수 문제로 인해 직장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고,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보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 할 수 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핍박을 당하고, 성공을 못하고,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면 도리어 기뻐하기 바란다. 그 고난을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적인 것이다.

2.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는 탄식이 있다(19-22).

8:19-2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1)첫 번째는 피조물의 탄식이다.
19-22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피조물들도 탄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 어떻게 탄식을 할 수 있는가? 산과 바위와 나무들이 어떻게 탄식을 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아서 탄식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창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피조물들의 탄식소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에 즐거운 노래만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인간은 땅을 파 헤치기 시작했다. 땅을 파헤치기 시작할 때 땅이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땅을 못 살게 굴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지구의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오면 올 수록 피조물의 탄식소리가 더욱 커진다. 요즘은 피조물의 탄식소리가 워낙 커지니까 세상사람들의 귓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 농약 좀 제발 뿌리지 마세요.
- 오염물질을 제발 버리지 마세요.

도시화로 인해 땅이 숨을 쉬지 못하도록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어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버는 일에 눈 귀가 어두워서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고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두 번째는 성도들의 탄식이다.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무엇 때문에 탄식을 하는가?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가운데 나오는 탄식이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탄식이란 용어는 일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도리어 화를 불러오는 악한 결과로 인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이전에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내 마음을 열어서 교회당으로 인도해 주셨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임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의 결과이다.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치심을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권세를 가진 우리가 왜 탄식을 해야 만 하는가?

그 이유는 아직 우리 마음 속에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약해질 때 육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행동들을 종종 저지르기 때문에 탄성이 나오는 것이다. 이 탄성이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고후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 땅의 모든 피조물에게도 탄식이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탄식이 있다. 그러나 그 탄식은 절망 속에서 흘러 나오는 탄성이 아니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는 탄식인 것이다.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은 고난의 삶이요, 탄식이 있는 삶이다. 그러나 낙심치 않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부활을 바라 보는 탄식이기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이다.

3.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이 있다.

다시 본문 18절로 돌아와서 후반절의 말씀을 보면 놀라운 미래에 대한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영광은 구체적으로는 21절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고 23절에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골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광에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질병이나 죽음, 죄악으로 인해 물들지 않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거룩한 삶을 위해서 육체의 정욕과 싸우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영광스러운 몸, 곧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요,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장차 성도들에게 임하게 될 이 놀라운 영광의 날을 생각한다면 지금 현재 성도들이 이 땅에 받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의 신앙으로 인해 이 땅에 받는 고난이 큽니까? 그 고난으로 인해 삶의 의욕마져 사라지고 절망스럽습니까? 용기를 잃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게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엄청난 영광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받는 고난이 있고, 우리 만이 아는 탄식이 있다. 그러나 우리만이 받는 영광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1.우리가 받을 영광을 바라보라.
합동신학대학원의 현창학교수, 박주영과 고종수를 비교했다. 두 사람 다 축구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박주영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고, 고종수는 현재 프로 축구단의 평범한 선수로 뛰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원인 분석을 내 놓았다. 박주영은 인기와 관계 없이 축구만 생각하고 연습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고, 고종수는 방송국 출입이 너무 잦아서 더 이상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죄의 낙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에게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받는 고난을 감수한다면 그 영광은 현재 받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혹 고난 가운데 있는가? 낙심하지 말라. 장차 받을 영광을 바라보며 이기기 바란다. 혹 고난이 없는 분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로 작정하라. 주님을 위해서 여러분의 몸을 아끼지 않기 바란다.

2.참음으로 기다리라.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참음으로 기다리자.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욥과 같이 끝까지 인내하면 갑절의 복으로 영광으로 옷 입혀 주실 것이다. 복되신 주님과 함께 고난과 영광에도 동참하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송선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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